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9화
산뜻한 미소를 지은 정안이 뒤돌아섰다. 그리고 곧바로 남편에게 속삭였다.
“나 괜찮았어?”
“아주 멋졌어요.”
“당신 회사에 피해 입히는 행동이었으면 어쩌지?”
선욱이 빙그레 미소했다.
“RS그룹이랑 협력할 일 없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설사 그럴 계획이 있었다고 해도, 우리 식구 될 사람을 저런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과는 일하지 않을 겁니다.”
정안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이가 저런 집에서 살았으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얼마 전, 정안은 시호와 만남을 가졌다.
시호를 보는 순간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예의 바르고 정중한 태도와 올바른 가치관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시호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웃음이 났다.
부전자전이구나, 싶어서.
정안도 남편인 선욱보다 연상이었다.
선욱은 두 학번 위의 대학교 선배였던 정안에게 한눈에 반했다.
친가가 대대로 군인 출신인 그녀는 행동 하나하나 각이 딱 잡혀 있고,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이었으며, 승부욕이 무척 강했다.
선욱의 눈에는 그런 그녀가 멋있게 보였다.
이따금 제 눈에만 보이는 귀여운 말과 행동에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난 연하랑은 안 만나.”
좌절한 것도 잠시,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안을 뒤쫓아 다니며 열렬히 구애한 끝에 선욱은 마침내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서로에게 존대를 하지만, 둘만 있을 땐 마치 대학 시절처럼 정안이 말을 놓았다.
선욱도 그게 편하다고 했다.
언젠가 아버지인 학윤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한 소리 들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아버지는 관대하게 넘어갔다.
“둘이 있을 때는 뭘 어찌하든 상관없지. 다만 타인과 함께 있을 땐 조심해라. 작은 언행도 트집 잡히면 크게 된다.”
“휴. 이제 다른 사람들 오니까 정신 차려야지.”
“그래요, 저런 사람 때문에 기분 나빠하지 마요.”
선욱이 제 팔짱을 낀 정안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흐음. 그런데 말이야. 지난번에 윤기가 허락받겠다고 찾아왔을 때 아버님께서 시호가 윤기보다 나이가 많은 게 걸린다고 하셨는데.”
정안이 눈을 빛냈다.
“당신이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런 이유로 반대하신 적 있어?”
선욱의 동공이 흔들렸다.
당황하지 않은 척해 보려 했지만 이미 들킨 뒤였다.
“있구나.”
“……없어요.”
“으음, 장 회장님 내외분 이쪽으로 오신다. 나중에 집에 갈 때 다시 얘기해요, 윤기 아빠.”
정안이 눈을 접으며 웃고는, 다가온 장 회장 부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선욱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쩐지 집에 가는 길이 무척 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일요일.
홀로 무영관에 들어선 윤기는 두리번거리며 시호를 찾았다.
“선배?”
높은 천장을 울린 목소리가 스르르 사라질 때까지 윤기는 시호를 찾지 못했다.
‘별채에 있는 건가.’
별채로 가기 위해 마루로 나선 윤기는 손에 봉투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시호를 발견하고는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찍 왔네? 아직 약속시간까지 이십 분 정도 남았는데.”
“빨리 보고 싶어서.”
시호를 끌어안은 윤기가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수련관엔 왜 온 거예요? 뭐 가져갈 거 있어?”
“아니, 그냥. 너랑 여기에서 있고 싶어서.”
그녀가 배시시 웃자, 윤기도 따라 웃었다.
손을 붙잡고 깍지까지 낀 두 사람은 천천히 무영관 건물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 처음 연교에 내려왔을 때 기억나? 우리 만나자마자 첫날 여기에 왔었는데.”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의 날씨, 온도, 습도까지 모두 기억난다.
마루에 나란히 발을 밟고 올라섰을 때의 감촉까지.
시호에게서 은은히 풍기던 깨끗하고 맑은 향기도 여전히 선명했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절대 잊을 수가 없는 날이다.
“어쩌면 그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너와 아주 많이 가까워지게 될 거라고.”
그 말에도 윤기는 동의했다.
다만 시점은 동의할 수 없었다.
중학교 때, 고등학생이던 시호의 경기를 본 순간부터 윤기는 알았다.
자신의 인생은 이 여자에게 귀속될 것이라는 걸.
“나는 아팠어. 결혼에 실패한 게.”
함께 발을 맞추어 걷는 그들의 머리 위로 적당한 양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그리고 무서웠어. 또 나를, 그리고 내 부모님을 상처 입힐까 봐.”
시호가 쓰게 웃었다.
“견딜 수가 없었지.”
윤기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결혼이라는 게 도피처가 아니라 똑같이 지옥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니까. 마음이 닫히더라.”
이렇게 아픈 건 앞으로 다시는 안 할 거라고.
담담한 목소리에 담긴 아픔에 윤기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런데 너랑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시호가 걸음을 멈추고 윤기를 보았다.
“그 사람과의 실패가 내 남은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걸 원치 않아.”
순간 윤기는 숨이 멎었다.
아닐 거라고, 자신이 잘못 이해한 거라고.
괜히 또 내게 유리한 대로 생각하다가 실망만 커질 거라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시호의 눈빛에는 자신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 시선을 도대체 뭐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사랑해, 윤기야.”
한두 번 들었던 말이 아닌데 지금은 평소와 다르게 들린다.
시호가 봉투에 담긴 것을 꺼냈다.
붉은색 면수건이었다.
- 始允
그들의 이름이 한 자씩 황금색 자수로 놓여 있었다.
시작할 시, 진실로 윤.
그녀는 윤기의 손목에 면수건을 묶었다. 꼭 커다란 나비가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호가 윤기와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나와 평생 함께해 줄래?”
그가 미간을 좁혔다.
꿈인가?
내 머릿속이 만들어 낸 환영인가?
선배도 그런 의미인가?
“제 귀에는…… 결혼을 하자는 말로 들리는데…….”
방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하는 표정을 보며 시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결혼해 주세요, 후배님.”
윤기의 동공이 천천히 열렸다. 검은 눈동자 안으로 빛이 가득 쏟아졌다.
“네 옆에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어. 그러니까…… 내 청혼 받아 줄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짙게 물들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면.”
그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정말 현실이라면.”
“응, 현실이야. 꿈 아니고 진짜.”
시호의 말에 그가 그녀를 와락, 강하게 끌어안았다.
“절대 못 물러요.”
그녀가 윤기의 등에 팔을 두르며 미소했다.
“응, 나도 무를 생각 없어.”
“결혼해 주세요, 선배.”
윤기가 시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나랑 결혼하자, 시호야.”
내 아내가 되어 줘.
그의 간절한 음성에 시호는 가슴이 뭉클했다.
윤기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잘 알기에.
자신과의 결혼을 얼마나 바라고 원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이제 연인이 아니라 부부가 되는 거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연인이자 부부가 되는 겁니다.”
윤기가 시호의 뺨을 감싸 매만졌다.
“행복하게 해 줄게요.”
그의 입술이 하얀 이마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선배가 외롭지 않게 늘 곁에 있을게.”
입술이 양 볼로 내려왔다.
“죽을 때까지 서시호 남편으로 살 겁니다.”
윤기의 입술이 시호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다.
***
날이 맑은 5월의 어느 날.
무영관 안뜰에서 시호와 윤기의 결혼식이 열렸다.
그야말로 잔칫날이었다.
단장과 주장의 결혼에 잔뜩 흥분하고 신이 난 단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결혼식장 만들기에 동참했다.
음식은 조리장인 영숙과 부조리장인 미연, 그리고 윤기의 집에서 오랫동안 가사를 도와준 강릉댁이 맡았다.
또한 미연은 일전에 약속했던 대로, 꽃도라지라 불리는 보라색과 흰색 리시안셔스로 부케를 만들었다.
“어머, 너무 예뻐요!”
부케가 등장하자, 신부대기실로 삼은 별채에서 탄성이 터졌다.
“단장님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
영숙의 말에 다들 격한 반응으로 동의했다.
“참고로 드레스도 제가 같이 가서 골랐답니다. 너무 잘 어울리죠? 하, 역시 내 안목이란.”
미연이 턱을 치켜들고 짐짓 잘난 체하듯 말하자 웃음이 터졌다.
“그래그래. 우리 부조리장이 한 안목 하지.”
“고마워요, 미연 씨. 여동생처럼 우리 시호 아껴 주어서.”
“당연하죠, 어머니! 시호는 진짜 제 동생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엄마와 미연이 서로의 손을 붙잡고 웃는 모습을 보며 시호도 따라 웃었다.
“꺅! 단장님, 너무 예뻐요!”
별채로 들어온 여자 선수들이 꺅꺅거리며 여고생처럼 소리를 질러 댔다.
“우와, 진짜 진짜 진짜 모델 같아요!”
“주장님 보면 기절하는 거 아냐?”
“단장님, 저희 사진 찍어요!”
사진은 무영관의 공사를 맡은 국 소장이 찍어 주기로 했다. 현장을 촬영하던 그는 사진에 푹 빠지게 되어서 거의 전문가가 다 되었다.
“자, 자! 그럼 단장님 양옆으로 앉아 주시고. 고개 오른쪽으로 더…… 그렇지!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시호와 선수들은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한 제이슨이 윤기와 포옹을 나누었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와야지요. 초대해 주셔서 정말 너무나 고마워요.”
제이슨이 감격에 찬 얼굴로 윤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신을 통해 도영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윤기는 두 손으로 제이슨의 손을 꽉 붙잡았다.
“두 분 자리를 비워 놨으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신랑이 직접 에스코트해 주다니, 영광이군요. 그런데 두 사람이라니……? 로건은 오지 못한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 혹시 전달이 제대로 안 되었나요?”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 제이슨을 보며 윤기가 작게 미소했다.
“제이슨의 옆자리는 도영이를 위해 비워 놨습니다.”
말문이 막힌 제이슨은 목이 메어 왔다.
마른세수를 한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결국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와 주었겠죠?”
윤기의 말에 제이슨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윤기 형아 결혼하는 날이니 자기가 더 신이 났을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했다.
“저희 부모님과 같은 테이블이십니다. 제이슨을 정말 만나고 싶어 하셨어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제이슨이 울면서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요! 저도 기 선수의 부모님을 만나 뵙고 싶군요.”
윤기는 제이슨을 테이블로 안내했고, 그의 부모님과 제이슨은 마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대화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기는 별채로 시선을 옮겼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