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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9화 (20/151)

#19화

‘뭐, 이 상태로 계약서를 쓰면 내가 유리하긴 하겠다만…….’

흠, 유리하긴 하지. 생각해 보니 괜찮은 것도 같았다.

사실 아직도 아까의 억울함이 남아 있는 탓이 꽤 컸지만, 잘나디잘난 메닝엔 공작께서는 자신의 치졸한 속내를 애써 외면했다.

그가 은근슬쩍 물었다.

“정말 지금 계약서를 쓰실 겁니까.”

“예, 서로 조항 하나씩 적어요.”

여전히 정신없어 보이는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시다면야…….”

로베르트가 벨을 흔들어 문 앞에 대기하고 있을 브리튼을 불렀다.

“종이와 펜, 그리고 인장을 가져오게.”

인장이라는 말에 브리튼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하.”

라모나에게 멱살을 잡힌 로베르트를 보고도 브리튼은 군말 없이 손님방을 떠났다.

다만 술 취한 사람과 계약을 맺으려는 로베르트를 아주 파렴치한 취급 하는 눈빛을 감추지는 않았다.

브리튼을 기다리는 그 잠깐 사이, 술기운을 버티지 못한 라모나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눈도 덩달아 감겨 오기 시작했다.

술이 깼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도 라모나에 비해서 조금 나은 상태였을 뿐 그다지 멀쩡한 정신 상태는 아니었다.

멱살을 잡힌 채 소파에 축 늘어진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라모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새근새근.

야심한 시각, 다 큰 성인 남녀 단둘뿐인 손님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똑똑.

“들어가겠습니다.”

집사 브리튼의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헉! 미쳤나 봐.’

자신의 손이 로베르트의 허벅지 안쪽을 꽉 붙들고 있는 것을 발견한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흠흠.”

이마는 왜 이렇게 아픈 걸까. 또 치마는 왜 이리 말려 올라간 것일까.

알 수 없는 일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애꿎은 머리만 만지작거렸다. 로베르트 또한 연거푸 이마를 쓸어 올렸다.

브리튼은 속으로 혀를 차며 그런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목덜미가 이미 붉은 것이…… 충분히 많이 드셨군. 레이디를 떠보려다 괜한 주량 내기가 되어 버린 것이겠지.’

보나 마나 뻔했다.

그의 주인은 어지간히 승부욕이 강했으니까. 능숙한 집사 브리튼이 한숨을 삼켰다.

목을 한번 풀며 로베르트가 말했다.

“흠, 흠. 그럼 이제 계약서를 써 볼까요. 레이디.”

“조, 좋아요.”

브리튼은 술 냄새 풀풀 풍기며 혼전 계약서를 쓰겠다는 이 사람들을 말려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뭐, 정 문제가 생기면 그분이 나서실 테니.’

가볍게 결론을 내린 그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주정뱅이들의 계약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런 집사의 속내를 모르는 로베르트는 제법 젠틀하게 계약을 주도했다.

“브리튼, 자네가 대필을 하도록.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물론이죠.”

어쩐지 정신없어 보이는 라모나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이디께서 원하시는 조항은……?”

“제 몸에 허락 없이 함부로 손대지 말아 주세요.”

“대외적으로 연인 행세를 해야 할 때는 어찌합니까?”

“그건 예외 조항으로 두도록 하죠. 단, 그때도 가벼운 입맞춤, 어깨, 허리 이외에는 절대 안 돼요.”

“좋습니다. 브리튼, 적게.”

두 사람의 상태는 정상이 아닌 듯했지만, 다행히 오고 가는 내용은 멀쩡했다.

“각하는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제 평판을 위해서라도 다른 남자는 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야 문제없죠.”

“좋습니다, 그럼 그 조항은 공평하게 제게도 적용하도록 하죠.”

로베르트의 말에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동의를 확인한 로베르트가 브리튼을 불렀다.

“브리튼.”

“예, 각하.”

사각사각, 브리튼이 조항을 받아 적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고요하고, 따뜻하고. 거기다 알코올도 제법 들어갔다. 딱 잠 오기 좋은 환경이었다.

슬슬 로베르트의 눈이 나른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음, 레이디…… 이것도 필요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좋아요.”

듣지도 않고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 또한 이미 반쯤, 아니 사실 그 이상 감겨 있었다.

“브리튼.”

로베르트가 브리튼을 불렀다. 아무래도 받아 적으라는 모양인 듯했다.

‘대체…… 뭘?’

아무것도 논하지 않고 무작정 받아 적으라는 주인을 브리튼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으로 욕하는 그의 시선을 읽은 로베르트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그, 이 계약에 대해서 둘 사이에 합의되지 않은 제삼자가 알지 못하게 하도록.”

“……예, 각하.”

브리튼이 군말 없이 새 조항을 적었다.

그때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한데, 각하……?”

“예?”

“사실…… 계약서라는 게 그렇잖아요.”

그녀가 습관적으로 술잔을 홀짝였다.

이런, 이미 충분히 드신 듯한데 말려야 하지 않나? 브리튼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다시 술잔을 홀짝인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물론 서로 신의를 다 해서 지키려고 하는 계약이지만……. 으으음, 지키지 않을 시를 고려하여 페널티도 넣어야 하지…… 않겠어요?”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군요.”

로베르트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또한 얼굴에 열이 오르는지 연거푸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알코올 냄새가 진하게 나는 풍경이었다.

“하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예? 뭐가요?”

얼마나 취했는지, 방금 자신이 말한 것도 까먹은 라모나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계약을 어길 시에 페널티 말입니다.”

“아아, 그 말씀이시구나아.”

대답하는 그녀는 어느새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로베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졌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민하던 라모나가 말했다.

“그, 신의를 저버렸으니…… 죽음으로 사죄하는 건 어떨까요.”

“오, 좋습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재밌는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좋기는 뭐가 좋아. 그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브리튼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애초에 몸에 손대지 않고, 따로 정부도 두지 않겠다니.

그런데 그걸 어기면 죽음으로 사죄한다고?

딱 공작가의 대가 끊기기 좋은 계약이었다.

그런 그의 속내도 모르는 로베르트가 브리튼에게 명했다.

“브리튼…… 적…… 적어…….”

“예.”

찝찝해하는 표정으로 마지막 조항을 계약서에 적으며 브리튼은 생각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분께 연통을 넣어야겠군.’

다행히 이 말도 안 되는 계약에 안전장치가 있기는 했으니까.

공작가의 인장을 쓴다는 것.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브리튼은 말없이 로베르트, 그의 임시 주인을 잠시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

* * *

다음 날 아침.

“으윽…….”

라모나는 끔찍한 두통에 눈을 떴다. 과음의 대가였다.

아직 낯설기만 한 메닝엔 공작저의 천장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맙소사…… 너무 마셨다.’

10년 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그것도 열여덟 살의 몸으로.

그런데 저녁도 먹지 않고 술부터 들이부었으니 머리가 아플 수밖에.

‘멍청하게 굴었네.’

라모나가 한숨을 삼켰다.

요하네스의 꿈 때문일까, 아니면 새로운 삶이 불안한 탓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확실히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정신 차리자,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설마 뭔가 실수한 건 아니겠지.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라모나는 다시 눈을 감고는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런데…….

‘잠깐만……?’

느낌이 좀 이상했다.

무언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대한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내 앞에 이 단단한 건 대체 뭐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단단하고, 커다랗고, 따끈한 무언가. 그리고 코끝에 스치는.

‘……익숙한 향기?’

심상치 않은 예감에 라모나가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 한가득, 널찍한 살색의 무언가가 들어왔다.

넓은 어깨, 그리고 잘 깎은 조각 같은 섬세한 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순간.

“꺄아아아악!”

라모나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녀의 비명에 놀란 로베르트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무, 무슨 일이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의 상체에 라모나가 황급히 눈을 가렸다.

“각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니, 라모나. 그게.”

“미쳤어요? 일단 얼른 가리세요!”

라모나의 비명 같은 외침에 로베르트가 황급히 이불로 몸을 가렸다.

“아니, 라모나. 일단 제 이야기를 좀.”

“이 변태! 가려! 가리라니까!”

“그, 그게 아니라…….”

로베르트가 무어라 변명하려던 때였다.

라모나의 비명에 놀란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후다닥 손님방 앞으로 뛰어왔다.

쾅쾅쾅!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집사 브리튼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놀라서 소리를 지르기는 했다만, 남들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광경이었다.

당황한 라모나가 로베르트의 등짝을 때렸다.

짝!

“빨리! 빨리 옷 입으세요. 빨리요!”

“아, 알겠습니다.”

그녀에게 떠밀린 로베르트가 황급히 옷을 입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꺅! 공작님 그건 제 다리예요!”

허둥대던 로베르트가 짚은 것은 안타깝게도 라모나의 다리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라모나는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생선처럼 퍼드득 몸부림을 쳤고, 그 바람에 균형을 잃은 로베르트는 그만 라모나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레이디, 문을 열겠습니다!”

계속되는 비명에 위급한 상황이 벌어진 것으로 판단한 브리튼이 다급히 문을 열었다.

벌컥.

이불에 흐트러진 레이디의 머리카락, 그리고 상체를 탈의한 채 그녀를 덮친 치명적인 매력의 메닝엔 공작.

“흐어어어어업.”

문을 열었던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아찔한 침실 분위기에 놀란 숨을 들이켜며 다시 문을 닫았다.

쾅!

민망한 정적 속, 로베르트의 아래에 깔린 라모나가 이를 꽉 깨물었다.

“극흐…… 일단 좀 비켜 주실래요?”

눈을 질끈 감은 로베르트가 얌전히 라모나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브리튼…… 분명 일부러 문을 열었겠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메닝엔 공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공작위에 오르기까지.

로베르트 메닝엔의 21년 인생 중 가장 난처하고 억울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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