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79화 (79/81)

외전. 제08화

윤기에게는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올라간다고 했지만.

오후 네 시.

시호는 벌써 연교 근처에 다다랐다. 붉은 SUV는 아파트로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벌써 세 번째 방문하는 한정식 레스토랑 ‘연가’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올 때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제일 고급스러운 방을 이용하게 되었다.

조만간 윤기와 함께 와서 다른 방도 이용해 봐야지, 생각하며 시호는 직원의 뒤를 따랐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톡, 톡 울리는 마루의 감촉이 좋았다.

“주문은 일행분이 오시면 하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탁. 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후우.”

심호흡을 한 시호는 대련을 하기 전처럼 무릎을 꿇고 정좌했다.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왔다.

이번에도 하던 대로 하면 돼.

“일행분께서 오셨습니다.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밑으로 뻗은 이마와 콧날이 무척이나 수려한 남자가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호는 고개를 숙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을 받고 놀랐습니다. 조금 긴장하면서 왔습니다.”

선욱이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 앉자, 시호도 맞은편에 착석했다.

“할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시호가 예, 하고 고개를 숙였다.

내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하자.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후우. 작게 숨을 내쉰 시호는 단전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어 선욱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윤기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혼 경험이 있는 저보다는 다른 좋은 집안의 초혼인 사람과 만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시댁까지 얽혀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자신보다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선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가운 말이면서도 아쉬운 말이기도 했다. 이런 눈빛을 가진 사람은 만나기가 참 힘든데.

“하지만 윤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제가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안심인지 낙담인지 모를 표정을 짓던 선욱이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윤기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늘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인데, 윤기는 그게 자신이 바라는 전부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요소라면서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시호는 오늘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결심했다.

두려워하며 피하지 않겠다고.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인정해 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시호가 고개를 숙였다.

“윤기와는 헤어지지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나도 못 당하겠군요.”

시호의 정수리를 바라보고 있던 선욱이 한숨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서 단장님은 우리 윤기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선욱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정한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말이지요.”

“……죄송합니다.”

“서 단장님 말대로, 집안 입장에서 보면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초혼인 쪽이 낫겠지요.”

시호는 침묵했다.

“하지만 우리도 윤기의 행복을 누구보다도 바라는 사람입니다. 윤기에게 필요한 사람은 집안에서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 마음에 담긴 사람이겠지요.”

“그, 그럼…….”

시호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제 아버님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선욱이 미소를 지었다.

“아내도 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 지금…… 허락을 받은 거야?

윤기의 부모님께?

“서 단장님은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우리 윤기에게 와 줘서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일전에 실례되는 말을 한 것,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선욱이 고개를 숙이자 시호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러지 마세요, 대표님.”

“곧 대표님이 아니라 다른 호칭으로 불릴 수 있겠지요?”

시호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시야가 희뿌예졌다.

예전에는 아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린다고 해서 별명이 ‘얼음꽃’이었는데.

요즘은 참 많이 울게 된다.

“어이쿠, 이걸로 눈물 닦으세요! 서 단장님 울린 거 윤기가 알면 난리 납니다. 벌써부터 등골이 오싹해지는군요.”

선욱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건넸다.

“감, 사합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시호를 보니 꼭 학생처럼 느껴졌다. 선욱은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앞으로도 우리 윤기 잘 부탁드립니다. 단장님 만난 이후로 녀석이 전보다는 따뜻해진 것 같아요. 웃음도 많아지고.”

생전 연락 한 번 없던 녀석이 이따금 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주말에 선물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시호의 코칭이라는 것을 저와 아내 모두 쉽게 눈치챘다.

집에 온 윤기는 가끔 정원에 나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참 맑게도 웃었다.

그간 성적과 기록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을 아들에게 제대로 말 한마디 못 붙였던 선욱과 정안은 섭섭하면서도 내심 안심이 되었다.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윤기가 마음을 터놓을 상대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대표님.”

“음, 그럼 우선 그것부터 시작할까요?”

시호가 선욱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호라고 불러도 될까?”

“네, 얼마든지요.”

“시호는 아직 어색할 테니까 마음의 준비가 되면 불러 줘. 아버님이라고. 하하.”

선욱이 눈을 접으며 웃는 모습이 윤기와 똑같았다.

시호도 그를 따라 웃었다.

***

그로부터 며칠 뒤.

선욱은 아내인 정안과 집안끼리 잘 알고 지내던 경영인에게 초청을 받아, 한 기업 창립기념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RS그룹의 안주인인 명현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쪽은 GY화학 대표님 내외분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기선욱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입니다.”

“이정안이라고 합니다.”

GY화학이라는 말에 명현이 눈을 고쳐 떴다.

전 며느리가 현재 만나고 있는 검도선수의 부모님이었다.

그 검도선수는 큰아버지가 야당인 민성당 대표 기민욱이고, 대대로 연교에 뿌리를 내린 명문가 집안 출신이라고 들었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학자인데, 정계에 포진한 여야의 굵직한 의원들이 모두 그 조부의 제자라고 했다. 대통령까지 신년과 연말에 직접 고른 선물과 함께 메시지를 보낸다나.

‘여우 같은 것.’

어쩜 그 애는 조건 좋은 남자만 쏙쏙 골라서 잘도 홀린다.

저만 바르고 의롭다는 듯한 전 며느리의 건방진 눈빛을 떠올리자 명현은 속이 더부룩해졌다.

“안녕하세요, 진명현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선욱과 정안 역시 명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안부를 묻고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얘기 들었습니다. 요즘 마음고생이 아주 심하시다고.”

명현이 짐짓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지요. 앞서 겪어 보았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 아이, 보통내기가 아니지요?”

명현이 한숨을 쉬었다.

“얌전하고 예의 바를 것 같지만, 조곤조곤 말대답도 잘 하고 상대방을 은근히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속으로 깎아내리지요. 저희 집 식구였을 때, 참 많이 무서웠답니다.”

“…….”

“아들이 원하니까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지만.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너무 나니까 서로 녹아들지 못했어요.”

명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들 녀석 마음은 또 어찌나 단단히 틀어쥐고 있던지……. 재계에 저희만큼 화목한 가족이 또 없었는데, 사람 하나 잘못 들이니 집안에 균열이 생기더군요.”

명현이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기 대표님 내외께서는 저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립니다.”

명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선욱과 정안이 서로를 잠깐 바라보았다. 아내의 눈빛을 읽은 선욱이 입을 열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선욱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명현은 자신의 말이 잘 먹혀들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물론 당연히 선욱의 집안에서 반대하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말로 인해 시호가 더욱 거센 반대에 부딪쳐 고통스러워할 걸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다.

“하지만 저희는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을 듯합니다.”

“……네?”

선욱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명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저희가 본 시호는 정말로 바르고 올곧은 아이입니다. 하루빨리 식구가 되는 것이 기다려질 정도로요.”

“세상에, 벌써 그 아이 수작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군요! 하긴, 저희도 처음엔 깜빡 속았답니다. 참 영악한 아이예요.”

명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선욱의 곁에 다소곳하게 서 있던 정안이 나긋나긋한 말투로 얘기했다.

“아무래도 수준 차이가 나다 보니 저희 대화가 서로 녹아들지 못하나 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희 아버님 가르침이 워낙 엄격하셔서요. 타인을 대놓고 욕하는 사람보다, 자신은 선한 척하면서 은근히 상대방을 돌려 깎으며 평가절하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자리를 피하라고 하셨거든요.”

조곤조곤한 목소리만 들으면 언뜻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똑같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도 모기처럼 해로운 벌레와 대화를 시도한들 통하겠느냐면서요.”

“모, 모기!”

명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데 반해, 정안은 마치 시 낭독을 하는 듯 차분한 모습이었다.

“혹시 무학대사를 알고 계십니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명언을 남기셨는데. 이성계와의 일화를 한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추천드립니다.”

“저, 저, 저……!”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모기와 이만치 길게 대화한 것을 알게 되시면, 저희 아버님께서 대로하시거든요. 여보, 가죠?”

정안이 싱긋 웃으며 선욱의 팔짱을 끼었다.

윤기에게 강한 정신력과 승부욕을 물려준 것이 바로 정안이었다.

아들에게는 어릴 적부터 ‘내 사람을 건드린 것은 나를 건드린 것이다’라는 마인드를 장착(?)시켰다.

[누가 윤기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그건 곧 윤기를 함부로 대한 것과 마찬가지야. 그럴 땐 반드시 몇 배로 되갚아 주어야 해. 알겠니?]

[네, 엄마.]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누가 윤기의 소중한 사람에게 잘 대해 주면, 몇 배로 보은해야 해.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단다.]

“저희 며느리 될 아이에게 미련과 집착 그만 버려 주시고, 여사님과 닮은 아가씨를 찾아서 아들과 짝지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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