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Chapter 2. 사랑의 구원자, 로베르트 메닝엔
전날부터 이어진 소동에 가장 놀란 것은 다름 아닌 공작저의 사용인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이성에 관심 없던 공작 각하께서 여자를 데려오시다니! 그것도 정적이라 할 만한 가문의 레이디라니!
눈이 휘둥그레진 하녀들이 소곤소곤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난 각하께서 정말 3황자 전하와 그런 사이이신 줄 알았어. 워낙 여자를 안 만나셨잖아.”
“사실 나도 그래.”
“걱정했는데, 막상 아니라고 하니 뭔가 아쉽기도 하고…….”
“얘는? 네가 아쉬울 게 뭐야? 너 진짜 웃긴다.”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하녀들은 마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아이젠부르크 자작가면…… 완전 벤트하임 쪽 맞지?”
“응, 레이디께서도 진짜 대단하시지 않아? 사랑을 위해서 가문도 버리고 공작님을 택하신 건데.”
“맞아, 완전 로미오와 줄리엣 같아.”
“대박, 로맨틱 그 자체네.”
꺄아아악,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비명을 지른 그녀들이 서로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그 시각, 자신도 모르는 새 사랑을 위해 가문도 저버린 비운의 여주인공이 된 라모나가 눈을 떴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창밖은 어둑하기만 했다.
‘으으음, 지금이 몇 시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안았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서 그런 지 일찍 깨 버렸다.
‘내가 메닝엔 공작저에서 지내게 될 줄이야.’
사실 과거의 일도 지금 이 상황도 그냥 꿈은 아닐까.
아직은 영 어색한 천장을 바라보며 잠이 덜 깬 그녀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귀는 왜 이렇게 간지럽지?’
누가 내 얘기라도 하나?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가 벨을 울려 바깥의 사용인을 불렀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사용인이 방 안을 향해 물었다.
“레이디, 제가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쩐지 깐깐한 인상을 주는 목소리였다.
“으음, 괜찮아.”
“예,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달칵.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여성을 보자마자 라모나는 움찔했다.
‘……진짜 옛날 가정 교사랑 너무 닮았다니까.’
지난번, 찻잔에 관해 설명해 주고 싶어 입을 씰룩거리던 그 시녀장이었다.
‘귀빈 대접인지, 아니면 감시인지.’
라모나는 시녀장을 제게 붙인 로베르트의 속내를 가늠해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이 몇 시쯤인지 알 수 있을까.”
“5시 반쯤 되었습니다, 레이디.”
평소보다 훨씬 이른 기상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일찍 일어난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더 잘까…….’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한 라모나가 몽롱한 정신으로 고민하는 사이 시녀장이 말했다.
“각하께서 레이디께서 일어나시는 대로 뵙고 싶다 하셨습니다.”
“각하께서?”
“예. 각하께 기상 소식을 전해 드릴까요?”
‘왜 아침부터 나를 보려 한담. 잘난 자기 얼굴이나 실컷 볼 것이지.’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예.”
칼 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인 시녀장이 자리를 떴다.
달칵.
다시 문이 닫히고 라모나는 이불을 끌어안은 채 한숨을 쉬었다.
“하아.”
‘레이디 오셀튼은 매일매일 그 잘생긴 얼굴만 보고 살고 싶다던데, 왜 나는 이틀 만에 벌써 지겹지…….’
내 시력이 문제인 걸까, 아니면 레이디 오셀튼의 청력이 문제인 걸까.
‘입을 막으면 좀 괜찮을 것도 같은데, 하루에 세 마디만 하게 할 수는 없나?’
정말 그런 법을 제정할 수는 없는 걸까? 라모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하며 흐린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벌컥.
집무실 문이 열리자 바람을 따라 훅, 하고 싱그러운 시트러스 계열의 코롱 향기가 들이닥쳤다.
하루 만에 제법 익숙해진 향기였다.
그 향기의 끝에서 재앙의 주둥이, 로베르트 메닝엔이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라모나는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아침부터 보기에는 너무 치명적인 미소였다.
지겹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보니 또 잘생기긴 했다.
입이 문제라 그렇지.
‘역시 하루에 세 마디만 하게 하는 법을 제정해야…….’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무슨 일이 있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듯 촉촉해 보이는 머리가 어딘지 모르게 무해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해해 보인다기보다는 어딘가 은밀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특히 풀어헤친 셔츠와 어우러져서 아주…….
‘세상에! 정신 차려, 라모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순간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란 라모나의 눈이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침착하자. 저건 그냥 주둥이다. 주둥이야.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뇨, 주둥, 아니 각하. 저도 방금 일어난 터예요.”
괜히 귀가 벌게지는 기분에 그녀는 애써 시선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6시. 시계는 어제와 똑같이 6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또 6시네. 혹시 시간 강박증, 이런 건가?’
아니면, 설마…….
‘얘…… 진짜 변태 아냐?’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라모나가 의심의 눈초리로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로베르트는 빙긋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공작저에서 첫날은 어떠셨는지 레이디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간부터 손님이 들이닥쳐서 말입니다.”
‘손님?’
이 시간에?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로베르트는 천연덕스레 말했다.
“5시부터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셨으니, 모르긴 몰라도 화가 좀 나셨을 겁니다.”
손님의 정체를 알아챈 라모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맙소사, 아버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를 보며 로베르트는 긍정의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웃음을 그친 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자작과는 이 사안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까.”
“……사실 아버지께서는 전혀 모르세요.”
오, 이런. 그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가주와 이야기하지 않고 협력을 약속하신 겁니까?”
“그…… 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약속드릴게요.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있어요.”
후,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베르트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아, 그리고 말입니다.”
그의 눈이 순간 빛났다.
“레이디의 손님이 한 분 더 와 계십니다.”
“……제 손님요?”
메닝엔 공작저에? 내 손님이? 이 시간에? 라모나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죠?”
로베르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카엘라 벤트하임.”
순식간에 남은 잠이 싹 달아나는 이름이었다.
미카엘라가 메닝엔 공작저를 찾아왔다니. 지난 생이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역시 미래가 바뀐 걸까.’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당장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회귀 전 겪은 일들을 과연 미래라 해도 되는 걸까.
‘만약 내가 본 것들이 없던 일이 된다면…….’
그래도 내가 요하네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잠이 달아난 자리를 공포가 잠식한다. 손이 차갑게 식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옷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다행히도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그녀를 공포에서 건져 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
“만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그냥 돌려보내겠습니다.”
짙은 흑발, 시원스럽게 뻗은 코, 솔직히 잘생긴 얼굴.
로베르트를 바라보며 라모나는 깨달았다.
‘나 때문이구나.’
내가 미래를 바꿨어.
라모나는 자신이 선택한 미래, 로베르트 메닝엔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릿한 손에 다시 온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 남자를 보며 안도하다니.
로베르트는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시니 부끄럽군요.”
“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잘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빤히 바라보시기에.”
‘미쳤나 봐, 진짜.’
라모나는 경악했다.
‘……잠깐만.’
번뜩, 좋은 생각이 벼락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기회 같은데?’
그사이에도 로베르트는 가죽이 부족해 뚫린 입으로 재앙 같은 말을 쏟아 냈다.
“뭐, 괜찮습니다. 아름다운 것에 눈이 가는 건 당연한…….”
그의 말을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던 라모나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각하, 아버지를 설득할 만한 완벽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말이죠.”
“예?”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내.
“아하, 제 협조가 필요하신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다 알겠다는 듯 그가 자연스레 한쪽 팔을 내밀었다.
“……무슨 방법인지는 아시고요?”
“그야 당연…….”
그가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미카엘라 벤트하임, 그리고 그 개자식?”
라모나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벌써 내 계획을 알아차린 모양이네.’
입만 열면 헛소리를 늘어놓는 재앙의 주둥이, 그리고 지금의 이 모습.
대체 둘 중 어떤 게 진짜 이 남자의 모습일까.
라모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우아하게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각하께서 도와주신다면야, 기꺼이.”
이 남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손을 잡기로 했다면 이 이상 망설이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그녀는 남몰래 중얼거렸다.
‘……내가 선택한 미래.’
그리고 덧붙였다.
조금 재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