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로베르트가 아무 대답이 없자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세요?”
“아.”
그녀의 말에 로베르트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역시 용건이 그쪽이었습니까?”
“…….”
“후, 자주 있는 일이기는 한데.”
결혼이라니. 고작 이런 내기에 걸기에는 판돈이 너무 크다.
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이 여자가 자신에게 들이밀 협상 카드가 뭔지.
“그렇다면 제가 이겼을 때는 뭘 주실 생각이신지?”
라모나가 천천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요즘 정보가 자꾸 어딘가로 새어 나간다 싶지 않으셨나요?”
그의 상황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라모나는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스파이 한 명을 선물로 드리죠.”
“그게 정말 황태자의 스파이라는 것을 제가 어찌 믿겠습니까.”
“어제부터 느꼈지만 메닝엔 공작 각하께서는 의심이 참 많으시네요. 아니면 겁이 많으신 건가?”
라모나가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그를 약 올렸다. 하지만 로베르트는 평온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미인은 의심이 많은 편입니다.”
스스로를 미인이라 칭하는 그의 뻔뻔함에 라모나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또 처음 들어 보네요.”
“이제라도 기억해 두시죠.”
로베르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메닝엔 공작 부인 자리와 고작 스파이 한 명이라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내기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을 보았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미카엘라의 사냥개, 사교계의 숨은 계략가.
정말 요하네스가 그녀를 마음에 두었다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녀는 훌륭한 패가 될 수 있다.
‘……그 일에 대해서도 뭔가 알고 있는 듯 하고.’
로베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버리긴 아깝고 갖기엔 불안한 패. 고민하던 그는 간단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갖고 있어도 불안하지 않도록 만들면 되지.’
그게 바로 메닝엔의, 아니 로베르트의 방식이었다.
피식, 작게 웃은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눈빛, 충분히 그 안이 상상될 수 있도록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무엇보다 자신감 넘치는 당당한 태도.
제국의 여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눈길을 떼지 못할 매력적인 남자, 로베르트 메닝엔이 말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이건 어떠십니까.”
“예, 말씀하세요. 각하.”
“제가 도저히 레이디를 못 믿겠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레이디께서 저를 믿게 해 주셔야겠습니다만.”
“……그게 무슨 의미죠?”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고. 라모나가 경계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는 이상한 말로 라모나의 속을 긁어 놓는 대신, 느긋한 포식자처럼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치졸하게 감시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가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분간 공작저에 머무르시죠, 그렇다면 제안하신 내기에 응하겠습니다.”
어쩐지 붕 뜬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
* * *
“당분간 공작저에 머무르시죠, 그렇다면 제안하신 내기에 응하겠습니다.”
황당한 제안에 라모나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나를 감금하겠다는 거잖아. 그런 말을 저렇게 당당하게 한다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로베르트는 팔짱을 낀 채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무리가 된다면 없던 일로 하죠.”
무리라니.
‘세상에, 저걸 말이라고.’
미혼의 레이디에게 저택에 머무르라 하다니. 여기서 라모나가 그의 뺨을 한 대 후려쳐도 욕먹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다.
이 일로 망가질 평판을 생각해 보라. 결혼 적령기인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를 모두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너무나 투명했다.
속내를 계산해 볼 필요도 없는 치졸하기 짝이 없는 감시.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심지어 나는 약혼자도 있는데.’
물론 지난 생에서 라모나에게 나쁜 소문이 나자마자 펄쩍 뛰며 파혼을 선언한, 의리라고는 개미 손톱만큼도 없는 약혼자이긴 했다.
‘하긴 어떻게 보면 걔가 제일 쓰레기야, 진짜.’
사방이 쓰레기 천지네. 라모나는 습관처럼 이마를 짚었다.
로베르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릴 때마다 질세라 곱게 휘는 눈이 얄밉기 짝이 없었다.
라모나는 고민하듯 중얼거렸다.
“흐음, 안타깝게도 제게 약혼자가 있어서…….”
“이런, 그런데 제게 공작 부인 자리를 달라 말씀하신 겁니까?”
“어차피 곧 파혼당할 예정이기는 해요.”
“……보통 그런 걸 미리 알고 있습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로베르트가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라모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왜, 뭐 어쩔래.’
그런 심경이었다.
동거를 가장한 감금. 망측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레오벤 제국에서 이곳, 메닝엔 공작저만큼 요하네스의 손을 타지 않는 장소가 과연 있을까.
치졸한 감시지만, 동시에 제법 괜찮은 보호였다.
‘그 개자식 이 얘기 들으면 또 난리 피우겠네.’
그녀는 축배를 드는 기분으로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좋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제가 먼저 파혼을 통보하면 되겠네요.”
잡쓰레기는 이 김에 겸사겸사 처리하자. 라모나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부터 머무르면 될까요?”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그녀의 반응에 로베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참.”
한참을 웃던 그가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런,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께서 이리도 호탕한 분이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눈 아래 콕, 하고 찍힌 눈물점 때문일까. 그에게서 묘하게 야릇한 분위기가 풍겼다.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라모나가 얼른 대답했다.
“제가 조금 그런 면이 있긴 하죠. 모르셨다니 아쉬운 일이네요.”
천연덕스러운 그녀의 대답에 로베르트가 작게 웃었다.
“좋습니다.”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마치 도망갈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라모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하죠.”
검은 눈이 만족스럽게 빛났다.
“황태자가 레이디에게 반했다는 것은 제 기준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약 올리듯 살살 치는 눈웃음은 덤이었다.
“……좋아요.”
얄밉긴 했지만 라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라모나가 요하네스를 유혹한다는 식의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해질 것이다.
회귀 전, 그 소문 탓에 파혼을 당하지 않았던가.
‘이번엔 내가 파혼을 선언할 거지만.’
어찌 됐든 로베르트의 시험을 통과한 듯했다. 라모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그가 다시 물었다.
“결혼은 당장 하고 싶은 겁니까?”
“약혼부터 해도 좋고요.”
“좋습니다. 그럼 약혼식부터 천천히 하도록 하죠.”
“하지만 지금부터 1년 내로 꼭 결혼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해 주셨으면 해요. 증거도 마찬가지에요. 그 안에 꼭 찾아드리죠.”
계약서? 로베르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1년이냐고 묻기라도 할까 싶어 라모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다행히 로베르트는 깔끔하게 수긍했다.
“그렇게 하시죠. 단.”
팔짱을 낀 그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그 증거라는 걸 제대로 내밀지 못한다면 목숨을 잃을 각오는 해야 할 겁니다.”
그것만은 자신 있다. 라모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트는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원한 샤워 코롱 향이 훅 풍겼다. 아침과는 또 다른 느낌의 짙은 향이었다.
“그럼 레이디께서는 오늘부터 공작저에 머무르시는 겁니까?”
“공작 각하의 뜻이 그러하시니, 그럴 수밖에요. 손님방을 하나 내어 주실 거죠?”
“설마 제 침실을 노리셨던 겁니까.”
미친 건가. 그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라모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각하의 농담이 이렇게 수준 낮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저와 결혼하고자 그런 차림으로 길거리에서 저를 끌어안은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라모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놀리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웃어 보인 로베르트는 집사를 향해 말했다.
“브리튼, 오늘부터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께서 공작저에 머무르실 테니 부족함 없이 각별하게 모시도록.”
“예, 각하.”
브리튼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내를 받아 라모나가 손님방으로 향하려던 찰나.
“아,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로베르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예?”
당황한 라모나가 눈이 동그래진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로베르트가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그의 얼굴에 예쁜, 그러니까 어쩐지 재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그런 복장에 저열한 취미는 없으니, 그 부분을 노리신 거라면 다음번에는 그러지 마시길.”
아아, 지금 저거…….
‘……하녀복 이야기지?’
라모나의 얼굴이 썩어 들어 갔다.
어떻게 저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지. 잘난 머리통을 잠깐 열어서 구경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메닝엔 공작에 대한 평가를 다시 수정했다.
‘그냥 또라이.’
으, 너무 싫어. 진짜 싫어. 질색하며 라모나는 팔을 쓰다듬었다.
“지금이야 이미 성사된 거래입니다만.”
대화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로베르트가 듣기 좋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자신의 신변을 누군가에게 맡기는 계약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
회귀 전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말에 라모나는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는 조심하십시오.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메닝엔을 위해서 말입니다.”
로베르트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나를 위해서, 라…….’
그녀는 묘한 기분으로 로베르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라고 해 두고 저런 말을 하다니. 모순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와 잘 지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