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로베르트는 그런 라모나를 보며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얼굴이 홧홧해지는 기분에 라모나는 그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했다.
‘아, 정말 재수 없는데 잘생겼어.’
역시 입만 다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자꾸 곱게 휘는 눈이며, 비스듬히 올라간 한쪽 입꼬리가 오늘따라 매혹적이었다.
‘……어떡해, 취했나 봐.’
라모나는 뜨끈해진 양 뺨을 손으로 감쌌다.
로베르트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그럼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본론?”
“예, 본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본론? 그게 뭐지?’
그녀가 이미 많이 취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라모나는 잠시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네,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본론? 그게 뭐더라?
턱을 괴고 있던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본론?”
순간 제 몸을 가누지 못한 그녀가 균형을 잃은 채 고개를 삐끗하고 말았다.
이내.
쿵!
“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이마가 테이블에 부딪혔다.
깜짝 놀란 로베르트가 황급히 라모나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순간 푸른빛이 잠시 반짝인 것도 같았지만, 두 사람 다 눈치채지 못했다.
“세상에,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아…… 으으…….”
울상이 된 라모나가 중얼거렸다.
“머리 아파…….”
“그…… 아플 만합니다.”
뭐라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던 로베르트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라모나는 양손으로 조심히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아파…….”
꼭 먹이를 잃어버린 너구리 같은 모습이었다.
술에 만취한 사람을 보고 있자니, 반대로 로베르트는 서서히 술이 깨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좀 귀엽……. 아니 젠장, 너무 많이 마셨군.’
정신 차려, 로베르트 메닝엔. 스스로를 다그친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눈앞에 보이는 빈 병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분명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런 상황이 되어 있었다.
아이젠부르크가 주당으로 유명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만큼이나 술을 마실 줄이야.
로베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여러모로 보통은 아냐.’
이제라도 조금 그녀의 속마음을 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속마음이라니. 대체 무슨 속마음? 순간 왠지 모를 갈증에 그가 물을 들이켰다.
그때, 여전히 벌게진 이마를 감싸고 있던 라모나가 중얼거렸다.
“개자식.”
갑자기 튀어나온 험한 말에 로베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저 말입니까?”
“아니, 그쪽 말고. 요하네스 그 새끼요.”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 유해한 변태 자식.”
로베르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로 들어오라니, 그런 취급을 받았으니 욕이 나올 만도 했다.
하지만 라모나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로베르트는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새끼가…… 부모님을, 흡, 부모님을 걸고…… 레이먼도 멀리…….”
‘뭐?’
심상찮은 내용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레이디, 실례지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이미 술에 잔뜩 취한 라모나와 대화가 될 리가 없었다.
“레이먼, 레이먼은 왜 그렇게 됐을까요……. 그런데 미카엘라 그 계집애는…… 하! 걔가 진짜 제일 웃겨. 걔가 제일 쓰레기야.”
억울하다는 듯 헛웃음을 크게 친 라모나의 고개가 다시 기우뚱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로베르트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부상을 막는 데 성공했다.
툭, 라모나의 이마가 로베르트의 손 위로 맥없이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라모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마차 사고…… 그쪽 어머니 때문…… 아니에요.”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부모의 이야기에 로베르트의 눈이 커졌다.
“내가 알아. 증거는…….”
의아한 이야기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게 무슨……?”
그러나 라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내 그녀에게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 상태 그대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후.”
로베르트가 한숨을 삼켰다.
‘많이 취했나보군.’
마차 사고니 뭐니, 단순히 취해서 하는 헛소리일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건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닌가.’
“저, 레이디. 지금 많이 취하신 것…….”
로베르트는 그녀를 살며시 소파에 눕히려 했다. 그때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라모나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같은…….”
놀란 로베르트가 말끝을 흐렸다.
술기운에 두 뺨이 달아오른 라모나는 갑자기 치맛자락을 주섬주섬 붙들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로베르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그 상태로 엉거주춤하게 로베르트가 앉은 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저, 저기. 레이디?”
로베르트의 당황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라모나는 침착하게 테이블을 넘어왔다.
술에 취한 사람에게 침착하다는 표현이 웃기기는 했지만 정말 그녀는 침착해 보였다.
그리고 덥석,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자그마한 손을 올렸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대체 무슨 일이야.
당황한 로베르트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라모나는 그런 그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해요!”
“예, 예?”
많은 것이 생략된 라모나의 말에 천하의 로베르트 메닝엔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뭐, 뭘 하자는 말입니까.”
그것도 이 야심한 시간에, 내 허벅지까지 붙들고.
그러고 보니 그녀는 아까 자신에게 몸이 좋다고 말했다. 아, 물론 얼굴 칭찬도 빼먹지 않았다.
‘설마…… 나를 가지고 싶어서…… 밑밥을 깔아 둔 건가?’
그럴 수 있지. 그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각종 상상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주춤했다.
그 와중에 비스듬히 올라간 그녀의 입술이 왜 이리 잘 보이는지, 긴장한 로베르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라모나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피식, 작게 웃었다.
“하여간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네.”
그 한마디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잘생겼다. 그래 난 잘생겼지. 그건 당연한 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하도 많이 들어 귀에 새겨지기라도 한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왠지, 라모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뭔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잘생겨서 다행이네.’
고양이같이 올라간 새침한 그녀의 눈이 홀리듯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아.’
젠장, 예쁘긴 진짜 예쁘네. 그야말로 해 주고 싶은 말이었다.
로베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진 라모나의 손이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들판의 제비꽃, 어린 시절 키운 강아지, 재수 없는 황제의 얼굴 등등.
그러나 라모나가, “하자고요.”라고 말하는 순간.
‘……젠장.’
그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꿀꺽.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키스를…… 어떻게 하더라.’
목뒤를 잡으면 되던가.
이렇게? 살짝 옆으로 틀듯이?
목뒤를 잡으면…… 그다음엔? 눈을 감고 입술을 마주치면 되나?
그다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거세게 욕망이 일기 시작했다.
‘술기운 때문이다. 이건 다 술 때문이야.’
애써 술 핑계를 댔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봐. 로베르트 메닝엔. 처음 본 순간부터 한 번쯤…… 이런 일이 있기를 기대했잖아. 아냐?
그는 욕망의 질문에 차마 부인하지 못했다.
꿀꺽.
다시 한번 침을 삼킨 그가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그런 로베르트가 답답한 듯 라모나가 덥석, 그의 셔츠를 붙들었다.
박력 넘치는 라모나의 행동에 로베르트의 눈썹이 꿈틀하고 휘었다.
달리기라도 한 듯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술 냄새에 달콤한 향이 섞여 들었다. 향수? 아니면 살 내음? 어느 쪽이든 미쳐 버릴 노릇이었다.
그는 라모나의 뺨을 쓸어내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하나만 확실히 해 두죠. 그대가 먼저 조른 겁니다.”
그의 말에 라모나가 어쩐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해요.”
세상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그가 천천히 새하얀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재밌다.
아니, 이 감정을 재미있다는 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유독 심장이 짜릿하게 간질거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확인받듯 다시 한번 속삭였다.
“무르기 없습니다.”
“좋아요.”
이보다 더 확실한 허락이 있을까.
야살스럽게 눈을 감은 그가 그녀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으려던 바로 그 순간……!
“각하. 빨리하자니까요?”
갑자기 라모나는 그를 재촉했다.
‘……뭐?’
여기서 뭘 더? 이해할 수 없는 라모나의 말에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바로? 키스도 안 하고?’
그런 취향이었나? 당황한 그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술기운에 얼굴이 달아오른 라모나가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친 그녀가 말했다.
“계약서 쓰는 거…… 빨리하자니까요!”
신이시여.
순간 로베르트는 누군가가 큼지막한 얼음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가격한 듯한 충격을 받았다.
“…….”
라모나는 말문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로베르트를 채근했다.
“빨리요.”
“후우…… 그러니까…… 빨리하자는 게…….”
로베르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계약서?”
계약서라는 말에 라모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생각했다.
‘미치겠군.’
정말 미치겠어. 꼭 술 취한 사람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한, 세상에 둘도 없는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억울함이 가슴에 사무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모나는 로베르트의 셔츠 목깃을 손에 꼭 쥐고 흔들었다.
“네? 계약서 쓰자니까요?”
아마도 그녀는 악수를 하려던 듯했지만, 실상은 로베르트의 멱살을 잡은 모양새였다.
그녀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어쩐지 허탈한 눈을 한 그가 물었다.
“지금 말입니까?”
“예에.”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휘청하는 그녀의 머리를 로베르트가 꼭 붙들었다. 물론 여전히 멱살은 잡힌 채였다.
“……레이디, 지금 많이 취하셨습니다만.”
그의 말에 라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닌데?”
“예?”
“안 취했는데?”
아니, 너 지금 누가 봐도 취했는데? 로베르트가 황당한 얼굴로 라모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