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7화 (18/151)

#17화

Chapter 3. 재앙의 주둥이

‘갑자기 웬 약혼?’

라모나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각하, 저희가 대체 언제 약혼을 했나요?”

“어차피 곧 할 텐데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데.’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한 일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로베르트의 페이스에 휘말린 라모나는 얼떨결에 자리에 앉고 말았다.

자연스레 맞은편에 앉은 그가 눈웃음을 쳤다. 깊고 검은 눈이 사람을 홀릴 기세로 야살스레 휘었다.

“스파클링 좋아하십니까?”

천연덕스럽게 와인을 권하는 그를 보며 라모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분명 제 말을 신뢰하실 수 있을 때 결혼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아아, 그 건이라면…….”

로베르트는 브리튼에게 와인을 따르라 눈짓했다.

“믿습니다.”

“……예?”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남자가 이렇게 쉽게 자신을 믿을 리 없었다.

‘또 뭔 짓을 하려고?’

라모나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을 보니, 믿을 수밖에 없더군요.”

로베르트가 참 잘생긴 얼굴로 달콤하게 웃었다.

“합시다, 약혼.”

얼굴 덕일까, 로맨틱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사자인 라모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 선심 쓴다는 듯한 미소는 뭐야?’

기가 막혀, 정말. 라모나가 코웃음을 쳤다.

“……뭘 하자고요?”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까짓것 약혼, 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까짓것 약혼이라니? 라모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각하, 혹시 이미 와인을 몇 잔 하고 오신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혹시 드셔야 할 약을 안 드신 건…….”

“약을 챙겨 먹어야 할 정도의 지병은 없습니다. 그리고 아닙니다.”

로베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레이디, 아무래도 제국 최고의 신랑감인 저를 이리 쉽게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시는 듯한데…….”

물론 그 지독하게 잘생긴 미소는 그대로 입가에 머금은 채였다.

혹시 진짜 돌아 버렸나? 라모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니 뭐니 말하는 거 보면 평소 같긴 한데?’

설마 정말 약혼을 결정한 걸까, 이 한방으로?

라모나는 금세 그의 의도를 짐작했다.

‘……또 날 떠보려는 거구나.’

아무래도 댄버스 부인의 일 때문인 듯했다.

그런 주제에 저 능글맞은 얼굴이라니, 하여간 방심할 틈 없는 남자였다.

“각하, 낮의 일은 정말 사고였어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오. 사고로 뺨을?”

유독 즐거운 얼굴을 한 로베르트를 바라보며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 제가 잠결에 실수했어요.”

실수? 로베르트는 김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네.”

저 새끼가 진짜. 라모나는 대놓고 아쉬워하는 티를 내는 로베르트를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그래서 약혼하자고 하신 거예요?”

“설마.”

“……그럼 뭔데요?”

“말 그대로입니다. 레이디께서 내기에 이기셨으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생글거리며 덧붙였다.

“약혼.”

‘왜 저러지?’

6시 성애자가 아니라 약혼 성애자였나?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진정해, 라모나. 그냥 저 남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뿐이야.’

생각해 보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항상 제정신 아닌 말을 하고 다녔으니까.

그래, 놀라울 것도 없이 로베르트 메닝엔은 원래 저런 남자였다.

“어차피 할 일이라면 굳이 미룰 필요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네요.”

“저는 틀린 말은 안 하니까요.”

“뭐라는 거야. 어머, 죄송해요. 생각만 한다는 게.”

속마음을 내뱉어 버린 라모나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로베르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우아하게 잔을 들었다.

“응? 합시다, 약혼.”

의심스럽기 짝이 없게도 잔뜩 신난 얼굴이었다.

분명 원하던 상황이 맞았다. 하지만.

‘이상해. 저 남자가 좋아하니까…….’

꼭 내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튼 약혼하려던 건 맞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될 대로 되라지. 라모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잔을 들었다.

“그러죠, 뭐.”

“건배?”

“건배.”

챙.

기포가 뽀글뽀글 샘솟는 두 개의 와인 잔이 경쾌하게 부딪혔다.

꽤 만족스러워 보이는 로베르트에게 라모나가 물었다.

“각하, 정말 저랑 약혼하실 거예요?”

“물론입니다.”

“정말요?”

“예.”

그의 확답에 라모나는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저희 계약서부터 쓸까요?”

공작이 미쳤다고 나까지 미칠 순 없지. 바닷속 해초처럼 그에게 하염없이 휘둘리던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순식간에 떨떠름해진 로베르트의 얼굴을 보며 라모나는 보란 듯이 싱긋 웃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로베르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그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일단 축하주를 먼저 들도록 하죠, 레이디.”

“네? 술을 마시고 계약서를 쓰자는 말씀이세요?”

“오.”

그녀의 되물음에 로베르트는 알 만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분명 살살 약 올리려고 시동을 거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술이 많이 약하신 모양이군요. 이런, 제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뭐 그 정도쯤은 다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 이것 봐라?’

라모나는 꿈틀거리는 승부욕을 느꼈다.

이래 봬도 아이젠부르크는 어디서도 지지 않는 주량으로 유명한 가문이거늘. 뭐? 술이 많이 약하신 모양?

‘도발인가.’

화르륵.

라모나의 눈이 승부욕으로 타올랐다.

‘넘어가면 안 돼, 안 돼. 진정해 라모나.’

그녀는 간신히 제 안의 타오르는 분노를 잠재웠다.

그러나 잔을 빙 돌리고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겁나냐? 애송이?’라고 말하는 것 같이 눈썹을 까딱하는 로베르트를 본 순간.

‘저 능글맞은 자존감 과잉 변태가 진짜.’

공작이 미쳤다고 나까지 미칠 순 없다 했던 생각은 화르륵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로베르트는 살살 웃으며 그녀의 속을 한 번 더 긁어 놓았다.

“제게는 와인 몇 잔쯤 물이나 다름없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계약서 작성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열받게도 그는 친절한 얼굴로 아주 나긋하게 말했다.

“정 신경 쓰이신다면 레이디께서 드실 음료를 따로 준비해 오라 명하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라모나는 단호히 그의 배려를 거절했다. 그리고 싱긋 웃어 보였다.

“제게도 와인 몇 잔쯤은 음료나 다름없어서요.”

로베르트는 대답 대신 와인 잔을 살짝 들었다.

잔 아래로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 * *

와인 몇 잔쯤은 물이나 혹은 음료나 다름없다던 말은 괜한 객기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마신 것이 고작 몇 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도수가 낮은 스파클링 와인으로 시작했지만, 상대에게 자극을 받은 그들은 유치한 자존심에 점점 독한 술을 마셔 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집사 브리튼이 위스키라며 탄산수에 레몬을 조금 짜 가져다주었다.

잔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유리잔을 바라보며 라모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어머나 세상에, 요즘 위스키에는 탄산이 있나 봐요! 레이먼이 보면 좋아할 텐데, 걔는 술이 좀 약한 편이거든요. 아이젠부르크답지 않죠?”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로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브리튼은 한숨을 삼키며 주정뱅이들을 바라보았다.

라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아세요? 각하?”

술 취한 그가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솔직히 각하 정말 잘생기긴 했어요. 능력도 있고, 몸도 좋고…… 다 인정해요.”

“당연한 말씀을.”

그의 대답에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하! 제발. 그 입, 그 입 좀 제발.”

“하아?”

손깍지를 낀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내가 잘난 데에 무슨 문제라도?”

“아니…… 그거 사람들이 비웃는다고요. 푸흡.”

술기운이 오른 라모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소리에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사실 이러려고 술자리를 만든 건 아니었다.

분명 무언가를 꼭꼭 숨겨 두고 있는 듯해, 술에 취한 사이 그 속내를 좀 캐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즐거워하는 걸 보니 기분이 제법 유쾌했다.

또 그 느낌이었다.

허공에 살짝 붕 뜬 듯하면서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

‘술기운 탓이로군.’

그렇다고 하기에는 결이 조금 달랐지만, 로베르트는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정의했다.

“비웃는다는 말입니까, 저를?”

“네, 그렇다니까요.”

“흐음…….”

그가 팔짱을 끼며 턱을 괴었다.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그 아래 찍힌 눈물점이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윽고 그가 나른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감히 메닝엔 공작인 저를?”

그의 대답에 라모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와.”

한참 만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수는 좀, 아니 솔직히 많이 없었지만 따지고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오벤의 그 누가 감히 메닝엔 공작을 비웃는단 말인가.

그제야 그의 끝없는 자기애의 원천을 깨달은 라모나가 손뼉을 쳤다.

“멋지다, 권력. 진짜 최고다.”

나도 그런 권력 갖고 싶은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로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이제 곧 가지게 되지 않습니까.”

“……네?”

무슨 소리냐는 듯 라모나가 로베르트를 쳐다봤다.

그가 말했다.

“당신 또한 메닝엔이 될 테니까.”

라모나에게 집요하게 눈을 맞춘 로베르트의 검은 눈이 매혹적으로 휘었다.

“그럼 당신도 뭐든지 다 가질 수 있어, 원하는 것은 전부.”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아, 또.’

정말 모르겠다. 뭐가 정말 저 남자의 모습인지.

마치 발을 잘못 들이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을 앞에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한 번쯤 그 늪에 발을 담가 보고 싶은 것은.

라모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전부…….”

“그래, 전부.”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전부라…….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주 단순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는 세상. 요하네스도, 미카엘라도 방해하지 못하는 행복한 삶.

‘그래, 저 남자라면…….’

내게 그걸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라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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