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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8화 (9/151)

#8화

* * *

한바탕 아이젠부르크 자작저를 뒤집어 놓은 미카엘라는 금방 공작저로 돌아갔다.

아이젠부르크 자작은 그사이 급히 외출했다. 자작이 외출한 사실을 알아챈 미카엘라가 묘한 웃음을 지었지만, 라모나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당장 자작에게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일단 한숨을 돌렸다.

“후.”

‘개자식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지난 생, 요하네스는 분명 이리 조급해하지 않았다.

미카엘라에게 본성을 드러낸 것도, 라모나에게 노골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도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무언가 달라졌다.

아직 제대로 벌인 일도 없는데, 회귀한 지 고작 하루 만에 벌써 상황이 바뀌고 말았다.

‘……젠장.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자신이 미카엘라의 티타임에 가지 않아서? 아니면 그 재앙의 주둥이를 만나러 갔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로베르트 메닝엔은 내일 오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자 했다.

그러나 요하네스가 자신에게 사람을 붙였다는 것을 안 이상,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분명 그 전에 손을 쓸 거야.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그 개자식의 행동은 안 봐도 뻔했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하늘색 눈동자를 떠올린 라모나가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저…… 아가씨.”

얼굴이 하얗게 질린 티아가 라모나를 찾아왔다.

“티아? 왜 그래?”

“자작님이 상단에 다녀오신 후에 이야기를 마저 하자고 하셨어요. 큰일이 생기신 모양이에요.”

“상단에?”

“……네.”

티아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벤트하임 공작 각하께서 무역선을 띄울 수 없다고 하셨나 봐요.”

티아도, 라모나도 그 원인을 단번에 알아챘다.

‘미카엘라.’

고작 약속 한 번 깼다고 치졸하게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까드득, 라모나가 이를 악물었다.

* * *

그날 저녁, 라모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까지도 자작은 돌아오지 못했다. 어두운 얼굴의 라모나에게 아이젠부르크 자작 부인이 말했다.

“라모나.”

“네?”

“네 탓이 아니란다. 그거 하나만 알아 두렴.”

“…….”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말에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지난 생에도 그랬다.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겠다는 라모나를 필사적으로 말리던 자작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라모나.>

그때를 떠올리자니 눈이 시큰해져서, 라모나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침실로 올라왔다.

보드라운 하얀색 잠옷으로 갈아입고 털썩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항상 이런 식이었지.’

아이젠부르크가 아무리 벤트하임에게 충성을 다해도 돌아오는 것은 매번 건방지게 굴지 말라는 길들이기뿐.

이제 진저리가 다 날 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고작 티 타임 불참 한 번에 흔들릴 얄팍한 의리와 지원…….’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그러니 지난 생에도 그렇게 쉽게 자신을 이용했을 것이다.

요하네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정부로 던져 주고, 나중에는 요하네스를 독차지하기 위해 살해 누명을 씌워 죽이고.

‘미카엘라…… 내가 이제 와 무슨 짓을 한다 한들 너보다는 약할 테지.’

친구는 무슨. 이제 시녀 짓도 다 끝이었다.

닮았다는 말에 괜히 눈치를 보는 것도, 미카엘라의 것보다 못한 액세서리만 골라 사는 것도, 미카엘라의 맘에 안 드는 영애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것도.

전부 다 끝났다.

‘게다가 그 일…….’

그 일만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 과거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떠올린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과거를 반복할 순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요하네스보다 먼저 움직여야 해.’

개자식에게 일을 꾸밀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움직일 것.

결단을 내린 그녀가 살그머니 침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그리고 문밖을 향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티아? 거기 있니?”

“꺅!”

문밖에 서 있던 티아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세상에,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저 정말 깜짝 놀랐어요! 주치의를 불러 드릴까요?”

“쉿!”

얘는 진짜 왜 이렇게 주치의를 좋아해.

“티아, 너 혹시 주치의 좋아하니?”

“세상에, 아가씨! 그 아저씨는 저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다고요!”

“어머, 미안. 일단 잠시 들어와 봐.”

“……네?”

“빨리!”

티아는 꼭, ‘우리 아가씨가 오늘 정말 어디 아프신 거 아닐까?’라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라모나가 속삭였다.

“어서. 너만 해 줄 수 있는 게 있어.”

“오직 저만이……! 이 세상에서 저만이 아가씨를 위해……!”

너만 해 줄 수 있다는 말에 감격한 티아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그녀는 후다닥 침실로 들어왔다.

“예, 아가씨. 제가 왔어요. 유일한! 오직! 제가 왔어요.”

어쩐지 비장한 얼굴이었다.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뭐든지?”

“예! 뭐든지! 또 소문이라도 내고 올까요? 이번엔 메닝엔 공작이 고자라고 할까요?”

“아냐, 그럴 건 없고…….”

라모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잠깐 나랑 옷 좀 갈아입자.”

잠시 후, 라모나의 잠옷으로 갈아입은 티아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가씨…… 이렇게까지 하셔야 해요?”

그 옆에서 티아의 하녀복을 입은 라모나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인 척하고 잘 누워 있어. 알겠지?”

“하아, 아가씨 저는 정말…….”

티아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저야 들켜도 혼나면 그만이지만 아가씨는 평판이 중요한 레이디이신데! 세상에! 하녀복을 입고…….”

“절대 그럴 일 없게 할게, 티아. 정말이야.”

‘실은 모두가 알게 되겠지만.’

실은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리 생각하자 약간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으음, 이게 다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니까.’

그래 나뿐만이 아니라 가문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라모나가 애써 죄책감을 외면하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티아, 내가 만약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어머니께 말씀드려 줘.”

“예? 새벽까지요?”

“응.”

라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일이 더 커질 테지.’

그 상황을 상상해 버린 티아가 기겁한 얼굴로 말했다.

“맙소사, 새벽까지라니. 아가씨,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는 몰라도 그 계획 실행 안 하시면 안 될까요?”

“안 돼.”

“어째서요?”

티아의 질문에 라모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란다.”

“…….”

순식간에 눈물이 쏙 들어간 티아가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우리 아가씨가 대체 무슨 괴이한 소리를 하신담?’ 같은 표정이었다.

한참의 어색한 침묵 끝에 티아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응?”

“혹시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뭔데?”

“제발 주치의 한 번만 불러오게 해 주세요.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요.”

그 정도였니. 라모나는 대답 없이 티아의 시선을 피했다.

* * *

늦은 저녁 메닝엔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 지친 기색의 로베르트 메닝엔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침부터 골치 아픈 손님을 만난 탓일까. 오늘따라 하루가 유독 길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뒷조사를 해 봤지만 특이한 점이 나오지는 않았다. 딱 그가 이미 알고 있던 내용 그대로였다.

‘하긴 이리 허술하게 일을 벌이지는 않았겠지.’

로베르트가 헛웃음을 치며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댔다.

‘증거를 자신이 줄 수 있다니…….’

벤트하임의 시녀가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였다.

끼이익!

날카로운 쇠 긁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윽.”

급정거에 휘청거린 로베르트가 황급히 손을 뻗어 칸막이를 짚었다.

‘습격인가.’

위기를 직감한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품에 숨겨 둔 총을 손에 쥐며 마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가, 각하. 그것이…….”

마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로베르트는 빠르게 총을 꺼내 들고 침입자에게 겨눴다.

그러나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머리와 짙은 푸른 눈의 침입자를 발견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황급히 정신을 차린 그가 상황 파악에 나섰다.

‘하녀복?’

아니, 왜 저런 차림으로?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로베르트와 눈이 마주친 라모나는 비장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뭐지?’

그녀의 살벌한 기세에 로베르트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갑자기 등 뒤가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결연한 얼굴의 라모나가 책 읽듯 뻣뻣하게 입을 열었다.

“오, 로베르트. 내 사랑.”

이를 악문 그녀는 마치 못 할 말이라도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사랑? 로베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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