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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1화 (2/151)

#1화

Chapter 1. 그러니까 그거 아닙니까

재판장, 엄숙한 얼굴의 판사가 선언했다.

“황후 폐하를 시해하려 한 죄인 라모나 아이젠부르크에게 사형을, 그리고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에는 멸문을 명한다.”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쁘게 수군댔다.

“저 여자가 황제 폐하의 정부라는 소문이 정말이었나 봐요.”

“세상에, 그래서 황후 폐하를 살해하려 했던 건가요? 자기가 황후라도 될 줄 알고?”

“황후 폐하께서는 친구라며 저 여자를 아끼셨는데, 어떻게 친구의 남편을…… 짐승도 아니고…….”

그 한가운데에서 라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따지고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황후 미카엘라의 오랜 친구였고, 동시에 황제 요하네스의 정부였으니까.

하지만 누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저 사람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게 내 죗값인가.’

라모나는 자조적으로 헛웃음을 쳤다.

그때였다. 침묵을 지키던 황제 요하네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황후.”

옅은 금발에 푸른 눈. 천사 같은 얼굴의 그는 안타깝다는 듯 황후 미카엘라의 손등을 쓸었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얼마나 상심했을까.”

사람들은 내심 요하네스의 다정함에 감탄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어떻게 친구 남편의 정부가 될 수 있냐며 욕하는 사람들이, 정작 그 친구 남편의 한 마디에 감탄한다는 점이 너무나 우스웠다.

역겨워. 토악질이 날 것만 같아 라모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모든 사건의 중심, 미카엘라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요하네스가 위로하듯 다정하게 무어라 속삭이자, 그녀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예, 폐하.”

그 광경을 바라보는 라모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뻔해. 멍청하게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웃으라 말했겠지.’

미카엘라. 이게 네가 선택한 남자야. 나까지 팔아넘기면서.

헛웃음을 친 라모나가 중얼거렸다.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

험한 말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저, 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수군거림 속, 요하네스는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라모나를 바라보았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눈과 입술, 손을 훑었다.

천천히 라모나를 관찰한 그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네가 못 할 걸 잘 안다는 듯한 비웃음을 띤 채로.

그녀가 악에 받친 눈으로 요하네스를 노려보았다.

‘하라면 못 할 줄 알아……?’

라모나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미카엘라…….”

죗값을 받는다면 너부터 받아야 하잖아. 안 그래? 라모나는 날카롭게 외쳤다.

“나를 폐하의 정부로 만든 건 너잖아!”

충격적인 내용에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헙.”

눈이 동그래진 귀족들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싸늘한 정적 속, 라모나는 발악하듯 외쳤다.

“10년 전,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나를 폐하께 갖다 바쳤잖아. 당시 황태자였던 폐하가 날 정부로 들이고 싶어 하신다고, 그래야 너를 황태자비 자리에 앉힐 거라 하셨다면서!”

“그, 그게 무슨…….”

“널 위해서 제발 그렇게 해 달라 빌었잖아! 날 협박하면서!”

미카엘라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모나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벤트하임 공작 영애인 미카엘라와 그 가신 가문인 아이젠부르크 자작가의 라모나.

미카엘라는 공작가를 등에 업고 친구라는 이름 아래 라모나를 시녀처럼 부렸다.

1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악에 받친 라모나가 소리쳤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내가 너를 죽이려 했다고 모함을 해! 내가 널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메닝엔 공작…….”

“감히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어내 황후를 모욕해!”

라모나가 ‘그 일’을 입에 담으려 하자 황제 요하네스가 호통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미카엘라도 어깨를 떨며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라, 라모나. 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게다가 메닝엔이라니 그게 무슨…….”

미카엘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요하네스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죄인에게 재갈을 물리도록.”

소름 끼치도록 덤덤한 목소리였다. 마치 자신은 아무 관련 없는, 결백한 사람이라는 양.

라모나의 가슴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자신을 손에 넣고 싶어 음습한 일을 꾸민 주제에, 10년간 집착하며 삶을 망쳐 놓은 주제에.

그의 시커먼 속내를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이 원통했다.

까드득, 이를 악문 그녀가 소리쳤다.

“이 개 같은 새, 으읍, 읍.”

퍽!

라모나가 황제의 심기를 더 거스르기 전에 병사들이 그녀를 발로 걷어차 제압했다.

“꺄악!”

잔인한 광경에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걷어차인 배가 터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라모나를 더 아프게 한 것은 안심한 듯 숨을 돌리는 미카엘라였다.

가슴이 찢어지는 배신감이 몰려왔다.

10년간 자신은 그저 요하네스의 정부로만 산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미카엘라를 위해 일을 꾸미고, 미카엘라가 친 사고를 대신 뒤집어썼다.

……10년 전 ‘그 일’처럼.

친구니까, 네가 잘되면 나도 잘되니까.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탔으니까.

하지만 그 대가가 이런 죽음이라니.

황제의 정부, 그러나 황후의 충직한 심복. 라모나는 비참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철컹!

시퍼런 칼날이 벼락같이 떨어지던 순간, 그녀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제 잘난 맛에 살던 남자. 마지막 순간 떠올린 게 하필 그 남자라니, 우스웠다.

‘이게 내 죗값이로구나.’

순식간에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라모나는 매캐한 탄내가 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죽음의 냄새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멈춰 버린 그녀의 시계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 * *

제국력 847년 메닝엔 공작저.

“후.”

매끄러운 흑발의 남자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셔츠 앞판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아찔한 굴곡이 드러났다. 매일 아침 운동으로 만들어 낸 조각 같은 몸이었다.

우아하게 서류를 들추던 그의 이마에 작은 균열이 일었다.

“이런, 지겹기도 하지.”

듣기 좋은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서류에는 메닝엔의 이름을 팔아 한몫을 챙기려는 이들의 술수가 적혀 있었다.

남자가 이른 나이에 공작 위에 오른 이후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머저리들, 감히 누구의 것을 넘보는 건지. 그가 코웃음을 쳤다.

‘한 놈쯤 본보기로 잡을 필요가 있겠어.’

뭐가 좋을까. 상단의 파산? 아니면 사생아 문제를 터뜨려? 이런저런 수를 생각하던 그가 목을 죄는 단추를 하나 풀었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셔츠 앞섶이 툭, 하고 벌어지며 목울대가 보기 좋게 움직였다.

“이런 덜떨어진 놈들 때문에 이 몸이 신경을 써야 한다니.”

가뜩이나 영지에 자꾸 산사태가 일어나 주의를 기울이던 때였다. 사실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은 따로 있었다.

황태자 요하네스.

빛나는 금발과 옅고 푸른 눈동자. 항상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일명 제국의 천사.

하지만 남자의 생각은 달랐다.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유해한 변태 자식. 무엄하게도 남자는 제국의 황태자를 그렇게 정의했다.

‘어제는 그 음험한 놈이 게더른 백작가의 가든파티에 갔다지?’

또 무슨 일일까. 남자의 눈이 가늘어지며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요하네스가 벤트하임, 그 고자 놈들과 손을 잡은 것이 유독 신경에 거슬렸다.

벤트하임과 메닝엔, 제국의 기둥인 두 공작가는 최근 그야말로 최악의 관계를 달리고 있었다.

남자가 의도한 일이긴 했다. 구성원을 뭉치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의도는 의도고, 거슬리는 것은 거슬리는 것.

남자는 이번에야말로 벤트하임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아, 그러고 보니 거슬리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라모나 아이젠부르크. 미카엘라 벤트하임의 그림자에 숨어 자꾸 묘한 짓을 벌이는 그 여자.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못마땅한 남자가 눈썹을 까딱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피식, 작게 비웃음을 흘린 그는 서류를 던져 버렸다.

팔랑.

검술로 수련한 탄탄한 팔 근육 덕분일까. 서류는 제법 힘차게 허공을 가르며 날았다.

그러니까, 마침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공작저의 집사, 브리튼의 얼굴을 가격하기 충분할 만큼. 힘차게.

퍽.

“오, 이런.”

그가 서류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집사를 보며 눈썹을 까딱했다.

“그러게 노크를 했어야지, 브리튼.”

활짝 웃는 미소가 지나치게 예뻤다.

집사, 브리튼은 침착한 얼굴로 대답했다.

“……했습니다만.”

“그럼 허락이 떨어지고 들어왔어야지. 집사라는 자가 그런 것도 모르나?”

“죄송합니다. 선대 공작님 때에 습관이 든 바람에 그만 실수했습니다.”

“저런.”

남자가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아버님 때를 못 잊다니, 자네 노망이라도 난 건 아냐? 의사를 불러 줄까?”

“아닙니다, 각하. 괜찮습니다.”

걱정을 가장한 남자의 말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 묘한 신경전은 남자가 공작 위를 물려받던 날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그들 사이에는 암묵적 합의가 생겼으니까.

익숙한 신경전이 지겨웠던 남자가 기지개를 켰다.

매끈한 허리선을 따라 셔츠가 당겨지며 탄탄한 가슴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 노쇠하신 집사께서 아직 건강하다니 한시름 덜었군. 무슨 일이지?”

“서신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메닝엔 공작은 단연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었고, 그 덕에 공작저 대문에는 공작 부인 자리를 노리는 야심 찬 영애들의 서신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너무 잘난 건 역시 피곤한 일이다. 그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버려.”

“외람되오나, 각하. 한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남자가 눈썹을 으쓱했다.

그는 별 흥미 없다는 눈으로 서신을 빠르게 훑었다.

<로베르트 메닝엔 공작 각하께>

‘오셀튼 백작 영애? 보나 마나 사랑 고백이겠군.’

남자, 로베르트 메닝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나 레이디 오셀튼의 서신은 그에 대한 찬사로 시작했다.

각하의 깊은 눈에 빠져 헤엄치고 싶다느니, 그대의 모습을 상상하며 눈물을 흘렸다느니.

서신을 읽던 로베르트가 턱을 괴며 물었다.

“브리튼.”

“예, 각하.”

“내가 잘 몰라서 말인데.”

“말씀하십시오.”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눈물 흘릴 만큼?”

“…….”

“아무래도 내가 너무 치명적인 모양이야.”

로베르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

대답 없는 집사를 두고 로베르트가 흐린 눈으로 종이를 훑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미친.”

그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브리튼?”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한때 각하를 깊이 연모하였으나 앞으로는 각하와 베르나딘 황자님의 사랑을 응원하겠습니다……? 이 여자가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브리튼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대답했다.

“세간에 그런 소문이 도는 모양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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