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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4화 (15/151)

#14화

미카엘라는 모욕감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감히…….’

너 따위가 지금 누구를? 그녀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나를 협박하셨어.”

“……뭐?”

아드득, 미카엘라가 이를 악물었다.

“너를 꼭 정부로 들이고 싶으시대. 그러지 않으면 나를 황태자비 자리에 앉히지 않으시겠대.”

“미카엘라!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히 그리 말씀하셨어, 그것도 두 번이나.”

빌어먹을, 미카엘라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라모나의 묘한 시선이 차갑게 굳은 그녀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이내 미카엘라는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속삭였다.

“라모나, 제국의 가장 귀한 레이디인 나도 이런 취급을 받아. 나조차도 이런 취급을 받는다고. 그런데 네가 메닝엔 공작가로 시집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니?”

“…….”

“정말 그가 너를 평생 사랑해 줄 거라고 생각해? 가진 것 하나 없는 너를?”

“미카엘라, 나는…….”

“분명 찰나의 변덕일 거야,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잖아.”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라는 말에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라모나가 설득당했다 착각한 미카엘라는 다시 상냥한 얼굴을 하고서는 라모나의 손을 꼭 붙잡았다.

“라모나, 정말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내 맘 알잖아. 페브룩 영식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응? 네 약혼자잖아.”

“그건 공작 각하께서…….”

“세상에! 그래도 네가 직접 이야기해야 하지 않아? 그게 예의지!”

예의라는 말에 라모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됐다, 다 넘어왔네. 미카엘라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라모나. 너 따위는 평생 내 심부름꾼이나 하고 살아야지. 어딜 감히 공작 부인 자리를 넘봐?

‘고작 아이젠부르크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미카엘라는 음습한 생각과는 달리 슬픔에 잠긴 척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때, 우물쭈물하던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미카엘라, 황태자 전하가 나를 정부로 들이고 싶어 하신다면…….”

라모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카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라모나!”

찰싹.

그녀가 라모나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어쩐지 감정이 실린 듯 매서운 손길이었다.

그러나 미카엘라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정말 황태자 전하의 정부로 만들 리 없잖아. 안 그래?”

시커먼 속내를 숨긴 웃음이었다.

“넌 내 둘도 없는 친구인걸.”

또 다시 친구를 운운하는 미카엘라의 모습에 라모나의 표정은 알 수 없이 가라앉았다.

그 순간.

벌컥.

누군가 갑자기 방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 * *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로베르트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이 아무리 다혈질이라 한들, 적진이나 다름없는 메닝엔 공작가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다니.

‘이거 벤트하임의 미래가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것 아닌가?’

멍청하기는. 그가 새어 나오려는 비웃음을 겨우 삼켰다.

그의 옆에는 아이젠부르크 자작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정부라는 이야기에 큰 충격에 빠진 모양이었다.

저런, 그럴 만도 하지. 매끄러운 미소를 지은 로베르트가 속삭였다.

“이런 연유로,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메닝엔 공작저에 들어왔지. 참,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는 대단하시지 않나? 약혼의 대가로 약혼녀의 친구를 정부로 들이려 하다니.”

그가 아이젠부르크 자작을 바라보았다.

“어때, 이제야 좀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가?”

자작은 말없이 이를 갈았다.

갑자기 무역선이 뜰 수 없다 할 때부터 뭔가 일이 있겠거니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이런 이유였을 줄이야.

분노와 모멸감으로 자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술만 짓이기던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메닝엔 공작 각하.”

그제야 로베르트의 얼굴에 만족스러워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좋군, 그럼 이야기는 이따 마저 하도록 하지. 내가 지금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말일세.”

피식 웃은 그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예?”

역할이라니? 당황한 자작이 되물었다.

“딱 보면 모르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로베르트는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이야말로 사랑의 구원자가 등장할 타이밍이다, 이 말일세.”

그의 얼굴에 거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정정하지. 잘생긴 사랑의 구원자로 말이야.”

* * *

“내가 너를 정말 황태자 전하의 정부로 만들 리 없잖아. 안 그래? 넌 내 둘도 없는 친구인걸.”

미카엘라의 말에 라모나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거짓말.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회귀 전, 미카엘라는 엉엉 울며 라모나에게 매달렸다.

<날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 마. 너까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우리 어머니가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 알면서 어떻게 너까지 이래.>

그때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린 친구잖아.>

친구, 친구라.

미카엘라, 우리가 정말 친구였던 적이 있긴 한 거니. 참담한 기분에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벌컥.

누군가 갑자기 방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꺅!”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깜짝 놀란 미카엘라가 기겁하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오, 미안합니다.”

불청객은 유감이라는 듯 미카엘라를 내려다보았다. 별말 없이도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미카엘라도 그것을 느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메닝엔 공작 각하?”

“예, 제가 바로 그 메닝엔 공작입니다만.”

로베르트가 얄밉게 싱긋 웃어 보이며 덧붙였다.

“설마 제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하시는 겁니까? 벤트하임의 미래가 조금 걱정스럽군요.”

욱한 미카엘라가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레이디의 거처에 기척도 없이 들이닥치다니, 무례 아닌가요?”

“이런, 레이디 벤트하임께서 그런 말을 하실 줄이야.”

로베르트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닝엔 공작저에 오셔서 저택의 주인인 제게는 얼굴도 안 보이고 저의 천사, 사랑스러운 라모나부터 먼저 찾으셨다기에…….”

유독 ‘사랑스러운’에 힘을 준 로베르트가 씨익 웃으며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한쪽만 치켜올린 눈썹이 오늘따라 유독 재수 없었다.

그는 곧 시선을 돌려 말끝을 흐리며 위아래로 미카엘라를 훑어보았다.

“예의범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분이신 줄로 알았습니다만.”

라모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뭐? 천사? 사랑스러워? 그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늘도 아침에 뭐 잘못 먹었나?’

물론 그에게 협조를 부탁해 두긴 했다만, 어디까지나 상식선의 부탁이었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대사를 사방에 날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미쳤나 봐.’

세저또.

세상에, 저 또라이가 또.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곤란했다. 이대로라면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수치심으로 먼저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설마 아버지께도 저딴 식으로 말한 건 아니겠지?’

설마, 에이 설마. 아니겠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었다.

한편, 미카엘라는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예의범절도 모른다고 욕한 거야?’

워낙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말해서 얼핏 흘려듣기 쉬웠지만, 잘 뜯어 들어 보면 적나라한 비난이었다.

‘게다가, 뭐? 저의 사랑스러운 라모나?’

이건 또 대체, 무슨 강아지가 야옹거리며 공작저 앞마당을 뛰어다니는 소리란 말인가.

미카엘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미카엘라의 미심쩍어하는 시선을 눈치챈 라모나는 눈을 질끈 감고 로베르트에게 다가갔다.

수치심에 손이 다 바들바들 떨렸다.

‘침착해, 라모나. 해야 해. 너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아니, 젠장. 내가 정말 이런 짓을 할 수 있나? 이러다 손이 돌돌 말려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에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내 사…… 랑, 로베르트. 제 절친한 친구에게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녀는 결국 해내고야 말았다.

‘신이시여.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최대한 상냥한 말투와 다정한 눈빛. 라모나가 로베르트의 단단한 팔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그녀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오, 라모나. 나의 천사, 나의 사랑. 그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오.”

안타깝게도 메닝엔 공작에게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라모나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희극의 한 장면을 연기하듯 가슴에 손을 올린 로베르트가 유난히 예쁘게 웃었다.

의도가 뻔했다. 분명 라모나를 놀리기 위함이었다.

‘분하다.’

원통하고 원통해. 라모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내 한껏 눈썹을 내린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미카엘라에게 말했다.

“레이디 벤트하임, 라모나가 마음 아파하니 사과하겠소. 물론 그쪽이 예의가 없기는 했지만, 나의 천사를 조금이라도 더 일찍 보고 싶은 마음에 내가 실수를 했군.”

되지도 않는 사과였지만, 잘생긴 얼굴로 말하니 어쩐지 그럴듯해 보였다.

덕분에 미카엘라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떠올랐다.

로베르트는 그녀를 향해 미간을 찌푸린 채 눈썹을 까딱했다.

‘사과 안 받고 뭐 하니.’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분위기에 휘말린 미카엘라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도 무례를 저질렀네요.”

로베르트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휙, 미카엘라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또 뭘 하려고.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라모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가만둘 로베르트가 아니었다.

“라모나, 내 사랑. 나를 보시오.”

제발, 각하. 좀 제발!

라모나는 차라리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공작 각하.”

“이런, 그대의 꾀꼬리처럼 고운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시오. 나의 천사.”

재앙의 주둥이. 저 돼먹지 못한 놈. 아침부터 뭘 잘못 주워 먹은 공작가의 미친 자.

그를 향해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은 라모나가 아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르브르트.”

그제야 로베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훅 다가온 그의 스킨십에 놀란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모나의 머리를 감싸 안은 그가 그녀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표정 좀 어떻게 해 보시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슨 원수를 보는 것 같은데.”

라모나도 지지 않고 속삭였다.

“그러는 공작님이야말로 제발 적당히 좀 하세요.”

“아니, 이 정도는 해 줘야 한다니까?”

그의 말에 라모나가 한숨을 삼켰다.

푹, 그의 탄탄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썩어 가는 표정을 감춘 채 라모나가 생각했다.

‘죽여 버리고 싶다, 진짜.’

진짜. 정말로. 만약 하늘이 한 번 더 내게 기회를 주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 남자부터 죽여야지. 어차피 당할 사형이라면 그냥 빨리 당하고 말겠어.

한숨을 삼킨 그녀는 결심했다.

‘총, 그래 총을 좀 연습해 두자.’

찻잔 수집 말고 새로운 취미 활동을 좀 찾아보기로.

다행히 라모나의 살벌한 속마음과는 달리, 한발 떨어져서 보기에 그들은 퍽 달콤한 사이로 보였다.

연인들이 주변도 잊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한 모습.

생각보다 진한 그들의 애정 행각에 당황한 미카엘라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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