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 *
‘재밌네.’
그것도 꽤. 로베르트는 라모나에 대한 평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사교계의 얄미움을 한 몸에 사던 벤트하임의 시녀가 길거리에서 메닝엔 공작에게 사랑 고백을 했다. 그것도 하녀복을 입고.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신나는 이야깃거리일지, 안 봐도 뻔했다.
‘베르나딘 이야기는 쏙 들어가겠군. 자기가 퍼뜨린 소문은 자기 일로 막겠다는 건가.’
이거 제법 괜찮군. 로베르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터졌지만 의외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사항이 영 그의 마음에 걸렸다.
<저를요? 요하네스가? 세상에, 제가 왜 그 개자식의 말을 듣겠어요.>
라모나의 말을 떠올린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하네스라.’
일반적으로 그를 호칭할 때는 황태자라 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거리낌 없이 저렇게 이름을 부르다니.
‘마치 친근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 그러고 보니 개자식이라 했던가?’
그녀가 요하네스를 그렇게 부를만한 일이 있었던가. 그의 기억에는 아니었다.
이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파혼당할 예정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점이라든가. 마치 이미 닳을 대로 닳은 사람처럼 구는 점이라든가.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는 느낌이야.’
그 점이 못내 걸렸던 로베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요하네스가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은 또 뭐란 말인가.
‘그 정도 미인은 아니지.’
아니, 생각해 보니 맞는 것도 같고?
품에 안긴 채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던 라모나의 모습을 떠올린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약간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날이 더워지기는 했군.’
그가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정말 이상한 것은 그런데도 자꾸 신뢰가 간다는 점이었다. 마치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오늘도 그랬다.
<오, 로베르트. 내 사랑.>
책 읽듯 뻣뻣하게 연기하는 모습이 제법 그럴듯해 보인 이유는 뭘까.
앙증맞게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그의 품에 폭 하고 안긴 온기 때문에?
‘……뭐, 뭐가 됐든 상관없지.’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내민 협상의 대가를 생각해 보았다.
7년 전 마차사고의 진실.
물기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어머니를 떠올린 그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그 증거를 찾아내 복수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 쓸데없는 생각이지.’
일단 그 여자가 정말 증거의 행방을 알고 있을 때나 생각해 볼 문제였다.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그가 턱을 괴며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역시 오늘도 잘생겼군. 만족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설마 연기가 아니라 진짜 나한테 반한 거 아냐?”
자존감 덩어리, 로베르트 메닝엔은 그렇게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라모나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발언이었다.
* * *
로베르트가 그렇게 헛다리를 짚는 사이, 라모나는 브리튼의 안내를 받아 손님방에 도착했다.
“고맙네.”
라모나가 빙긋 웃으며 그를 내보냈다.
잠옷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다행히도 공작저에는 여성용 잠옷이 준비되어 있었다.
라모나는 섬세한 자수가 놓인 나이트가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바네사 황녀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이려나.’
바네사 황녀. 지난 생에 로베르트의 약혼녀였던 그녀를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찝찝해졌다.
‘혹시 둘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겠지?’
그러나 곧 라모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에이, 바네사 황녀도 귀가 있는데 그럴 리가 없지.”
얼굴만 멀쩡하고, 저따위로 말하는 남자를 누가 좋아해. 중얼거린 라모나가 이내 야무진 손길로 옷을 갈아입었다.
로베르트가 들었다면 발끈할 만한 발언이었다.
* * *
황궁, 미행을 붙였던 이들에게 보고를 받던 요하네스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툭 바닥에 던져 버렸다.
“다시 말해 봐.”
다행히 잔은 깨지지 않았지만, 짙은 녹색 카펫이 와인으로 붉게 물들어 버렸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께서 어젯밤 메닝엔 공작저에서…….”
“흐음?”
“죄송합니다.”
보고를 올린 병사가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요하네스는 병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걸 이제야 보고하지?”
“……예?”
“그 꼴을 마냥 지켜보라고 네놈을 붙인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금발의 푸른 눈, 유난히도 선이 고운 외모를 가진 황태자를 본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마치 천사와 같다 극찬했다.
하지만 요하네스의 측근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의 외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병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병사에게 요하네스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 한마디로 다 해결될 것 같으면 세상이 얼마나 쉬울까. 안 그래?”
쯧, 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한 건지, 무능한 건지……. 뭐, 상관없지.”
휘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칼이 병사의 목을 베었다.
팍.
칼이 지나간 단면에서 피가 튀었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요하네스가 목이 있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건 매한가지니.”
댕그렁.
그는 와인 잔을 던졌듯 칼을 바닥에 던지며 고갯짓했다.
“데미안.”
“예.”
익숙한 일인 듯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시체를 어깨에 짊어진 데미안이 문을 열고 나서자,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카펫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방에서 요하네스는 태연한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미카엘라 벤트하임의 뒤에서 일을 조종하는 여자. 그녀가 이상하게 신경을 끌었다.
‘확실히 영리해.’
그냥 두기는 아까운 여자였다.
물론 가문이 미천하니 황태자비 자리는 줄 수 없지만, 그래도 정부 자리 정도는 기꺼이 내어 줄 의향이 있었다.
‘한데 감히…….’
요하네스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벤트하임의 여식을 통해 분명히 경고했다. 로베르트 메닝엔을 멀리하라고.
‘그런데 이렇게 보란 듯이 공작저로 들어갈 줄이야.’
며칠 전, 게더른 백작가의 파티장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색한 시선이며, 바들거리는 입꼬리, 드레스 자락을 꽉 쥔 손까지.
그가 무슨 의도로 접근한 것인지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는 게 다분한 모습이었다.
“쿡.”
요하네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메닝엔 공작인가. 확실히 영리하긴 하군.”
흥미롭다. 역시 고작 미카엘라 벤트하임 아래에 두기에는 아까운 여자였다.
그가 나른하게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사냥감 몰이는 항상 즐겁지.”
이 김에 그 여자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 한계를 시험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했다.
바들거리는 입으로 그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 뒤가 짜릿했다.
요하네스가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흐음, 카펫을 바꾸는 김에 인테리어도 새로 하는 게 좋겠어.”
아름다운 푸른 눈에 위험한 빛이 번들거렸다.
* * *
다음 날 아침.
똑똑.
“각하.”
브리튼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로베르트가 탁자에 올려 둔 시계를 봤다.
5시, 왠지 불길한 예감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와.”
“예.”
“무슨 일이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이 시간에? 또?”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로베르트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꼭 누구 같군.’
손님이 누군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자작은 응접실에?”
“예.”
하긴, 어제 일을 떠올려 보면 아이젠부르크 자작이 새벽같이 공작저로 달려온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잘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딸이 하녀복을 입고 집 밖을 뛰쳐나가고, 그것도 모자라 갑자기 남자랑 동거하겠다며 외박한 게 아닌가.
심지어 멀쩡한 약혼자도 있는데.
‘하여간 그 여자도 어떤 의미에서 참 대단해.’
로베르트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문득.
<오. 로베르트, 내 사랑.>
뜬금없이 자신을 끌어안고 사랑을 고백하던 라모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꽉 깨문 입술이며, 비장한 얼굴 때문에 순간 로베르트는 자신이 결투신 청이라도 받은 것인가 고민했다.
‘연기라고는 아주 엉망진창이지.’
그러면서 어떻게 하녀복을 입고 자신을 찾아올 생각을 다 한 걸까.
그 광경을 떠올린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영문 모를 웃음에 브리튼의 눈이 커졌다.
“뭐, 재밌긴 재밌네.”
중얼거린 로베르트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쭉 뻗은 팔의 움직임을 따라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새긴 조각 같은 성난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브리튼이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각하, 손님께는 무어라 전할까요.”
“기다리라 해.”
약속도 없이 왔으니 그 정도는 참작해야지 뭐. 중얼거린 로베르트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참 예쁜 미소였다.
그때였다.
“저…… 각하…….”
하얗게 얼굴이 질린 하녀가 황급히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