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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5화 (6/151)

#5화

그러나 그 시각, 라모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

찻잔을 들어 올린 그녀의 얼굴이 사르르 풀어졌다.

‘세상에, 이건 진짜 예술이야.’

찻잔은 독특하게도 중간중간이 투명하게 비어 있었다. 홍차 물이 다 비쳐 보일 정도였다.

처음엔 잔이 깨진 건 줄 알고 놀랐지만 아니었다.

투명한 유약으로 막힌 구멍은 일부러 낸 장식이었다. 이국적인 꽃문양을 보니 동방의 물건인 게 분명했다.

‘진짜 너무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쁜 게 다 있지?’

라모나는 속으로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감탄에 묘하게 라모나의 가정 교사를 닮은 공작저의 시녀장은 입술을 씰룩였다.

당장이라도 이 아름다운 찻잔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늦게 와 주는 게 오히려 고맙다.

‘그 남자 얼굴 보느니 예쁜 찻잔 보는 게 훨씬 좋아.’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약속은 6시였으니까.

그래도 그대로 응해 주기는 괘씸한 마음에 일찍부터 공작저 문을 두드렸다.

‘내가 당황했으면 너도 당황해야 공평하지.’

라모나가 코웃음을 삼켰다.

그가 조금 재수 없고, 조금 많이 얄밉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하네스를 막기 위해서는 그 남자만 한 적임자가 없었으니까.

‘……그 일을 막기 위해서도 마찬가지고.’

또다시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라모나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한 피부를 보고 있자니 눈앞이 어지럽게 물들었다.

불타오른 거리와 손목에 닿던 뜨거운 열기.

<이 악마야! 이 살인자!>

어린 소년의 비명 같은 외침까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주먹을 꽉 쥔 라모나가 애써 심호흡을 하던 그때였다.

댕, 댕.

6시 정각을 알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벌컥, 응접실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바람 때문일까. 싱그러운 코롱 향기가 응접실에 들이닥쳤다.

덕분에 정신이 돌아온 라모나가 멍하니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방금 씻은 것인지 물기가 남은 촉촉한 머리카락.

손님을 맞이하기엔 영 부적절한 모습이었으나, 그의 우월한 미모가 모든 것을 적절하게 만들었다.

우월한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허벅지.

그 무엇보다도 자신만만한 태도가 퍽 매력적인 남자.

메닝엔 공작, 로베르트 메닝엔이 라모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눈물점이 콕 박힌 눈으로 야릇하게 웃는 그를 보며, 라모나는 왜 다른 영애들이 그에게 반하는지 이해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인성이 글러서 그렇지, 로베르트 메닝엔은 훤칠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라모나는 그의 잘생김에 반하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라니.’

저건 절대 사과가 아니다. 비꼬는 소리지.

‘이래서 잘생긴 애들은 좀 껄끄러워. 꼭 성격이 나쁘더라고.’

라모나는 마음 한쪽에 남아 있던 어두운 마음을 툭툭 털어 버렸다.

후회도, 반성도.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으니까.

“다 공작님 덕분인걸요.”

잘난 네 덕에 참 오래 기다렸단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인지 로베르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레이디의 부지런함을 다른 이들도 배워야 할 텐데요.”

“그 또한 다 공작님 덕분 아니겠어요.”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한데도 로베르트는 활짝 웃어 보였다.

얄미우리만큼 예쁜 미소였다.

‘괜히 더 재수 없네.’

물론 라모나에게는 역효과만 낳을 뿐이었지만.

생일날 아침 도착한 선물처럼 잘 포장된 비아냥거림 속에서 그들은 상대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미카엘라의 사냥개.’

‘제 잘난 맛에 사는 또라이.’

파악을 마친 로베르트가 여유롭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레이디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 무엇인지…….”

그의 시선이 왼쪽 손목을 향했다. 셔츠 사이로 언뜻 은장 시계가 반짝였다.

“몹시 궁금하군요.”

바쁘니 썩 꺼지라는 소리. 라모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많이 바쁘신 모양이에요.”

“레이디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바로 그 메닝엔 공작인지라.”

“각하의 귀한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죠. 괜찮으시다면 용건을 바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그럼 배려하신다고 하니 제가 먼저 묻겠습니다.”

그는 능숙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가로챘다. 날카로운 검은 눈이 오만하게 빛났다.

“무슨 생각입니까.”

“글쎄요.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저런, 레이디께서 그렇게 멍청한 분인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입니다.”

뻔한 도발에 라모나는 코웃음을 삼켰다.

그런 그녀가 못마땅한지 눈썹을 까딱한 로베르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꿍꿍이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겁니까?”

결국 그도 소문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라모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무엇이?”

“이런 소문을 퍼뜨려 놓고 독대를 청한 이유 말이에요. 그것도 벤트하임의 시녀인 제가요.”

“알기는 아는 모양입니다.”

굳이 저런 비꼬는 말에 일일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라모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3황자 베르나딘. 욕심 없는 소탈한 성격에, 힘 있는 뒷배도 없죠.”

“신랄하지만 정확하군요.”

“그런 그가 황위를 노리기 위해 메닝엔 공작을 포섭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베르나딘과 저의 친분은 이미 유명한 것을, 새삼스러운 일입니까?”

“그렇지만 그 대가로 3황자 전하께서 제시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겠죠. 그 메닝엔 공작 각하의 마음을 움직인 걸 보니 말이에요.”

드디어 로베르트의 입이 닫혔다. 그녀가 이것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지금부터가 진짜겠지.’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은 라모나는 나긋한 목소리로 협상 테이블을 열었다.

“그 대가, 제가 드릴게요.”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각하께서도 선대 메닝엔 공작 부처를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계시잖아요. 아닌가요?”

부모의 죽음 이야기가 나오자 로베르트의 얼굴이 순간 눈에 띄게 굳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군요. 그건 사고일 뿐이었습니다.”

“요하네스 로팅엔 폰 에스터하지.”

라모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로베르트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그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제국의 황태자. 맞죠?”

이 남자가 지난 생 내내 애타게 찾던 것.

그것은 바로 부모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었다.

그가 애타게 찾고 있으며 라모나를 죽이면 알 수 없는 것.

이보다 더 확실한 협상의 열쇠가 있을까. 라모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3황자 전하가 약속하신 증거, 제가 대신 찾아 드리죠. 이만하면 난데없는 열애설보다 훨씬 가치 있는 용건일 텐데요.”

로베르트는 대답 대신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살벌한 침묵이 흘렀고, 응접실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곧 그는 라모나를 약 올리듯 취했던 신사적인 가면을 벗어던졌다.

“황태자의 사주를 받고 왔나?”

“저를요? 요하네스가? 세상에, 제가 왜 그 개자식의 말을 듣겠어요.”

개자식이란 말에 로베르트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이내 그는 소파에 천천히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대가로 원하는 것은?”

‘……됐다!’

라모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미리 준비했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공작가에서 시작하려는 차 사업, 아이젠부르크로 넘기시죠.”

“흐음?”

“전부를 넘겨주지 않으셔도 좋아요. 다만 제국 내 판매는 모두 아이젠부르크의 상단을 통해서 해 주세요.”

그러나 라모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베르트는 냉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일갈했다.

“헛수작 부리지 말고 진짜 원하는 걸 말해. 고작 그 정도에 벤트하임을 배신하겠다는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그의 미간이 짜증스레 구겨졌다.

정곡을 찔린 라모나의 눈이 커졌다.

‘분명 이 정도면 저 남자에게 만족스러운 조건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신뢰를 얻어 내지 못한 게 문제인 모양이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라모나의 모습에 로베르트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딴 식으로 머리를 굴릴 거면 자리는 여기서 파하는 게 낫겠군.”

안 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답은 하나뿐이었다.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털어놓는 수밖에.

꿀꺽.

긴장한 라모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아이젠부르크를 메닝엔의 가신으로 삼아 주세요.”

요하네스와 직접 싸우는 대신 메닝엔의 칼 뒤에 숨는 것. 이게 바로 그녀가 찾아낸 답이었다.

지난밤, 라모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면 어떨까. 미카엘라의 그 가느다란 목을 졸라 버리면 안 될까.

울컥하고 올라오는 충동에 겉옷을 입었다 벗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쓰기에 되찾은 삶이 너무 아까웠다.

복수로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없었으니까.

그러기 위한 최선의 선택지는 결국 로베르트 메닝엔. 이 남자였다.

위험해도, 치사해도 어쩔 수 없다. 라모나는 결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대가입니다.”

“가신이라……. 이제는 메닝엔의 시녀라도 되고 싶은 건가……?”

로베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제안을 일개 가문 구성원이? 언제부터 메닝엔이 그렇게 우스운 이름이었지.”

“이상하게 들리실 수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하, 역시 그건가.”

그녀의 변명을 듣던 로베르트가 돌연 피식, 하고 웃었다.

“그럴 것 같긴 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자극적인 소문을 낼 필요가 없으니, 뭐.”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타이밍이 좀 이상하지만 눈빛도 매력적이기는 했다.

‘무슨 소리지?’

당황한 라모나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진짜 놀랄 일은 아직 남아있었다.

“세상은 역시 나같이 잘나고, 매력적인 남자를 가만히 두지 않지.”

재수 없게 잘생긴 얼굴에 예쁜 미소가 번졌다.

“사실 그런 용건으로 나를 찾아오는 레이디들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

갑자기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로베르트를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미친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의 흐름이었다.

결국 듣다 못한 라모나가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저기요? 각하?”

“뭐, 지금까지 중 가장 흥미롭긴 하군.”

아니면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갑자기 아까 마신 홍차가 수상하게 느껴져, 라모나는 찝찝한 눈빛으로 찻잔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기나긴 혼잣말을 끝낸 로베르트 메닝엔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그쪽도 그거 아닙니까.”

그의 눈이 곱게 휘었다.

“계약 결혼 제안.”

그 순간 라모나는 메닝엔 공작의 정적들이 그를 부르던 호칭을 떠올렸다.

재앙의 주둥이, 로베르트 메닝엔.

그녀는 드디어 깨달았다.

재앙이라는 칭호가 붙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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