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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7화 (8/151)

#7화

탁.

마차 문이 닫히고, 소매에 삐져나온 실오라기를 발견한 라모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칠칠치 못하게 이런 걸 달고 다녔나 보네.”

그녀는 실을 뜯어 버리기 위해 왼쪽 손목을 들었다.

“응?”

그러나 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헛것을 봤나?’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밖에서 불어온 상쾌한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간질거렸다.

‘……평화롭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꼭 새 시작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아서,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옅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여유를 만끽한 게 얼마 만의 일인지. 그녀는 눈을 감고 편안히 등을 기댔다.

문득 그 남자가 떠올랐다.

로베르트 메닝엔.

그가 왜 재앙의 주둥이라고 불리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만.

<그러니까, 결국 영애도 그거 아닙니까. 계약 결혼 제안.>

설마 그런 식으로 사람을 떠볼 줄이야.

‘……표정도 진짜 재수 없었어.’

그런 남자는 정말 최악이지.

‘바네사 황녀도 고생이 많았겠네.’

헛웃음을 친 라모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평화로운 기분도 잠시, 자작저에서는 무척이나 화가 난 아이젠부르크 자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버지?”

당황한 라모나가 그만 발을 헛디뎠다.

“꺅!”

“아가씨!”

다행히 티아가 재빨리 그녀를 붙든 덕에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하마터면 크게 넘어질 뻔했다.

‘응? 방금…….’

뭔가 발을 잡아당긴 것 같았는데? 라모나가 바닥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살펴본 것이 무안하리만큼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착각인가?’

이상한 예감에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분노한 자작이 호통쳤다.

“이 아침부터 겁도 없이 메닝엔 공작저를 가? 그것도 혼자?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해!”

“……죄송해요.”

잘 풀려서 다행이었지 위험한 일이었다. 라모나는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자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라모나. 도대체 왜 그런 거냐. 네가 무슨 일이 있어서 메닝엔 공작저를 홀로 가.”

“그게…….”

라모나는 난처함에 말끝을 흐렸다.

자작에게 메닝엔 공작가와 손을 잡자는 이야기를 꺼내야 하긴 했다.

다만 아직 확정된 내용이 없었고.

‘요하네스, 그 개자식도 아직은 얌전하지.’

그렇다면 뭐라 말해야 자작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대충 넘어가기엔 너무 중대한 사안이기에 라모나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때였다.

“자작님.”

다급히 달려온 집사가 자작의 귀에 속삭였다.

“레이디 벤트하임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뭐? 이 시간에?”

자작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미카엘라가 자작저를 제집처럼 드나든다지만, 연락도 없이 아침부터 방문이라니. 분명한 무례였다.

당황한 것은 라모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카엘라가? 갑자기?’

분명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었으니까.

* * *

로베르트 메닝엔. 라모나는 지난 생 그가 죽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밤이었다.

어쩐 일인지 미카엘라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아이젠부르크 자작저를 찾아왔다.

“……라모나.”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스산했다.

“미카엘라? 세상에 어쩐 일로 이렇게 비를 맞…….”

“메닝엔 공작이 죽었어.”

“뭐?”

메닝엔 공작이 죽다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라모나는 불현듯 그의 부모가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미카엘라?”

“산사태가 났대.”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라모나가 입술만 깨물던 그때, 미카엘라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러니까 라모나.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

“……미카엘라.”

“내가 황태자비가 되지 못하면 어머니는 날 어디에 평생 가둬 버릴지도 몰라. 응?”

또 그 이야기였다.

요하네스가 라모나를 정부로 들이길 원한다며, 자신을 위해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맙소사. 라모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 얘기라면 이제 그만…….”

그러자 미카엘라가 털썩, 비장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경악한 라모나가 소리쳤다.

“미카엘라! 정말 이러지 마!”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미카엘라가 라모나를 올려다보았다.

“새 메닝엔 공작이 전하께 충성을 약속했어.”

“……뭐?”

“메닝엔 공작가도 이제 요하네스 전하의 편이야. 이제 많고 많은 영애 중, 굳이 날 황태자비로 삼을 이유가 없다고.”

“진정해. 아무리 그래도 전하께서 어떻게 벤트하임의 손을 놓으시겠어?”

“아니, 황태자 전하는 그러고도 남을 분이야.”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미카엘라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미카엘라가 독기 어린 눈으로 라모나를 노려보았다.

“라모나, 너는 나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 적 없었구나?”

“……미카엘라? 그게 무슨 소리야?”

“친구라며. 그런데 날 위해서 그것도 못 해 줘?”

“무슨 말도 안 되는…… 진정해. 친구라서 더 해 줄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야.”

“너야말로 변명하지 마.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일’에 대해서 다 말할 거야. 라모나 네가 범인이라고, 메닝엔 공작을 미워한 네가 꾸민 일이라고 말할 거야!”

“미카엘라!”

경악한 라모나가 외쳤다.

“정신 차려! 그 이야기가 퍼지면 나도 죽고, 너도 죽어.”

“……황태자비가 못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흑, 나아.”

결국 미카엘라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서럽게 눈물을 터뜨렸다.

“제발……. 제발, 라모나. 날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 마. 너까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우리 어머니가 나한테 어떻게 하는지 알면서 어떻게 너까지 이래.”

“…….”

미카엘라는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 응?”

친구.

그러는 너야말로 친구인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위해서 결국 그 개자식의 정부가 되어 주었는데,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었을까.

* * *

“라모나!”

와락.

한껏 치장한 미카엘라가 울먹이며 라모나를 끌어안았다.

순간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가증스러워.’

속이 다 울렁거렸다. 그녀는 애써 한숨을 삼키며 미카엘라를 위로했다.

“미카엘라,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응?”

라모나가 티아에게 눈짓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내오라는 뜻이었다.

알아들은 티아가 부리나케 방 밖으로 나섰다.

“……흑.”

미카엘라가 콧등을 찡긋하자 또르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청초한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은 처연하다 못해 가엽기까지 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다 아프게 했다.

그러나 라모나에게는 오히려 기분만 더 역겹게 만들 뿐이었다.

‘또 억지로 짜내는 울음이네.’

회귀 전, 라모나는 이 가짜 눈물에 매번 속아 넘어가곤 했다.

미카엘라가 이렇게 울 때면 걱정스러운 마음 반, 벤트하임 공작에게 일러바칠 것이 두려운 마음 반으로 무리한 부탁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이미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어 버린 후였으니까.

‘내 목줄을 알아서 미카엘라의 손에 쥐어 주다니 정말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지.’

라모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미카엘라에게 찬물이라도 한 잔 퍼붓고 싶었다.

아니면 머리채라도 잡고 있는 힘껏 흔들든가.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자신은 미래를 알고 있을 뿐, 그것을 바꿀 힘은 아직 가지지 못했다.

조금만 더 참자. 라모나는 애써 상냥하게 미카엘라의 손등을 토닥였다.

미카엘라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께서…… 글쎄.”

그녀가 검지로 우아하게 눈물을 훔쳤다.

“흑, 글쎄 네가 메닝엔 공작을 만나러 갔다고 이야기를 드렸더니 불같이 화를 내시는 거야.”

순간 이상한 점을 눈치챈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응?’

만나러 ‘간다’가 아니라 ‘갔다’라니.

그녀는 분명 피치 못할 사정으로 메닝엔 공작저를 방문할 예정이라고만 적어서 보냈다.

어느 날, 몇 시에 방문할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잘난 맛에 사는 그 남자가 6시에 자신을 불러낼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걸 어떻게……?’

이게 무슨 뜻일까.

꼭 누가 얼음물에 그녀를 담갔다 꺼내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얼어붙었다.

이내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라모나가 이를 악물었다.

‘내게 사람을 붙였구나!’

순식간에 피가 차갑게 식었다.

이성을 잃은 라모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미카엘라, 너…… 지금…….”

똑똑.

“아가씨, 들어갈게요.”

티아가 문을 두드렸다. 순간 아차 싶었던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진정하자. 지금은 안 돼. 티아가 차를 우리는 사이 라모나는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았다.

물끄러미 찻잔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차마 미카엘라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은 없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황태자 전하를 만나고 온 거야?”

“응? 마, 맞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미카엘라가 변명을 둘러댔다.

“오늘 아주 바쁘시다더라고. 그래서 아침이 아니면 나를 못 볼 것 같다고 그러시더라?”

“그래서 공작저로 찾아오셨어?”

“으응, 그럼. 다정하신 분이니까.”

‘거짓말.’

라모나는 비웃음을 삼켰다.

‘보아하니 요하네스가 내게 사람을 붙였나 본데.’

음험하고 도덕관념이라고는 없는 행동이 딱 개자식다운 짓이었다.

미카엘라가 힐끔 그녀를 살폈다.

“라모나?”

“아, 미안. 잠이 좀 덜 깼나 봐. 그래서 황태자 전하께서는 왜 화를 내신 건데?”

“메닝엔 공작은 황태자 전하를 적대시하잖아. 그런데 황태자비가 될 나의 친구인 네가 그와 교류한다니 벤트하임이 상황을 살핀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야.”

“정말?”

의미심장한 라모나의 질문에 미카엘라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아닐 텐데.’

라모나가 가느다란 눈초리로 그녀를 살폈다.

내심 찔렸는지 미카엘라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물론 또 가짜 울음이었다.

“흑, 아침부터…… 너무 놀랐어…….”

“괜찮아?”

라모나가 미카엘라를 진정시키듯 다정스레 등을 쓸어 주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라모나의 얼굴은 싸늘히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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