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라모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맙소사, 10년 전의 나야. 너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니……?’
로베르트 메닝엔,
젊고 유능한 ―레이디 오셀튼의 말에 따르면 섹시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메닝엔 공작.
회귀 전, 번번이 자신의 계획을 망치는 그에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라모나는 음습한 소문을 퍼뜨렸다.
바로 3황자 베르나딘과 그가 사실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
표면적으로는 3황자 베르나딘의 행동을 묶어 두기 위함이었다.
자극적인 소문이 돌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니, 그와 로베르트 메닝엔이 일을 꾸미기 번거로워질 테니까.
‘그 남자가 약혼하면서 흐지부지된 소문이긴 했지만……. 뭐, 이러니까 그 재앙의 주둥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실감이 확 나네.’
지난 생, 그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산사태로 인한 사고사였다.
로베르트 메닝엔, 하필 죽기 직전 생각났던 그 남자.
순간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라모나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침착하자, 지금은 모두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또다시 지옥 같던 그 풍경이 떠올랐다.
새삼 자신이 회귀한 것이 다시 와 닿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일을 되돌리기 위해 신이 자신을 돌려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눈을 감은 라모나가 간신히 생각을 전환했다.
‘맞아, 내가 그런 소문을 냈었지. 어쩌면 그 일이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상대가 로베르트 메닝엔이라는 것이 좀 미안하긴 했다. 그는 1년 후 죽을 예정이었고.
‘……내가 진 빚이 있으니까.’
한숨을 삼킨 라모나가 티아를 불렀다.
“티아.”
“네!”
“그렇다면 더더욱 네가 가야겠다.”
“네에에?”
투둑. 티아가 들고 있던 서신을 떨어뜨렸다.
“서신을 조금 수정해야겠네. 그거 이리 다시 줘 봐.”
제 잘난 맛에 사는 그 남자를 낚으려면 좀 자극적인 계기가 필요하겠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라모나가 펜을 들어 서신을 작성했다.
그때였다.
‘응?’
무언가 푸르스름한 것이 그녀의 옷소매에서 반짝하고 빛났다.
‘뭐지?’
라모나가 황급히 소매를 확인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네,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한 라모나는 다시 펜을 들어 서신을 작성했다.
* * *
메닝엔 공작저의 집무실.
소파에 등을 기댄 로베르트가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았다.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탄탄한 허벅지가 돋보였다.
그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아이젠부르크, 라…….”
발칙한 소문의 근원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벤트하임 그 여자의 수족. 역시 자신의 감은 끝내주게 탁월했다.
그녀는 무슨 배짱인지 친절하게도 자신의 하녀를 이용해서 소문을 퍼뜨렸다. 꼭 한번 엿이라도 먹어 보라는 듯이.
‘도발인가.’
로베르트의 눈에 승부욕이 타올랐다.
아이젠부르크 자작가라면 벤트하임 공작가의 가신 가문이었다.
제법 긴밀한 사이라 볼 수 있었다.
사업적으로도 아이젠부르크가 벤트하임에 기대고 있었고, 부인들도 어려서부터 친밀한 관계인 듯했으니까.
사이가 좋은 것은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매처럼 똑 닮은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이 그들을 더 가까워 보이게 만들었다.
다만 그 사이를 우정이라 하기에는 껄끄러운 느낌이 있었다.
말하자면 미카엘라가 공작새같이 화려하게 사교계를 누비는 사이 라모나는 어딘가 회색 같은 흐릿함을 덕지덕지 바른 비둘기처럼 그 뒤를 지키는, 그런 사이랄까.
보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미카엘라 벤트하임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는 중이었다.
‘멍청한 벤트하임과 달리 영리하기는 해. 특히 지난번에 황후를 움직이게 한 그 일은 제법 괜찮은 수였지.’
그 덕에 붕 뜬 신세가 된 2황자 알폰조를 떠올린 로베르트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호평은 거기까지. 그녀가 퍼뜨린 발칙한 소문은 용서할 수 없었다.
‘어딜 감히 이 몸을 고작 베르나딘에 붙여.’
로베르트는 그 점에 분노했다.
“추잡하기 그지없는 것이 딱 벤트하임 고자 놈들이 할 만한 짓이군.”
여자도 고자라 하나? 아무튼.
그 발칙한 여자를 어떻게 족치면 좋을까, 진짜 혀를 뽑아 버릴 수도 없고.
그가 살벌한 생각을 하며 혀를 차던 때였다.
똑똑.
“각하.”
“브리튼? 들어와.”
“서신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또 그 빌어먹을 열애설?”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브리튼이 서신을 내밀었다.
지겹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젖히고 서신을 훑어보던 로베르트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멎었다.
“뭐야.”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습관처럼 쓸어 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잘못 봤나?’
그러나 봉투에 적힌 글씨는 여전히 변함없었다.
<로베르트 메닝엔 공작 각하께. -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다시 봐도 믿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허, 이 여자가 돌았나…….”
아무래도 소문의 출처가 드러난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얻어맞기 전에 먼저 한 대 치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미친 건가?’
자신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것이라면 대성공이었다. 어느 쪽이든 솔직히 궁금하긴 했으니까.
로베르트는 망설임 없이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봉투를 갈랐다.
서신에 담긴 그녀의 용건은 짧고도 단순했다. 긴히 말씀드릴 일이 있으니 공작가를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아래에 추가된 문구는 예사롭지 않았다.
<추신: 주된 내용은 아닙니다만 그 소문이 퍼진 경위도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허.”
그 소문쯤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가벼운 말투는 뭐지. 이 몸을 고작 베르나딘과 엮어 놓고?
로베르트가 다시 혀를 찼다.
“혹시 이 서신을 가져온 심부름꾼이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의 사람인가?”
“예, 각하.”
왠지 그녀의 의중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그 소문을 퍼뜨린 하녀?”
“예, 맞습니다.”
“미쳤군.”
로베르트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완전히 싸움꾼인데?”
톡톡, 그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뭐, 한번 만나는 봐야지.”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감이 말했다.
끝내주게 재밌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브리튼.”
“예, 각하.”
“아이젠부르크 자작가로 사람을 보내. 내일 6시에 뵙겠다고.”
“각하, 외람되오나 6시라 하심은…….”
집사의 물음에 로베르트가 입꼬리를 살며시 끌어 올렸다. 예쁜 미소였다.
“당연히 아침이지.”
“그러니까, 레이디께 아침 6시에 공작가를 방문하라고 전달하라는 말씀이시군요.”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매끄러운 얼굴로 집사가 대답했다. 은근한 질책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래, 레이디께 아침 6시에.”
내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나 정도 되는 귀하신 몸을 만나려면 그만큼의 공은 들여야 하지 않나?
잘난 얼굴로 로베르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란 듯한 도발이었다.
* * *
제정신인가? 약속 시간을 전해 들은 라모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뭐? 6시?”
“……네.”
티아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하?”
어이없네. 라모나가 헛웃음을 쳤다.
그 잘난 메닝엔 공작께서 친히 그녀가 공작가로 찾아올 시간을 정해주셨다.
당장 내일. 그것도 아침 6시로.
‘아무래도 기선 제압을 하려는 모양인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침 6시라니. 이건 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하여간 빌어먹을 메닝엔. 라모나는 이전 생, 황궁 연회장에서 그를 마주쳤던 일을 떠올렸다.
<남에 대해 그런 더러운 소문을 냈으면 몸을 잘 숨기지 그랬나, 응?>
피식 웃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런데 그러고서는 덧붙인 말이 영 이상했다.
<하긴, 그대가 아니었더라도 날 법한 소문이긴 했지. 세상은 항상 젊고 매력적인 남자를 가만히 두지 않으니.>
그 일을 떠올린 라모나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젊고 매력적인 남자라는 소리잖아?’
약이라도 먹은 걸까? 아니면 먹어야 하는 약을 안 먹은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할 수 있는지 라모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열받는 것은 그가 정말 젊고 매력적인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나서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는 것처럼 구는 남자.
그런데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다못해 발가락 하나까지 온몸 구석구석이 잘난 건 사실이라 반박할 수 없는 남자. 메닝엔 공작.
왜 하필 죽기 직전에 그가 떠올랐는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노릇이었다.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한 손목을 바라보며 라모나가 중얼거렸다.
“뭐, 정말 죽었다 깨어나긴 했지.”
티아가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예? 아가씨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라모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빙긋 웃어 보였지만, 티아는 미심쩍어하는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아가씨…… 정말 주치의 안 불러 보실 거예요?”
“아침에는 악몽을 꿨을 뿐이라니까. 그래, 공작가의 심부름꾼이 지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니?”
“앗! 네 맞아요. 뭐라 답을 주고 올까요?”
“뭐, 상대는 공작님이고 나는 한낱 자작가의 여식인데 어쩌겠어. 오라고 하시면 가 드리는 수밖에.”
라모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티아는 그런 라모나를 못 미더운 듯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
‘역시 주치의를 불러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꼭 그런 눈빛이었다.
달칵.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라모나가 중얼거렸다.
“아침 6시라…….”
더럽고 치사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메닝엔이 재수 없다 한들, 그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곱게 간다고 한 적은 없지.’
상대의 도발을 모른 척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 잘난 놈은 세상일이 전부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좀 알 때도 됐다.
‘두고 보자, 로베르트 메닝엔.’
고개를 비스듬히 젖힌 라모나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