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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5화 (16/151)

#15화

* * *

그래도 이곳이 메닝엔 공작저라는 자각은 있었는지, 미카엘라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기 직전, 그녀는 라모나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라모나, 내가 다 너 걱정해서 그러는 거 알지?”

끝까지 착한 얼굴로 개소리를 늘어놓는 미카엘라를 바라보며 라모나가 억지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응, 알지. 걱정하지 마.”

“네가 좀 예민한 구석이 있으니까 오해라도 했을까 봐……. 아, 맞다. 나 드레스를 맞춰야 하는데 같이 좀 봐 줘.”

이 와중에 드레스 이야기라니. 라모나는 구겨지는 미간을 간신히 펴며 대답했다.

“그래.”

로베르트는 라모나의 곁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한 미카엘라의 눈에 의심이 떠오를 때쯤, 로베르트는 다정하게 라모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라모나의 옆구리가 당겨지며 그에게 찰싹 붙은 모습이 되었다. 갑자기 훅 들어온 접촉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로베르트는 목을 살짝 나른하게 젖히고는 말했다.

“나의 천사.”

그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사람 하나는 순식간에 홀릴 만한 눈웃음이었다.

하지만 라모나에게는 달랐다.

천사. 천사. 나의 천사.

‘그놈의 천사 타령, 진짜!’

라모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꾹꾹 눌러 삼킨 채 미카엘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벤트하임 공작가의 마차가 사라지기 무섭게 그녀는 홱, 로베르트를 돌아보았다.

찌릿.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이 제법 살벌했다.

“각하, 정말…… 제정신이세요?”

매끄러운 미소를 지은 로베르트가 작게 속삭였다.

“요하네스의 사람이 붙었다면서 아무 데서나 그리 말해도 되겠습니까.”

후, 겨우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빙긋 웃으며 보란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세상에, 로베르트. 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죽여 버려도 좋을 것 같아요.”

로베르트가 소곤거렸다.

“레이디, 틀렸습니다. 이럴 땐 ‘죽여 버려도’가 아니라 ‘죽어 버려도’가 맞습니다.”

“아니에요, 이쪽이 맞답니다. 실은 각하를 당장 죽여 버려도 좋을 것 같다는 뜻이거든요.”

뭐? 나를? 로베르트가 황당하다는 듯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미쳤습니까?”

“아니요?”

눈을 동그랗게 뜬 라모나가 대답했다.

“지극히 정상인걸요.”

커흐흠, 집사 브리튼이 크게 헛기침하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라모나는 보란 듯이 로베르트에게 웃어 주었다. 그가 그랬듯이 아주 활짝, 예쁘게.

순간 그가 잠시 멈칫했지만, 다른 생각에 빠진 라모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뭐, 이제 저 또라이도 내 말을 믿기 시작했겠지.’

미카엘라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다. 요하네스가 라모나를 정부로 들이려 한다고.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아버지를 설득하고, 로베르트를 이해시키고.

‘미카엘라, 살다 보니 네가 도움이 되는 날도 다 오는구나.’

라모나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힐끔 그런 그녀를 살핀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다 누구 뺨이라도 때리겠습니다.”

“네?”

“표정이 퍽 살벌해서.”

“……그냥 웃은 건데요.”

“아, 실례.”

로베르트가 또다시 슬슬 라모나의 속을 긁기 시작했다.

‘후우. 라모나, 참자. 네가 한 번만 참아 주자. 저건 그냥 주둥…… 응?’

소맷자락에 푸르스름한 실밥을 발견한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뭐지? 오늘은 드레스가 파랗지도 않은데?’

눈을 가느다랗게 뜬 그녀가 소매를 살폈다. 그러나 다시 보니 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봤나 보네.’

요즘따라 자꾸 왜 이러지?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 * *

아이젠부르크 자작과의 대화는 수월했다. 그가 미카엘라의 말에서 대충 상황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메닝엔 공작가에서도 차 사업을 벌이려던 참이었으니 잘되었군. 그 부분을 아이젠부르크에서 맡아 주게. 벤트하임과의 위약금은 이쪽에서 부담하도록 하지.”

“그리해 주신다면 감사합니다만…….”

자작이 무어라 더 이야기하려 하는 것을 로베르트가 막았다.

“세부 조율은 나중에. 아무래도 아직은 나 또한 아이젠부르크를 그리 신뢰할 수는 없으니.”

이해되는 일이었다.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이라 하심은 언제를 말씀하시는지요.”

“그건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내게 했던 말의 진위에 따라 갈릴 듯하군.”

딸이 그새 무언가 일을 벌여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작이 한숨을 삼켰다.

라모나는 어려서부터 유독 영특했다. 야무지기는 또 얼마나 야무진지 남동생 레이먼이 제 누나 말이라면 꼼짝을 못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딸아이가 가문을 위해 미카엘라 아래 바짝 엎드려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부라니…….’

자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체 벤트하임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압박을 넣고 있었던 것인가.

‘오죽하면 아비에게 한 마디 언질도 없이 메닝엔 공작을 다 찾아왔을까.’

약혼자도 제쳐 두고 하필 저 능구렁이 같은 남자를. 자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랜 시간 벤트하임에게 충성했건만, 그들은 아이젠부르크의 충성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감히 가문의 사업을 빌미로…… 그런 더러운 수를 쓰다니.’

대가는 똑똑히 치르게 해 주마. 분노한 자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얼굴에 느슨한 미소가 떠올랐다.

‘재밌네.’

아직까지 라모나 아이젠부르크의 주장을 전부 다 믿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이번 일로 자작이 벤트하임에게 마음을 돌렸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를 죽여 버리고 싶다 했던가.’

살벌하기도 하지. 로베르트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이제 미카엘라의 사냥개라는 호칭은 그만둬야겠다.

‘뭐가 좋으려나, 아이젠부르크의 망나니?’

망나니, 그거 딱 어울리는군. 로베르트의 얼굴에 흡족함이 어렸다.

아이젠부르크 자작은 조심스레 물었다.

“각하.”

“응?”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말해 보게.”

“……각하께서는 정말 라모나와 혼인할 생각이신 겁니까?”

아이젠부르크 자작의 눈빛에 감출 수 없는 불신이 떠올랐다.

그 사실이 묘하게 로베르트를 자극했다.

아무리 부모 눈에 제 자식이 제일 잘나 보인다지만, 자신에게서 딸을 지키기 위해 가시를 세운 자작을 보니 뭐랄까,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지 않은가. 이 제국에 자신만 한 신랑감이 대체 어디 있다고?

감사 인사로 매일 아침 공작저를 세 바퀴씩 돌아도 모자랄 판국에?

‘무슨 내가 그 여자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여자는 이쪽에서도 사양이었다.

‘연기도 못해, 얼굴도…….’

아, 그건 예외. 얼굴은 제법 취향이긴 하지. 로베르트는 너그럽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르브르트.’

어떻게든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싫어서 안간힘을 쓰던 그 모습이란.

‘그렇게 구니까 더 놀리고 싶잖아.’

“풉.”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당황한 아이젠부르크 자작이 그를 불렀다.

“각하?”

“아아, 그건 말이지…….”

“역시 눈속임이시군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작은 대놓고 안도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욱한 로베르트가 괜히 싱긋 웃으며 자작의 불안함을 부추겼다.

“뭐, 그건…… 앞으로 일에 달린 법이지.”

“……예?”

로베르트는 대답 대신 나른하고 아찔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뭇 여인들의 가슴을 뒤흔든 바로 그 웃음이었다.

안타깝게도 자작의 가슴에는 불신만 더 차오를 뿐이었지만.

로베르트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나를 죽여 버리고 싶다던데. 어찌 될지 모르겠군.”

내게 그렇게 대한 여자는 처음인지라.

알 수 없는 이야기에 혼란에 빠진 자작을 두고, 로베르트는 자리를 떴다.

* * *

아침의 일로 진이 쭉 빠진 라모나는 오늘도 일찌감치 침대에 드러누웠다.

원래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로베르트와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바빴다.

‘내일쯤에야 시간을 낼 수 있을 듯한데, 당장 급한 사안이 아니라면 그때 이야기하시죠.’

그는 그 한마디를 남긴 채 외출했고,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그 메닝엔 공작이니 바쁠 수밖에 없겠지.’

제국의 두 기둥 중 하나. 메닝엔의 주인. 라모나는 새삼 그의 존재감을 실감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이번에도 그가 죽으면 메닝엔이 어떻게 될지.

회귀 전, 지금으로부터 1년쯤 뒤, 그러니까 제국력으로 따지자면 848년 3월.

영지를 시찰하고 돌아오던 메닝엔 공작은 산사태에 매몰되어 사망한다.

라모나는 그걸 알고도 로베르트의 손을 잡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서’ 손을 잡았다.

로베르트 메닝엔이 설령 나쁜 마음을 품고 무슨 일을 꾸민다 한들, 그는 곧 죽을 테니까.

순간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나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아무리 입이 재수 없다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을 자신의 수로 이용했다니.

로베르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죄책감이 콕콕 그녀의 심장을 쑤셨다.

라모나가 황급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일이나 제대로 할 것이지, 왜 헛소리나 하고 다니는 거야.”

능력도 있고, 재력도 있고, 제법 괜찮은 얼굴에 몸까지 좋은데.

‘역시 하루에 세 마디만 하게 해야 해.’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만 빼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인데.”

아마도? 아마도 괜찮은 사람인데?

‘잠깐. 근데 그걸 뺄 수 있나?’

멀쩡한 말을 하는 로베르트 메닝엔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사실 그의 본체는 바로 그 주둥이가 아닐까?

타당한 추론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이불을 끌어 올린 그녀가 눈을 감았다.

“어휴, 잠이나 자자.”

스르르 몰려오는 잠기운을 느끼며 라모나는 생각했다.

‘만약에…… 만약에 정말 내가 정해진 미래를 바꾸고 있다면…….’

이번에는 로베르트 메닝엔이 죽지 않을 수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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