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벤트하임 공작저, 하나뿐인 아가씨의 치장을 위해 하녀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탐스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남색에 가까운 짙고 푸른 눈동자.
그러나 앙칼진 고양이 상의 라모나와는 달리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미카엘라가 눈을 감고 하녀들에게 화장을 맡겼다.
그때, 어린 하녀 하나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레이디 오셀튼에게서 티 파티 초대장이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오셀튼?”
그게 누구지? 기억을 더듬어 본 미카엘라가 코웃음을 쳤다.
“아아, 그 노란 여자?”
레이디 오셀튼, 항상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탓에 노란 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영애였다.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공작 영애인 제게 버릇없이 먼저 초대장을 보내다니, 최근 좀 어울려 줬더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딜 감히 벤트하임과 맞먹으려 들어.’
미카엘라는 당분간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쯤 무시해 줘야 제 주제를 깨닫지.’
사랑스러운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비웃음이 걸렸다.
“버려.”
“네? 그래도 괜찮을까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짜증스러운 대답에 어린 하녀가 황급히 서신을 들고 사라졌다.
그때였다.
“저, 아가씨…….”
난감한 표정의 다른 하녀가 문 앞에서 쭈뼛거렸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께서 오늘 몸이 안 좋다고…… 티타임을 같이 나누기 힘들 것 같다는 연락이 왔는데요.”
“뭐!”
미카엘라가 날카롭게 눈을 치켜떴다.
“다시 말해 봐. 라모나 아이젠부르크가 뭐?”
“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못 올 것 가, 같다고…….”
욱한 미카엘라가 손에 잡히는 대로 하녀를 향해 집어 던졌다.
쨍그랑!
“꺅!”
하녀의 등에 부딪힌 화병이 산산이 조각났다.
몸을 벌벌 떠는 하녀는 안중에도 없는 미카엘라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깟 게 감히!”
지금 나를 무시해? 약속 취소일 뿐이었지만 미카엘라는 거센 분노에 휩싸였다.
그녀가 선홍빛 입술을 짓이겼다.
“이게 진짜 미쳤나…….”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벤트하임에 기생해서 먹고 사는 주제에 감히?
분노한 미카엘라가 마저 화풀이를 하려던 찰나였다.
“그렇게 입술 깨물지 말라 했을 텐데. 지금 그깟 아이젠부르크 하나 뜻대로 하지 못해 날뛰는 거니?”
차가운 목소리의 누군가가 그녀를 나무랐다.
“한심하게.”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미카엘라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오셨어요, 어머니.”
“그래.”
벤트하임 공작 부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엉망이 된 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공작 영애면 뭐 해. 제게 주어진 것도 활용할 줄 모르는 덜떨어진 것.”
대놓고 들으라고 하는 혼잣말이었다.
“어쩌다 내 배에서 저런 게 나왔는지. 이렇게 멍청하게 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때 바꿔서 데리고 올 것을.”
15년도 더 된 옛날 일을 중얼거리는 어머니를 보며, 미카엘라는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 * *
탐스러운 갈색 머리와 남색 눈동자. 뽀얀 피부에 속눈썹이 길게 드리운 큰 눈까지.
두 아이를 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어머나, 누가 보면 꼭 쌍둥이인 줄 알겠어요.”
그 말 그대로였다.
벤트하임 공작가의 미카엘라, 그리고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의 라모나.
어린 시절, 둘은 꼭 쌍둥이같이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착각한 사용인들에 의해 아이들이 뒤바뀔 뻔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벤트하임 공작 부인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망할 것들, 고작 자작가의 여식을 어디 공작 영애에 비교해.’
그녀와 아이젠부르크 자작 부인은 어린 시절 친구였다. 말로만 친구가 아닌, 가문의 비밀까지 서로 속삭일 수 있는 진짜 친구였다.
그러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순진했던 소녀 시절은 너무 짧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벤트하임 공작을 붙잡고 결혼에 성공했다. 당연히 벤트하임에서는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깟 견제 따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마리안느, 그 모자란 여자도 메닝엔의 안주인 자리를 꿰찼는데 나라고 못 할 게 뭐람.’
벤트하임 공작 부인. 그녀는 자신이 거머쥔 새 신분에 만족했다.
신분 상승을 이뤄 낸 그녀와 달리 오랜 친구는 약혼자였던 아이젠부르크 자작과 결혼했다.
“정말 잘됐다, 소피아! 벤트하임 공작가라면 지금처럼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야.”
뛸 듯이 기뻐하는 친구를 보며 그녀는 비웃음을 삼켰다.
이제 그들은 소위 말하는 ‘급’이 맞지 않는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 그녀는 활짝 웃으며 오랜 친구를 대했다. 비록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을지언정.
대신 아무도 없는 공작저에서, 그녀는 미카엘라에게 속삭였다.
“어찌 그깟 아이젠부르크 계집애와 너를 비교할 수 있니. 하필 같은 머리카락과 눈 색을 가지고 있어서…… 쯧.”
그녀는 세뇌하듯 말했다.
그깟 자작 영애는 네 친구가 될 급이 아니라고.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그 계집애는 네 하녀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입맛에 맞게 잘 이용하다 털어 버리면 된다고.
“너는 고귀한 벤트하임의 레이디니까.”
맞아, 그깟 아이젠부르크 주제에. 어머니의 생각을 쏙쏙 흡수한 어린 미카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밖에서는 항상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라모나는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걸요.”
꼭 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한 번도 진심으로 라모나를 친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대신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실컷 부려 먹었다.
라모나가 자신의 뜻대로 안 될 때면 가문 사이의 이야기를 들먹이며 책임감을 자극했고, 눈치 빠른 라모나는 그녀의 입맛에 맞게 움직였다.
만족스러운 심복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 * *
‘그런데…… 네가 감히 나를 무시해?’
공작 부인에게 혼이 난 미카엘라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주먹만 꽉 쥐었다.
잘 손질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프다니? 말도 안 되는 핑계가 아닌가.
레이디끼리의 약속, 특히나 더 높은 신분을 가진 이와의 약속에는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참석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어제 멀쩡하게 게더른 백작가의 파티에 다녀온 라모나가 갑자기 다리가 부러졌을 리는 없고.
‘어제 가든파티에서 황태자 전하를 만났다고 이러는 모양인데.’
미카엘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무시가 필요한 건 아무래도 노란 여자가 아니라 이쪽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짜증스러움이 어린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수국이 한창 예쁘게 핀 정원에 티타임을 준비해 놨는데, 다 쓸모없게 되었다.
미카엘라는 이를 갈듯 말했다.
“저거 다 치워 버려.”
휙 하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멈춰 섰다.
“아, 그리고 마차를 대기시켜. 아버지를 만나러 갈 거니까.”
그녀는 제국의 하나뿐인 공작 영애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아는 레이디였다.
어머니의 말처럼 덜떨어진 것이 아니라.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것에게는 벌을 줘야지.’
어디서 건방지게 주인에게 대들어. 미카엘라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번졌다.
* * *
아직 창밖이 어둑한 이른 아침, 로베르트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젠장.”
등 뒤가 축축했다. 또 ‘그 꿈’을 꾼 탓이었다.
날카로운 비명이 아직도 귓가에 울리는 기분에 그가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좀 잠잠해지나 싶었더니 또 시작이군.’
한동안은 괜찮았는데, 어제 그 유해한 변태 자식을 떠올린 일 때문인 모양이었다.
시곗바늘은 숫자 4를 지나 5를 향해 가고 있었다. 5시가 다 된 시간, 꿈자리가 좀 뒤숭숭하긴 했지만 평소와 같은 기상이었다.
“으으.”
로베르트가 나른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상체를 탈의한 탓에 촘촘히 짜인 등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습관처럼 거울을 살핀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정말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군.’
이런 자신을 고작 베르나딘 자식과 엮으려 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흡족하게 거울을 감상하던 그는 이내 눈을 감고 목을 뒤로 젖혔다.
‘오늘 낮에는 상단에 가서 세금 처리 이야기를 해야겠군.’
빌어먹을 황제. 골치 아픈 일에 그가 미간을 찌푸리던 때였다.
똑똑.
“각하.”
집사 브리튼이 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에 브리튼이?’
벌써 피곤한 기분에 그가 혀를 찼다.
“무슨 일이지.”
“레이디 아이젠부르크께서 와 계십니다.”
“……뭐?”
누가?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로베르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물론 어제 그녀에게 이른 아침 시간에 공작저를 방문하라 답을 보내긴 했다.
‘하지만 그건 6시였잖아?’
로베르트가 탁자 위에 올려 둔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5시.
“하.”
미친 건가. 잠시 말을 잃었던 그가 헛웃음을 쳤다.
“이거 제법 재밌네.”
뭐, 약속에 빨리 오면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 피식 웃은 로베르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실 밖으로 나섰다.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브리튼.”
아침이라 목이 잠긴 탓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매력 있었다.
“약속이 6시였던가.”
“외람되오나, 그렇습니다.”
아하. 그러니까 지금 우리 레이디께서 6시에 부른 게 마음에 안 드셨다, 이거지?
로베르트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럼 손님을 응접실로 안내해 드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유독 예쁜 미소였다.
“약속한 대로 6시에 뵈러 갈 테니.”
잘나디잘난 메닝엔 공작은 이 정도의 도발에 꿈쩍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