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 *
공작저의 응접실.
“오래 기다리셨겠군요.”
매끄러운 미소를 입가에 띤 로베르트가 응접실에 들어섰다.
“설마 이 시간부터 손님이 방문하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얄밉게 한마디를 덧붙인 그가 자리에 앉았다.
이미 그가 익숙했던 아이젠부르크 자작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상찮은 그의 존대에 경계를 곤두세울 뿐이었다.
로베르트는 자리에 앉자마자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한데 어쩐 일로 저를 다 찾아오셨습니까. 저희가 이리 친밀한 사이인 줄 이제야 알았군요.”
천연덕스러운 인사에 자작이 로베르트를 노려봤다.
“긴말 않겠습니다, 제 부족한 여식이 공작가에 폐를 끼치고 있는 듯한데……. 죄송합니다, 집에서 제대로 교육하겠으니 돌려보내 주시죠.”
죄송하다는 말과 달리 그의 기세가 퍽 살벌했다.
로베르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부족하다니! 설마 저의 천사 라모나를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뭐, 천사? 자작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제 연인, 저의 영혼의 사랑 라모나 말입니다.”
로베르트는 입술에 침 한 번 바르지 않고 능청스레 말했다. 마치 대체 내 발언의 어디가 문제냐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아이젠부르크 자작은 황당함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곧 그의 얼굴이 분노로 화르륵 달아올랐다.
“지금 저를 기만하시는 겁니까?”
“기만이라니. 제가 어찌 제 사랑, 저의 천사 라모나를 걸고 자작을 기만한단 말입니까.”
가슴에 손을 얹은 로베르트가 꼭 상처받은 사슴처럼 가련하게 눈을 파르르 떨었다.
기가 찬 자작이 헛웃음을 쳤다.
“허, 공작 각하께서 이리도 사랑꾼이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만.”
“저런, 이제라도 알게 되셨으니 다행이군요.”
로베르트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한술 더 떠,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물론 저의 천사의 부친 되시는 자작을 한 번쯤 뵈러 가야 했긴 합니다만……. 아, 물론 이리 이른 시간은 아닐 때 말입니다. 하하.”
이상한 도발이었다. 살살 약 올리는 말에 자작이 주먹을 꽉 쥐었다.
“라모나와 접점 한번 없던 공작 각하께서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자작은 왜 말이 안 된다고만 생각합니까.”
“지금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말장난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한눈에 반한 걸 어떡합니까.”
“…….”
“그래, 이유라……. 뭐, 굳이 설명해 보자면 나의 천사가 너무 아름다워서?”
경악할 만한 그의 언행에 자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로베르트가 그런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뭐, 이런 답을 원한 건가?”
자작은 결국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버럭 외쳤다.
“왜 제 여식을 공작저에 들이셨냐는 말입니다!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자작의 외침에 로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말로 이해할 수 없군, 내가 반했다는데 왜 말이 안 된다고 하지? 사랑에 이유가 있나?”
“대체! 사람이 말을 하면!”
“그거 참, 자작은 계산적인 사람이었군.”
“각하!”
뜬구름 잡는 사랑 타령에 분노한 자작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자작을 보며, 로베르트의 그제야 평소와 같은 오만한 얼굴이 되었다.
“자작.”
“…….”
“대체 뭐가 그리 화가 나나?”
그가 여유롭게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가, 이 메닝엔 공작이 도무지 자작의 말을 들어 처먹지를 않아서? 응?”
비꼬는 말이 제법 쌀쌀했다.
“정말 자작은 모르는 모양이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로베르트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자작은 그제야 그가 자신을 떠보기 위해 되지도 않는 말싸움을 벌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이래서 메닝엔 공작을 마주칠 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데, 잘 알면서도 딸아이의 일이라 쉽게 휘말리고 말았다.
감정의 동요로 자작의 눈이 흔들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내 화를 돋운단 말인가. 무엇을 알아내기 위해?’
아이젠부르크 자작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목적을 달성한 로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게, 자작.”
자작은 대답 대신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봤다.
로베르트 메닝엔, 무표정한 메닝엔 공작이 다시 한번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찾던 이유를 직접 보여 줄 테니, 따라오게.”
* * *
메닝엔 공작저의 손님방, 라모나를 발견하자마자 미카엘라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세상에, 라모나! 이게 무슨 일이야.”
그녀는 바짝 힘을 준 속눈썹을 사랑스럽게 깜빡이며 물었다.
“혹시 메닝엔 공작이 네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지?”
“미카엘라! 각하는 그런 세상에 둘도 없는 변태, 태워 버려야 할 쓰레기 같은 파렴치한 놈이 아니셔!”
라모나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어쩐지 욕이 좀 과한 것 같긴 하지만 미카엘라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다행이네.’
만약 라모나가 로베르트 메닝엔과 밤이라도 보냈다면, 요하네스가 얼마나 길길이 날뛸지 상상이 간 탓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젠장, 황태자 전하는 왜 이딴 거지 같은 계집애한테 꽂혀서.’
짜증 나. 한숨 돌린 그녀는 짐짓 화난 얼굴로 말했다.
“라모나, 내가 말했잖아. 메닝엔 공작을 멀리하라고.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그게…….”
“내 조언을 다 무시한 거야?”
“아니, 조금…… 사연이 있었어.”
라모나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사연?’
힐끔, 미카엘라는 문 쪽을 살폈다. 아무래도 적진이나 다름없는 메닝엔 공작저였기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웠다.
그녀는 한숨을 삼키며 나긋하게 라모나를 회유했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아냐, 그런 건 아니고…….”
“네 부모님도 걱정이 크셔. 라모나,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라모나는 대답 대신 쭈뼛거리며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이내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사실 메닝엔 공작 각하와 서로 사, 사, 사랑하는 사이야.”
어쩐지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라모나의 표정이 비장했다.
“뭐? 사랑?”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미카엘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
헛웃음을 한 번 친 그녀가 말했다.
“너…… 메닝엔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잖아. 제정신이야?”
“미카엘라,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그 또라, 아니 그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걸.”
“하, 사랑? 라모나 네가?”
욱한 미카엘라가 막말을 내뱉었다.
“네가 그딴 감정놀음에 휘둘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녀가 손가락으로 라모나의 이마를 쿡 찔렀다.
“잘 들어, 라모나.”
미카엘라가 이를 악물었다.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지금 바텐베르크가 또 황태자 전하에게 기웃거려! 이러다 정말 황태자 전하가 바텐베르크의 손이라도 잡아 주시면 어떡하려고 그래, 응?”
기껏 걱정하는 척을 했지만 결국 또 미카엘라를 위해 빨리 일하라는 말이었다.
이제 남은 기대도 없었지만 가슴이 쓰라렸다.
미카엘라에게 자신은 고작 이 정도의 사람일 뿐이었는데, 그걸 왜 몰랐던 걸까.
지난 생의 기억에 라모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라모나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미카엘라는 눈치채지 못했다.
“너는 아이젠부르크야. 나는 벤트하임이고. 그러니 네가 할 일이 뭐겠어?”
“…….”
“아이젠부르크답게 벤트하임을 위해서 일해야 할 거 아냐! 시답지 않은 사랑 흉내나 낼 게 아니라!”
적나라한 진심이었다. 미카엘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쯧,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정말.”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이내 라모나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미카엘라?”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미카엘라는 황급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 흠.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마.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래. 이해해 줄 거지? 응?”
그녀는 라모나를 달래듯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모나,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왜 아침부터 메닝엔 공작저를 찾아왔겠어.”
그러고서는 덧붙였다.
“우리 친구잖아, 그렇지?”
라모나가 아무 대답이 없자 미카엘라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너 설마 애도 아니고 고작 이 정도로 삐진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냐.”
“나는 널 걱정해 주는 거야. 네가 메닝엔 공작에게 속아 넘어간 것 같아서.”
“속아 넘어가다니?”
“사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메닝엔 공작가와 아이젠부르크 자작가는 혼인을 맺기에는 균형이 안 맞잖아.”
“…….”
“응? 넌 똑똑하니까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지?”
라모나는 잠자코 바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카엘라.”
그리고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어머니도 사랑으로 결혼하셨잖아.”
순간 미카엘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벤트하임 공작 부인의 신분 상승, 그건 그녀의 가장 치명적인 역린이었다.
“그럼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라모나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꼭 제 잘난 맛에 사는 누구 같은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