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방금…… 환청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면 혹시 요즘은 사랑이라는 말이 결투 신청이라는 의미로 쓰이나? 아니면 당신을 암살하겠다는 암호라도 되나?
‘아니면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의 사고 회로가 잠시 고장 난 사이, 라모나는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내 사…… 랑, 빨리 나의 손을 잡아 주세요.”
로베르트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른 라모나는 이를 한 번 꽉 악물더니.
이내, 와락! 비장한 기세로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가 품에 쏙 들어오자, 당황한 로베르트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라모나는 그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로베르트는 자신을 향해 깜빡이는 짙푸른 눈동자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새치름한 고양이 같은 눈꼬리 끝이 앙증맞게 올라가 있었다.
‘뭐야. 제법 예쁘…….’
그때, 라모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 신. 이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어요.”
여전히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로베르트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멀쩡해 보였는데, 혹시 그냥 미친 여자였나?’
아니면 정말 그건가? 내게 첫눈에 반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정말 이 죄 많은 몸을 어쩔 수 없군.’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로베르트가 거만한 얼굴로 물었다.
“레이디, 제가 그렇게 좋으셨습니까?”
순간 라모나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는 거야.’
라모나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하하, 이해는 합니다만…… 이런 식의 행동은 조금 곤…….”
저게 진짜. 라모나가 얼른 그의 귀에 속삭였다.
“요하네스의 사람이 붙었어요.”
그 한마디에 상황을 파악한 로베르트는 라모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습격, 아니 포옹에 숨이 막힌 라모나가 발버둥 쳤다.
“으읍! 극흐.”
그러나 로베르트는 세상 다정한 얼굴로 라모나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라모나, 오 내 사랑. 나의 빛, 나의 세상.”
“……네?”
불길한 예감에 라모나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베르트는 특유의 예쁜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에게서 나는 향기가 너무 아찔해 내 잠시 정신을 잃고 말았소.”
누가 봐도 사랑에 푹 빠진 듯한 열렬한 눈빛과, 고막을 다 녹여 버릴 듯한 달콤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재앙 같은 그의 입에서 폭탄이 떨어지자 소란스럽던 거리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
라모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창피해서 죽고 싶다는 게 이런 걸까. 이 정도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의 정적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을 떠올렸다.
‘……재앙의 주둥이.’
젠장, 라모나는 자신이 그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이상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이번 생도 망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말한 건 저 남자인데, 부끄러움은 내 몫일까.’
아찔한 애칭 목격에 라모나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가 로베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적당히 해요.’
‘뭐?’
‘적. 당. 히 하라고요.’
답답하다는 듯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로베르트는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세상에, 무슨 시 낭송하듯 연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요하네스를 속여야겠다면서 저리 연기가 약해서야…….’
어찌 됐든 이 되지도 않는 연극의 이유는 들어 봐야 할 터. 다시 한번 탄탄한 가슴으로 라모나를 끌어안은 그가 황급히 마차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두 사람은 질색하며 떨어졌다.
라모나가 그와 닿았던 어깨를 탁탁 털자, 로베르트도 지지 않고 자신의 가슴팍을 손으로 탈탈 털었다.
‘……하? 지금 나 보라고 저러는 건가?’
‘허?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는군.’
괜한 승부욕에 두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휴우, 라모나 진정해. 네가 좀 봐주자.’
저건 좀 맛이 간 사람이잖아. 봐주자, 응? 애써 자신을 진정시킨 라모나가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 오늘 아침 자작저에…….”
“쉿.”
검지를 입술에 댄 로베르트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공작저로 돌아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다행히 이번에는 멀쩡한 얼굴과 목소리였다.
* * *
메닝엔 공작저, 응접실.
‘재밌는 일을 좀 물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마차니, 하녀복이니.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던 걸까.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새벽과는 달리 우아한 금색의 찻잔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달그락.
‘오! 이것도 예쁘네.’
탐난다. 라모나는 내심 감탄하며 찻잔을 들었다.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제가 보고 싶으셨습니까?”
‘와, 진짜.’
한마디라도 멀쩡하게 하면 큰일 나는 병에 걸린 걸까? 입맛이 떨어진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뭐, 그렇다고 해 두죠.”
떨떠름한 대답에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아하, 그래서 하녀복 차림으로 제게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셨군요. 이런.”
라모나는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로베르트는 싱긋 웃어 보였다.
“이해는 합니다.”
라모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입만 열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이라 착각이라도 했을 텐데.’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저렇게 얄미운 것도 재주다. 그런데 진짜 잘났다는 점이 더더욱 그를 얄밉게 만들었다.
그녀는 긴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후. 오늘 아침, 미카엘라가 저를 찾아왔어요.”
“레이디께서 보내 두셨다던 서신 때문이군요.”
“아뇨, 요하네스 때문이었어요.”
요하네스의 이야기에 로베르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새벽부터 그가 미카엘라를 찾아갔다더군요. 그러고는 제가 각하를 만나러 갔던 일을 언급한 듯했어요.”
라모나의 얼굴이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미카엘라는 제게 다시는 각하를 만나지 말라 경고를 하고 갔고요.”
그 일의 의미를 깨달은 로베르트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층 진지해진 태도로 그가 말했다.
“그 말인즉슨…….”
라모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사람을 붙인 거죠.”
“제게 사람을 붙인 모양이군요.”
‘……응?’
동시에 말한 두 사람이 대체 뭐냐는 듯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웃음을 터뜨린 로베르트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설명하듯 친절하게 말했다.
“레이디, 당연히 황태자가 메닝엔 공작인 저를 감시하기 위해 사람을 붙이지 않았겠습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라모나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아뇨. 보세요, 각하. 요하네스는 제게 사람을 붙였어요. 사실 전부터 그가 제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던 터고요.”
“황태자 요하네스가 말입니까?”
그는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명치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
속으로 혀를 한 번 찬 라모나가 침착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그 황태자 요하네스가요.”
로베르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깍지를 끼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참 우아하기도 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별로 우아하지 못했다.
“이런, 저는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들은 소식은 제 앞에 계신 레이디께서 이틀 전 파티장에서 황태자를 우연히 만났다는 것뿐입니다.”
그가 하루 사이에 자신의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에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연한 조치이긴 했지만, 그래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게더른 백작가의 파티를 말씀하시는 모양이네요. 맞아요, 실은 그때부터 그가 제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거든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그에게는 충분히 이상하게 들릴 만한 이야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를 바라보는 로베르트의 묘한 시선이 그렇게 보였다.
“그러니까 레이디의 말씀은…….”
그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황태자 요하네스가 불과 어제 열렸던 파티에서 만난 레이디께 첫눈에 반해 버린 바람에 하루 만에 사람을 붙이고, 그것도 모자라 가장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시군요.”
그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레이디께서 그렇게 믿으신다면야.”
라모나는 헛웃음을 쳤다.
‘저렇게 재수 없는 사람은 처음 봐.’
‘자의식 과잉 환자일 줄은 미처 몰랐군.’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라모나의 눈에서 화르륵 승부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그럼 각하, 저와 내기 한번 하지 않으시겠어요?”
“무슨 내기 말씀이십니까.”
“요하네스가 정말 제게 사람을 붙인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오호.’
내기라는 말에 구미가 당긴 로베르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글쎄요. 뭐, 원하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예를 들면?”
라모나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순간 로베르트는 또다시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공작님과의 결혼요.”
뭐랄까.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