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로베르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 베르나딘 그 자식이랑 내가?”
“예.”
“그 자식이랑 내가 둘이 사, 사…….”
돌겠군. 이건 또 누구 작품일까.
‘보나 마나 뻔하지.’
이딴 식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역시 마음에 안 들더라니. 로베르트는 헛웃음을 쳤다.
“당장 소문의 근원지를 조사해 오도록.”
“예.”
“다시는 그딴 말을 못 지껄이게 감금이라도 해야겠어, 혀를 뽑아 버리든가.”
살벌한 말을 중얼거린 잘나디잘난 메닝엔 공작께서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하지만 뭐랄까, 영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 브리튼.”
“예, 각하.”
“그런데…… 뭐, 내가 남자를 만날 수도 있다지만 베르나딘이랑 사귀기에는 역시 내 쪽이 좀 아깝지 않나?”
“……그럼 이만.”
주인의 이런 모습이 익숙했던 브리튼은 대답 대신 인사를 남긴 채 서재를 나섰다.
그때였다.
로베르트의 손목에서 아주 가느다랗고 푸르스름한 빛이 반짝, 하고 빛났다.
* * *
해가 하늘 가장 높은 곳에 떠오른 정오.
딸랑.
은은한 종소리가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에 울려 퍼졌다.
아가씨가 나를 부르시는구나! 문 앞을 지키던 하녀 티아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응, 티아. 들어오렴.”
차분한 대답에 티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가씨가 이번에도 이상한 것 같으면 정말 주치의를 불러와야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건 다 오늘 아침의 일 때문이었다.
평소 늦잠을 자는 일이 거의 없는 아가씨는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눈을 뜨지 못했다.
어제 다녀온 파티 때문에 피곤하셨나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벤트하임 공작가의 ‘그 아가씨’와 약속이 있으시니까.
그녀는 조심스레 아가씨를 깨웠다.
<아가씨,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그러나 아가씨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툭, 하고 아가씨의 손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티아는 밤새 아가씨가 어떻게 된 줄 알고 기절이라도 할 뻔했다.
<아가씨! 아가씨. 눈 좀 떠 보세요. 네?>
덜컥 겁을 먹은 그녀가 아가씨를 힘껏 흔들었다.
그제야 아가씨는 몽롱한 눈을 떴다. 깜빡, 흐린 눈으로 티아를 바라보던 아가씨가 말했다.
<……티아? 세상에,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건가?>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티아는 5년 전 홍수 때 죽었는데…….>
<꺅! 아가씨 아침부터 그게 무슨 불길한 말씀이세요!>
놀란 티아가 펄쩍 뛰었지만, 아가씨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꼭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처럼 생겼네. 이 리본이 잔뜩 달린 잠옷은 뭐지? 꼭 10년 전에나 유행했던 것 같은 촌스러운 디자인인데?>
그야 여기는 아이젠부르크 자작저니까요. 티아는 그 말을 간신히 삼켰다.
한창 유행 중인 리본 잠옷 이야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다행히도 아가씨는 크게 아프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가씨를 재촉했다.
<아가씨, 오늘 미카엘라 아가씨와 약속이 있으시잖아요. 얼른 준비하셔야 해요. 네?>
<뭐? 미카엘라? 그 개 같은 쓰레기?>
아가씨,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개 같은 쓰레기라뇨!
티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사이 손목을 확인하던 아가씨는 급기야 거울로 달려가 얼굴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비장하게 말했다.
<티아, 오늘 신문을 좀 가져오겠어?>
이제 정말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싶었던 티아는 터덜터덜 신문을 하나 챙겨 들고 돌아왔다. 신문을 건네받은 아가씨는 재빠르게 날짜를 확인했다.
<제국력 847년 3월 14일. 847년이라니……?>
큰 충격에 빠진 듯 한참이나 눈을 가늘게 뜨고 신문을 살피던 아가씨는 또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10년……. 세상에, 그러면 아직 시간이 충분해.>
절정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티아가 울상이 되어 있던 그때, 아가씨는.
짝!
자신의 양 뺨을 내려쳤다.
<꺅! 아가씨!>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에 티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가씨는 선언하듯 말했다.
<벤트하임 공작가는 안 갈 거야.>
그 쓰레기통을 내가 왜 가.
아가씨는 역겹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티아는 확신했다.
<어떡해, 우리 아가씨가 많이 아프신가 봐.>
그녀로서는 당연한 추측이었다. 설마 아가씨가 단두대에서 덜컹 목이 썰리는 바람에 죽었다 살아나 10년의 세월을 회귀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아침의 일을 떠올린 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정말 괜찮으신 거 맞겠지?”
문 앞을 서성이던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여차하면 꼭 주치의를 불러야지.’
그렇게 다짐하면서.
* * *
달칵.
“아가씨, 부르셨어요?”
라모나는 쭈뼛거리는 티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짜야, 다시 봐도 진짜 티아야.’
눈물이 핑 돌았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니 아이젠부르크 자작저였다.
처음에는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 그러나 꿈이라기엔 세상이 너무 실감 났다.
손목의 흉터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허둥지둥 거울로 달려가고. 그것으로도 부족해 신문까지 살펴봤다.
‘제국력 847년 3월 14일. 847년……!’
그제야 라모나는 깨달았다.
‘10년 전이야. 10년 전으로 돌아왔어.’
끔찍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듯 하늘에서 뚝, 하고 선물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하아.”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돌이켜 보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요하네스의 정부가 되다니.
당시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선택을 하면 안 됐다.
자신의 최후를 떠올리던 라모나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미카엘라.’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았네. 그녀가 한숨을 삼켰다.
쓰라린 배신에 아직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나저나 어쩌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혹시…… 그 일을 막기 위해서일까?’
그때의 일을 떠올리자 라모나는 또다시 코끝에 매캐한 탄내가 맴도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일단 진정하자. 지금이 정확히 언제쯤이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티아를 불렀다.
“티아, 내가 어제 뭘 했더라?”
“네? 어제요? 게더른 백작가 말씀하시는 건가요?”
‘게더른 백작가? 익숙한데?’
잠깐만, 게더른 백작가?
이런 미친. 그 순간 그녀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설마 그 개 같은 황…….”
범상치 않은 그녀의 어휘 선택에 티아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아가씨!”
“……태자 놈이 나를 꼬시려 했던 거기 말하는 거야?”
“네에? 황태자 전하께서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티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차 싶었던 라모나가 황급히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티아! 일단 비밀이야.”
“허억, 네네!”
티아가 야무지게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게더른 백작가의 파티라. 팔짱을 낀 라모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였지.’
게더른 백작가의 가든파티.
파티라고는 하지만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레이디들이 참여할 만한 가벼운 사교 모임에 불과했다.
게더른 백작가는 힘 있는 가문은 아니었다.
미카엘라는 그런 급이 맞지 않는 자리는 거들떠보지 않았기에, 라모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혼자 파티에 참석했다.
그러나 라모나가 게더른 백작 영애와 인사를 주고받던 그때, 갑자기 정원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은은한 광택을 뽐내는 백금발, 하늘을 고스란히 갖다 박은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
꼭 천사 같은 외모를 가진 황태자 요하네스의 등장이었다.
거침없이 게더른 백작 영애에게 다가온 요하네스는 라모나를 관찰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라모나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할 때쯤, 그는 입을 열었다.
<레이디 아이젠부르크, 내 그대를 한 번쯤은 만나 보고 싶었어.>
살짝 끌어 올린 입꼬리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동자의 어색한 부조화가 소름 끼쳤다.
빌어먹을. 당시를 회상하던 라모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곳에 나타난 게 분명했다.
‘그 개자식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정복욕을 느끼니까.’
이전에 자신이 일을 꾸민 것이 요하네스의 흥미를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지난 생, 결국 그는 기어이 자신을 손에 넣고 10년간 천천히 말려 죽였으니까.
‘……젠장.’
회귀 전 끔찍했던 기억에 라모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티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니죠?”
“아냐, 그냥 잠깐 생각 좀 하느라. 그건 그렇고 티아, 서신을 두 통 보내려고 하는데 말이야.”
“서신을요?”
“응. 이쪽의 것은 메닝엔 공작저로, 그리고 남은 하나는 그 쓰레, 아니 벤트하임 공작가로 보내 주렴.”
“아가씨, 정말 그 쓰레, 세상에, 티아! 아가씨가 그러신다고 너까지 그러면 어떡해!”
자책하듯 자신의 입술을 찰싹찰싹 때린 티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쓰레에…… 벤트하임 공작저에 가지 않으실 거예요?”
“응, 안 가.”
라모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티아가 울상이 되었다.
“게다가 메닝엔 공작저는 또 무슨 말씀이신지……. 거기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그냥 다른 하인을 보낼까요?”
“괜찮냐니?”
티아에게 공작가와 관련하여 무슨 일이 있었던가?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티아,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그러니까, 그게…… 있잖아요…….”
티아가 쪼르르 다가와 은밀히 속삭였다.
“제가 아가씨의 명을 받고 조금, 으음, 공작님에 대해 그렇고 그런 소문을 냈잖아요. 분명 그때 제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괜히 메닝엔 공작저에 갔다가 들키면 어쩌죠?”
“그렇고 그런 소문? 그게 뭔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라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티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베르나딘 황자님과 메닝엔 공작 각하가 사귄다는 소문요!”
“둘이 사귄다고? 대체 언제부터?”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미래가, 아니, 현실이 바뀐 건가?’
라모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티아는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 참, 아가씨이. 왜 모른 척을 하시고 그러세요. 오늘 정말 이상하셔요!”
‘모른 척이라니?’
내가 뭘? 영문 모를 이야기에 라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깨달음이 벼락같이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 맞다.’
라모나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거…….’
내가 낸 소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