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6화 (17/151)

#16화

<라모나.>

나른한 시선의 요하네스가 라모나의 턱을 붙잡았다.

<네가 대체 왜 그랬을까. 응?>

백금처럼 아름다운 금발, 아쿠아마린을 박아 놓은 듯한 푸른 눈동자.

천사 같은 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웃음의 정체를 알고 있는 라모나의 등에는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꿈이야, 이건 꿈일 거야.’

꿈이어야만 해.

입술을 깨문 라모나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턱을 더 세게,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뚫어지게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직도 입술을 깨무는 모양이구나, 상처가 남았어. 드레스 목덜미도 잡아 뜯은 자국이 있고…… 답답한 모양이지?>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겁에 질린 라모나는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놓아주세요.>

<오, 이런.>

그녀의 부탁에 요하네스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겁을 먹는 것이냐.>

이내 그가 라모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라모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저, 전하. 제가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부디 용서하세요.>

<아니야, 아니야. 라모나.>

그녀를 바라보는 요하네스의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모나, 너는 한 번도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 적이 없단다.>

<그, 그러면 왜…….>

왜 제게 이러시나요. 라모나는 차마 그 뒷말을 잇지 못했다.

요하네스가 즐겁다는 듯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그의 푸른 눈에 광기가 어렸다.

<그냥 내 눈에 띄었을 뿐이지.>

토할 것 같은 기분에 라모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를 실컷 겁먹게 하고서야 요하네스의 얼굴에 흡족함이 떠올랐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놓은 그는 손깍지를 끼며 고개를 삐딱하게 소파에 기댔다.

<지난번에 보내 준 목걸이는 마음에 들었느냐?>

<제게는 과분한 물건입니다.>

<마음에 들었느냐고 물었는데?>

<……예.>

요하네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모나.>

<예, 전하.>

<네가 그런 식으로 말 돌리는 게 나는 유쾌하지 않아.>

<그, 그런 것이 아니…….>

<네가 말대꾸하는 것도.>

순간 그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유쾌하지 않아.>

강압적인 그의 태도에 라모나는 입을 다물었다. 흐음, 요하네스는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마음에 들었느냐?>

<예, 아름다운 목걸이입니다.>

<그럼 한번 말해 보아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라모나가 불길한 예감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사랑한다고.>

그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너는 왜 내게 한 번도 그 말을 하지 않지?>

정말이지 천사 같은 웃음이었다.

라모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꿈이야, 이건 분명 꿈일 거야.’

그래야만 해. 그녀는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로 시간을 되돌아갈 수 있을까? 이게 정말 꿈이 맞을까?

그 생각이 들자 라모나의 눈이 덜컥, 하고 흔들렸다.

그 순간, 무언가 시리도록 차가운 것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놀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짝!

짝?

‘웬 짝?’

라모나가 황급히 눈을 비볐다.

뿌옇게 흐린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그리고 곧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꺅!”

어린 시절 가정 교사를 꼭 닮은 그 여자, 시녀장 댄버스 부인이었다.

‘아…….’

망했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망했다.

라모나는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스멀스멀 피어오른 푸른빛이 라모나의 손목에서 반짝거렸다.

* * *

“오, 메닝엔 공작 각하.”

로베르트를 발견한 바텐베르크 후작이 반갑다는 듯 다가왔다.

‘저 늙은이 또 시작이군.’

로베르트는 생각을 감추며 빙긋 웃어 보였다.

바텐베르크 후작가는 좋게 말하자면 중도, 나쁘게 말하자면 철새라 불리는 가문이었다.

덕분에 메닝엔과 벤트하임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에, 당시 황제는 바텐베르크를 제법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난 바텐베르크는 더 큰 것을 노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제국의 가장 고귀한 여인, 황후의 자리였다.

후작은 황후에게 요하네스를 향한 지지를 약속하며 딸 멜리사를 황태자비 후보에 밀어 넣었다.

그로서는 회심의 한 수였으나, 미카엘라와 요하네스의 약혼이 확실해지며 강가에 버려진 오리 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거기서 그만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다음으로 메닝엔 공작가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로베르트는 그런 후작의 욕심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의 인생에 끼어든 여자,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로 인해 그 계획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렸다.

‘굳이 이자에게 헛된 바람을 더 불어 넣을 필요는 없지.’

팔짱을 낀 로베르트가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후작. 그럼 나는 이만.”

“각하, 제가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말입니다.”

로베르트가 자리를 뜨려 하자 후작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 항간에 각하께서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와…….”

로베르트가 얼른 그의 말을 끊었다.

“아하, 어젯밤 내가 사랑하는 피앙세, 나의 천사 라모나와 약혼을 올렸다는 소식을 말하는 것인 모양이로군.”

숨도 쉬지 않고 그가 다다다 말을 이어나갔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와 함께하게 되어 행복하다네. 물론 자네의 축하 인사는 감사히 받겠네. 그럼 이만.”

약혼이라는 말에 후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약혼이라니요?”

그런 소문까지는 듣지 못했는데?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후작을 뒤로 하고 로베르트는 마차에 올랐다.

‘그 여자가 이런 쓸모도 있었군.’

당분간 그를 노리고 달려드는 날파리들을 효과적으로 쳐 낼 수 있을 듯했다.

‘아주 좋아.’

소식을 듣고 기함할 아이젠부르크 자작을 떠올리자 로베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물론 약혼식 이야기는 그냥 되는대로 지어낸 말이었다.

‘뭐, 약혼쯤이야 정말 하면 되지. 그녀가 제 쓸모를 증명한다면.’

결혼도 아닌데 뭐 어떻겠는가. 지난번 일을 보니 황태자 그 개자식이 그녀를 노리는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요하네스가 라모나를 원한다 생각하니 갑자기 불쾌감이 몰려왔다.

‘개자식.’

그런 더러운 수를 다 쓰다니, 누가 황후가 낳은 자식 아니랄까 봐. 로베르트가 혀를 찼다.

‘차라리 그 여자가 메닝엔의 사람이라고 빨리 도장을 찍어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아닌가? 고민하던 그는 이내 눈을 감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차피 머리 아파지는 것은 내가 아니라 라모나 아이젠부르크니까.”

눈을 감은 그의 손목에서 또다시 푸른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 * *

“레이디 아이젠부르크는?”

“몸이 안 좋으셔서 식사는 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귀가한 로베르트의 질문에 시녀장 댄버스 부인이 대답했다. 어쩐지 그녀의 한쪽 뺨이 붉게 부어 있었다.

뭐지. 로베르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몸이?”

“예, 좀 무리한 모양이라 하셨습니다.”

진짜 아픈 건 아닌 모양이군. 댄버스 부인의 뺨도 그렇고,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럼 저녁 식사는 집무실로 가져오도록.”

“예, 각하.”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뜨려는 댄버스 부인을 로베르트가 잡아 세웠다.

“그런데 자네, 뺨은 왜 그러지.”

댄버스 부인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넘어졌습니다.”

“……뺨으로?”

“예.”

“……자네가 할 짓이 없어서 뺨으로 넘어졌다고?”

“예, 할 짓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뺨으로 넘어진 것은 맞습니다.”

당당한 그녀의 대답에 로베르트는 혀를 찼다.

“뺨으로 넘어지다니. 내 살다 살다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 보는군.”

“저도 처음 겪는 일입니다, 각하.”

“알겠어, 나가 봐.”

댄버스 부인이 자초지종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로베르트는 손을 휘저어 그녀를 내보냈다.

사실 범인은 뻔했다.

겁도 없이 시녀장의 뺨에 손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보나 마나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작품이겠지.’

그러니 행여나 문제가 될까 싶어 댄버스 부인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리라.

‘사용인들에게 함부로 손찌검하는 타입이었나?’

의외인데. 고개를 갸웃한 로베르트가 아까 보던 서류를 마저 집어 들었다.

‘향신료 및 차는 일반 식자재가 아닌 사치품으로 취급한다. 다만 상업의 활성화를 위해 3년간은…….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뺨을 때려? 기 싸움인가?’

오, 드디어 내 저택에도 여인들의 살벌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는 건가.

오래간만에 생긴 재밌는 일에 감탄하던 로베르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순간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재밌는 일?’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더라?

“기분 탓인 모양이지.”

미간을 찌푸린 그가 이내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녀장의 뺨을 후려치다니 보기보다 제법인데?’

그러나 또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일을 떠올린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쯧. 도저히 집중이 안 되는군.”

솔직히 궁금했다. 아주 많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시녀장의 뺨을 후려친 것일까.

이 상태로 계속 업무를 보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결국, 로베르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나는 레이디의 곤경을 외면하지 않는 신사이니.”

겸사겸사 도장도 좀 찍고. 제멋대로 명쾌한 결론을 내린 그가 천장에 달린 종을 흔들었다.

딸랑.

“브리튼, 댄버스 부인에게 식사는 레이디 아이젠부르크의 방으로 가져오라 전해.”

그가 덧붙였다.

“아, 그리고 와인 창고에서 와인을 좀 꺼내 와. 달콤한 스파클링이 좋겠군.”

속마음을 끄집어내기에는 역시 술만 한 게 없지. 로베르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그 시각, 라모나는 침대 위에 홀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꿈 때문일까, 자꾸 요하네스와의 일이 떠올랐다.

부모를 두고 협박했던 일,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그녀를 감시했던 일, 그리고 남동생 레이먼이 실종되었던 일까지.

수많은 일이 아직도 끔찍하리만큼 생생했다.

‘……토할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은 라모나의 귓가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시녀장인가?’

라모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들어와.”

그러나 되돌아온 목소리의 주인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접니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에 라모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메닝엔 공작?’

문밖에서 그가 다시 물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혹시 제가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라모나는 잠시 망설였다.

‘시녀장의 일 때문이구나.’

지금은 별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 일은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했다. 오해의 여지가 다분했으니까.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각하, 그 일은 제 실수…….”

그러나 그녀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 로베르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침실로 들어섰다.

그의 뒤를 따라 음식을 실은 카트가 줄지어 들어왔다.

‘뭐지?’

라모나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읽은 로베르트가 매끄럽게 웃었다.

“저희 약혼을 제대로 기념하지 못한 듯해서 말입니다. 아쉬운 대로 와인이라도 한잔하기 위해 들고 왔습니다.”

‘내가…… 약혼을 했다고?’

이 자식이 또 무슨 일을 벌인 거야. 하여간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