#20화
잠시 후 로베르트의 집무실.
새치름한 얼굴로 팔짱을 낀 라모나와 그답지 않게 얌전한 로베르트가 마주 앉았다.
라모나는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로베르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로베르트는 그녀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미치겠군…… 도저히 기억이 없으니.’
그가 한숨을 삼켰다.
둘 다 어젯밤 실컷 술을 마셨다는 기억은 있지만, 취해서 곯아떨어진 이후가 잘 기억나지 않는 터였다.
아침에 사용인들이 후다닥 방을 빠져나간 뒤.
혹시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였나 자괴감에 빠져 머리를 감싸 쥐고 기억을 더듬는 그와 달리, 라모나는 침착하기 짝이 없었다.
<저, 제가 명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취했다고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은 아닙니다.>
로베르트의 말에 그녀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예?>
덤덤한 반응에 오히려 로베르트가 놀랄 정도였다.
<제가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한들…… 공작님께서 함부로 제게 손을 대셨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정말 죽여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는 라모나의 얼굴에는 로베르트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확실하게 정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 속에는 증오가 섞여 있었다.
로베르트는 문득 어제 그녀가 술김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태자가 협박을 했다 했던가.’
흐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에드윈에게 조사를 더 세세히 해 오라 해야겠군.’
에드윈, 뒷골목의 숨은 수장인 그가 나선다면 좀 괜찮은 정보가 들어오리라.
뒷조사라는 사실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방법이 그것뿐인 것을.
‘쯧.’
그가 혀를 찼다.
그때, 라모나가 그를 불렀다.
“각하? 그래서 저를 왜 부르신 거죠.”
“아, 확인해 볼 사항이 있어서 말입니다. 브리튼, 어젯밤 레이디와 내가 혼전 계약서를 작성했다고?”
“예, 각하.”
“가져오도록.”
로베르트의 명에 브리튼이 문제의 계약서를 들고 왔다.
‘흐음?’
여전히 팔짱을 굳게 낀 라모나가 힐끔 혼전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우아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손을 뻗었다.
“실례지만 각하, 제가 먼저 봐도 될까요?”
라모나가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안 내어 주면 어쩔 거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침의 일로 라모나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로베르트는 별말 없이 순순히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어머나, 감사해요.”
그녀가 말과는 달리 하나도 안 감사해 보이는 얼굴로 그에게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로베르트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젠장.’
분하거나 억울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정말, 진실로 아무 의도도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입술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맹세컨대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라모나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고작 어제 그 일 때문에?
미치겠군. 정말 미치겠어. 로베르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사이, 계약서를 읽는 라모나의 표정은 점점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아니, 이게 다라고?’
분명 저 남자의 헛소리를 막기 위한 조항을 넣겠다고 마음먹었건만, 계약서는 너무도 휑했다.
‘하루에 세 마디만 하게 해야 했는데!’
통탄할 일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계약을 어길 시에 주어지는 페널티는 정말이지 기가 찼다.
죽음으로 사죄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앞구르기로 저 멀리 가출해 버릴 수준이었다.
어차피 1년 후면 죽을 남자를 미리 죽여서 대체 뭘 한단 말인가.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네가 어제는 정녕 미쳤구나.’
라모나가 이마를 짚었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야 취해서 그랬다고 치지만.
‘저 남자는 왜 이딴 계약에 공작가의 인장까지 찍은 거야……?’
그녀는 진심으로 고민했다. 또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혹시 어디 모자란가.
레오벤 제국이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싶었던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상치 않은 눈빛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라모나?”
라모나는 한숨을 내쉬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후우. 각하도 보세요.”
로베르트는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러나 계약서를 읽는 로베르트의 얼굴도 곧 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탁.
그가 계약서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하.”
여유로워 보이려 애썼지만 누가 봐도 억지로 웃는 모습이었다.
“하. 하. 하, 이런 술김에 쓴 계약서는 효력이.”
“외람되오나 각하,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는 무효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젠장, 인장…….”
로베르트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사이 브리튼은 라모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외람되오나 레이디.”
“무슨 일이지?”
“이 계약서에 따르면 저희 공작 각하께서는 레이디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실 수 없습니다.”
‘그걸 지금 갑자기 왜?’
라모나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브리튼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랐다.
상체를 탈의한 로베르트 메닝엔이 허둥지둥 그녀의 다리를 붙들던 모습이……!
그 사실에서 라모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러나.
‘아냐, 지금은 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일단 저 남자가…….’
계약을 어겼다 이거지?
그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 계약서에 의하면 공작 각하께서는 제 몸에 손을 대시면 안 되는데…….”
흐음, 그녀가 턱을 괴었다.
“아침에 그리…… 뭐,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제게 하셨고 대가는…….”
그제야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 로베르트가 어쩐지 애타는 목소리로 라모나를 불렀다.
“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대답 없이 피식 웃은 라모나가 목에 손을 그었다.
“죽음으로 사죄, 라……?”
“…….”
오늘따라 아침부터 자꾸 일이 꼬이는 기분에 로베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설마, 죽이겠어. 에이 설마, 그래도 약혼자인데.
그리 생각한 로베르트가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최대한 잘생겨 보이도록.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 *
하마터면 메닝엔 공작이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을 뻔한 중대한 사건이었으나, 다행히 너그러우신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께서는 이 일을 명쾌하게 처리했다.
“뭐, 결혼도 안 한 상황에서 내가 당신을 죽여서 얻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거 결혼한 상황이었다면 저를 죽였을 거라는 말처럼 들립니다만.”
라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찝찝해진 로베르트가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가.’
아무튼 그녀에 대한 의심을 한 꺼풀 덜어 냈다.
그녀가 황태자의 사람이라고 보기엔 계약서가 너무나 어처구니없었으니까.
‘물론 문제가 생긴다 한들 안전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라모나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피해 보상은 돈으로 주세요.”
“……예?”
“돈요, 각하. 돈 모르세요? 현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돈, 그래. 보상이라면 역시 현금이 최고였다.
회귀 전 과거의 라모나였다면 분명 아이젠부르크를 위해 이런저런 계약을 맺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가문을 위해 계약을 맺어 봤자, 요하네스가 훼방 놓으면 다 망가질 게 뻔했다.
‘차라리 현금으로 모아 두면 그 개자식이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대처할 수 있으니까.’
어차피 메닝엔 공작과 그녀는 이미 한배를 탔다.
굳이 불필요한 체면 차릴 것 없이 라모나는 당당하고 솔직하게 가장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돈요, 돈.
그녀의 요구에 로베르트는 눈만 껌뻑였다.
물론 돈을 주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원래 연인들 사이에는 더…… 뭐랄까 낭만적인 선물이 오가야 하지 않나?’
그냥 현금이라니, 그의 연애 상식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금화로 꽃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그도 아니면 벽에 도배라도 해? 아니면 욕조에 가득 채워?
여러 방안을 생각해 봤지만, 뭐가 됐든 다 별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맨틱하지가 않잖아.’
한참 고민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 현물 자산이 필요하시다면 혹 보석은 어떠십니까.”
보석이라, 그의 제안에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뭐, 그것도 괜찮지. 좋은 물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오르기도 하고, 연인들 간에 주고받기에도 괜찮고.’
어찌 됐든 대외적으로 그들은 첫눈에 반해 약혼한 사이였으니, 확실히 현금보다는 보석이 나을 듯했다.
생각을 정리한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메닝엔 공작 각하의 몸값은 대체 어느 정도인지 기대가 많이 되네요.”
물론 도발도 잊지 않았다.
타고난 싸움꾼 로베르트가 그 안에 담긴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오호, 나를 도발하시겠다.’
아무래도 이 발칙한 레이디에게 메닝엔의 돈맛을 좀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일정을 한번 떠올려 본 그가 말했다.
“뭐, 좋습니다. 그럼 이틀 후에 나가실까요?”
“왜요?”
라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되물었다.
‘왜냐니?’
로베르트는 순간 저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모나는 다시 말했다.
“저는 오늘 당장 시간이 되는걸요.”
“제가 그때밖에 시간이 안 되니까……?”
“그러니까, 제가 왜 공작 각하랑 함께 나가야 하죠?”
로베르트가 무슨 그런 이상한 말을 하냐는 듯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얄밉게 어깨를 으쓱한 라모나가 덧붙였다.
“바쁘신 공작님은 굳이 안 나가셔도 괜찮아요, 솜씨 좋은 호위나 하나 붙여 주세요. 대금은 공작가 앞으로 달아 두면 될까요?”
‘아, 그러니까 이거 그건가.’
나는 돈이나 주고 썩 꺼지라고?
좀 너무한 것 아닌가. 로베르트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오늘 아침은 그의 참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