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계약 결혼이라니. 내가? 저 남자랑?
‘제정신인가.’
라모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그녀가 되살아나는 과정에서 시공간이 뒤틀리고 어쩌고, 결국 그 어쩌고 에너지를 견디지 못한 로베르트 메닝엔이 정신을 놓게 되고.
‘……설마.’
그녀의 속도 모르는 로베르트는 한껏 자비로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멋진 내게 반한 너를 다 이해한다는 듯이.
라모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 미쳤나 봐.’
미안합니다. 제 회귀가 설마 당신의 정신을 망가뜨릴 줄이야.
사색이 된 그녀를 앞에 두고, 로베르트는 잘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하, 요즘 그런 내용의 소설이 유행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설마 레이디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 줄이야. 의외군요.”
생각에 논리가 있는 것을 보니 정신은 멀쩡한 듯했다. 다행히 흔한 자의식 과잉인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인가? 아무튼 그랬다.
“……하, 하, 하. 그러신가요.”
라모나는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이 계획 괜찮을까? 정말? 그냥 지금이라도 2황자를 찾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합리적 의심이 마구 샘솟았다.
‘후, 일단 진정하자.’
라모나는 한숨을 삼켰다.
결혼이라.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나온 타이밍이 조금 불쾌하고 아주, 그것도 아주아주 뜬금없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괜찮은 방법이었다.
사실 결혼이야말로 가문 간에 손을 잡기 가장 그럴듯한 명분이었다. 신분 차이가 걸려서 고려조차 하지 않았지만, 먼저 말을 꺼내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는 과거의 일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은 그 ‘무슨 짓’에서도 굉장히 우아하고 고상한 축에 속했다.
‘……진짜 우아하고 고상한가?’
라모나는 스스로에게 푹 취해서 즐거워하는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저런 남자와의 결혼이라니, 그다지 고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괜찮은 생각이기는 했다.
‘결혼해 주세요, 각하!’라는 사유라면 그를 쫓아다녀도 수상해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저 남자의 추종자로 보인다는 게 수치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 뭐 척이니까. 그냥 그런 척일 뿐이잖아.’
난 결백하니까 괜찮아. 그렇지? 라모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저 남자가 정말 자신과 결혼할 리도 없고, 영악한 벤트하임의 시녀보다는 사랑에 체면을 내던진 철부지가 요하네스의 시선을 피하기에도 좋을 터.
결정을 내린 라모나가 삐걱거리며 말했다.
“어. 머. 나. 어쩔 수가 없네요……. 공작님께 제 마음을 들켜 버렸다니. 하. 하. 하.”
로베르트가 빙긋 웃었다. 생글생글 웃는 미소가 유독 얄미웠다.
“역시 용건이 그쪽이셨습니까.”
“예.”
“저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네, 각하의 입장 또한 물론 이해…… 네?”
뭐, 긍정적 검토? 라모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메닝엔 공작 약혼했잖아……?’
얘 진짜 미친 거 아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 바네사 황녀님과의 약혼은 어찌하시려고요?”
순간 로베르트의 입가에서 재수 없는 미소가 사라졌다.
“왜 이리 기고만장한가 했더니 그 소식을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이지?”
피식, 그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제야 라모나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기억이 뒤섞인 바람에…….’
실수했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바네사 황녀는 3황자 베르나딘의 동생이었다.
그들의 약혼은 3황자와 메닝엔 공작가가 손을 잡았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으로부터 두 달쯤 후에 일어날 일이었다.
하필 이전 생에 그 약혼식에 다녀온 바람에 지금이 약혼 이후라 착각하고 말았다.
응접실에는 싸한 침묵이 흘렀고, 라모나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로베르트가 여유 있게 손깍지를 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떠보는 것에 익숙한 듯했다.
라모나는 애써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아직 벤트하임에서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짙푸른 눈동자가 도발하듯 로베르트를 향했다.
그는 재밌다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참 당당한 사람이야. 혹시 이것도 내 덕인가?”
“칭찬은 감사히 받도록 하죠.”
“벤트하임은 아직 모른다……. 그럼 그쪽만 처리하면 아무도 이 일을 모른다는 이야기인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라모나는 차분히 그의 도발에 응했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실까 봐, 벤트하임에는 미리 서신을 보내 뒀죠. 메닝엔 공작저를 방문할 예정이라고요.”
미리 미카엘라에게 보내 둔 그 서신 이야기였다.
로베르트가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게 되었군.”
그는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증거를 알고 있다는 말은 어떻게 신뢰하지?”
“생각보다 겁이 많으시네요.”
라모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각하,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건 이해해요. 믿을 수 없다면 저의 제안을 거절하세요. 저는 곧장 벤트하임 공작가의 문을 두드리겠지만요.”
묘한 그녀의 말에 응접실에는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선대 메닝엔 공작 부처의 죽음에 얽힌 증거. 라모나는 그 증거의 행방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협상 포인트였다.
원수와도 같은 벤트하임의 시녀가 베르나딘과 메닝엔 사이의 거래를 알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대가를 대신 주겠다고 말하기까지 한다면.
‘얼마나 수상해 보이겠어.’
수상한 사람. 그런데 확실히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한 사람.
그게 바로 라모나가 로베르트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이었다.
힐끔, 그녀는 로베르트의 손을 살폈다. 어느새 소파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춰 있었다.
라모나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걸렸다.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제안을 거절한다면 자신이 곧장 미카엘라에게 달려가리라 생각하는 게 빤히 보였다.
‘나는 그 유명한 벤트하임의 시녀니까.’
살다 보니 그 별명이 도움이 되는 날도 있네. 라모나는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
“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또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었는지?”
다시 승기를 잡은 그녀의 얼굴에서 싱그러운 미소가 사라졌다.
상대의 빈틈을 찾아내는 집요한 눈빛, 이게 바로 요하네스의 곁에서 10년을 견뎌 낸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지금부터가 바로 진짜 협상이었다.
로베르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사실 죽여 없애면 그만인 것이라.”
“미카엘라의 시녀인 저를요? 벤트하임 공작이 저를 핑계로 날뛰는 꼴이 볼만하겠는걸요.”
“…….”
“아마 그 정도면 황제 폐하께서도 바네사 황녀님의 약혼을 반대하실 것 같은데요?”
그것만은 사실이었는지 로베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각하, 저는 지금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더는 벤트하임의 시녀로 살고 싶지는 않거든요.”
라모나는 짙푸른 눈으로 그를 똑똑히 응시했다.
“물론 선택은 각하께 달려 있죠. 하지만 저를 거절하신다면, 그다음 정도는 제가 선택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떡할래.
날 이대로 벤트하임에게 넘길래? 아니면 속는 셈 치고 한번 이용이라도 해 볼래?
대답 없는 로베르트를 향해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겁쟁이.’
도발이었다. 아쉽게도 그는 눈썹조차 꿈틀하지 않았지만.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로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고 싶은데.”
“기꺼이요.”
“이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벤트하임과 인연을 끊으려는 이유가 뭐지?”
이거면 됐다. 흔들리는 로베르트의 심정을 눈치챈 라모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디 그 이유를 말씀드릴 다음 만남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만날 시간을 정한 사람이 그였다면, 헤어질 시간을 정할 사람은 그녀였다.
* * *
아이젠부르크의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로베르트는 싸늘한 얼굴로 명했다.
“브리튼.”
“예.”
“오전 일정은 취소해. 평소 보내던 심부름꾼 말고 다른 이를 보내 소식을 전하도록.”
“예, 각하.”
베르나딘과의 약속을 취소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이젠부르크…….’
위세가 강한 것도,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닌 가문.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벤트하임의 오랜 가신이라는 것뿐.
‘그런데 왜 벤트하임에게서 벗어나려 하는 것인가.’
결혼 이야기를 흘리자마자 눈을 데구루루 굴리더니 천연덕스레 맞다고 대답하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 웃기는 여자야.”
되지도 않는 거짓말이었다. 정말 결혼이 목적이었다면 당황했겠지.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웃긴 것은 그녀에 대한 감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단정하고 차분한 드레스 때문일까.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한 타이밍은 아니지만 제 취향을 저격하는 차림새긴 했다.
<세상에, 제가 왜 그 개자식의 말을 듣겠어요.>
“흠, 개자식이라.”
개자식. 직관적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거 하나는 제법 마음에 들었던 로베르트가 웃음을 흘렸다.
“쿡.”
그는 일단 이 일의 원인을 알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저 생각보다 유능한 ‘미카엘라의 사냥개’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을 테니까.
“감이 나쁘지 않은데, 재밌는 일이라도 좀 물어 왔으면 좋겠군.”
로베르트 메닝엔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면 뭐, 어디 가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기라도 하든가.”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그가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그의 손목에서 어딘가로 이어진 푸른빛이 또다시 반짝, 하고 떠올랐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