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7화
“주말에 집에 내려가려고 해.”
윤기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집이라면…… 선배의 본가 말입니까?”
“응.”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내일 가지고 내려갈 선물을 준비하면 되겠다.
머릿속으로 드레스룸에 걸린 슈트를 헤집고 있던 윤기.
“훈련 잘 받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들뜨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
함께 가는 줄 알았다.
그녀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당장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도, 따님의 곁에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마음을 시호가 안다면 분명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이미 충분히 복잡할 테니까.
치미는 마음을 꾹 누른 채 윤기는 겨우 입술을 뗐다.
“조심히 다녀와요.”
언젠가 함께 갈 날이 오겠지.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
“응. 오전에 가서 저녁에 올라올 예정이야.”
시호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너 훈련 끝나고 볼 수 있어.”
늘 예쁘다 생각했던 웃는 얼굴이 지금은 조금 야속하게 느껴진다.
마른세수를 한 윤기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다행이네요.”
실은 전혀 다행이지 않지만.
시호를 끌어안은 윤기가 그녀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도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자꾸만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가 버릴 것만 같다.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이 마음은 잘못된 것일까.
‘기다리겠다고 해 놓고선.’
자신의 인내심이 이다지도 약한지 그는 처음 깨달았다.
시호가 결혼을 했을 때도 평생 기다릴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참을성이 바닥나 버린 기분이다.
‘같이 가자고 말해 볼까.’
그러나 곧 마음을 접었다.
시호에게 아이 같다는 인상을 남기기는 싫었다.
대신, 다른 식으로 섭섭한 마음을 표현했다.
“하으…….”
윤기는 시호의 귀를 물었다.
티셔츠 안으로 스르르 사라진 커다란 손이 척추를 타고 올라가 호크를 탁 풀었다.
곧 다가올 흥분을 예감한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손이 앞으로 넘어와 살결을 부드럽게 감싸자, 시호가 매달리듯 윤기의 어깨를 붙잡았다.
“윤기야.”
침실로 들어가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오늘은 시호의 뜻대로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허리를 붙잡은 윤기는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려 우드테이블 위에 앉혔다.
그녀의 가는 다리를 제 허리에 감은 윤기가 티셔츠와 속옷을 위로 올리고 고개를 내렸다.
“아……!”
시호가 윤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그는 자신이 약한 곳만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몇 번이나 신음을 흘리던 그녀는 결국 감각의 끝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몽롱하게 풀린 동공과 살짝 벌어진 입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의 옷깃을 꼭 붙잡고 있는 시호는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지금 당장 사랑을 나누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정도로.
윤기는 한 손으로 시호의 머리를 끌어안고 남은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읏……!”
뻐근한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와 시호를 덮쳤다.
“유, 윤기야, 침대로…….”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윤기가 시호의 허리를 안아 제게로 더욱 당겼다.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잠깐…….”
그가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참아.”
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윤기가 움직일 때마다 시호는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야가 바뀌었다.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윤기가 그녀에게로 깊이 다가왔다.
하얀 손등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지며 마디마디를 얽었다.
아무 데도 도망가지 못한다는 듯이.
시호의 뺨을 감싸 고개를 돌린 윤기가 곧바로 입술을 겹치며 혀를 얽었다.
‘오늘따라 너무…….’
그로 인해 흔들리며, 시호는 생각했다.
오늘따라 윤기는 너무 집요하고 강했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단 한 순간도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따금 행위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런 적은 있지만, 오늘처럼 처음부터 몰아붙인 적은 없었다.
늘 부드럽게 움직이며 자신과 눈을 맞추었는데.
“아읏……!”
그의 불안이 느껴졌다.
그래서 시호는 할 수 있는 최대한 그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제 손 위에 겹쳐진 커다란 손을 꼭 붙잡으며, 윤기가 키스를 원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응했다.
마침내 그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하아, 하…….”
엎드린 시호를 일으킨 윤기가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갔다.
그리고 그녀의 위로 올라가 입술을 머금었다.
“음…….”
시호는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목에 감았다.
어쩐지 지금 윤기를 꼭 안아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또한 윤기 역시 제게 안기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키스를 마친 뒤.
옆으로 내려온 윤기는 시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시호는 결 좋은 흑발을 쓸어내렸다.
“윤기야, 무슨 일 있어?”
“…….”
“평소보다, 음, 거칠었다고 할까?”
곧바로 고개를 든 윤기가 다급히 물었다.
“아팠어요?”
“아니, 아니야. 안 아팠어. 그냥 네가 어쩐지 불안해 보여서.”
숨을 작게 들이마신 윤기가 시호를 제 품에 꽉 끌어안았다.
“거칠었다면 미안해요.”
“아냐. 평소보다 조금 그렇다는 거였지, 나쁘지는…… 않았어.”
오히려 쾌감이 더 증폭되었다고나 할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부끄러워서 이 말까지는 할 수 없었다.
“윤기야.”
그녀의 목소리가 다정해서 윤기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기다리기로 결정했으니.
기다리자.
보채면 시호는 지칠 거고,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을 포기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윤기는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냥…… 세게 안고 싶었어요.”
그의 품 안에서 시호가 배시시 웃었다.
“그랬구나. 사실 나도 가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어. 네가 새삼스럽게 잘생겼다고 느껴지거나, 아니면 샤워하고 나왔을 때.”
조곤조곤 말하던 시호의 턱이 들렸다.
윤기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왜! 얼굴 안 보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시호가 고개를 숙이려 하자, 윤기가 그녀의 뺨을 감쌌다.
“사랑해.”
잠들기 전에 늘 듣던 말인데.
오늘따라 윤기의 목소리가 더욱 진하게 와닿는다.
“응. 나도 사랑해, 기윤기.”
그녀의 대답에 비로소 윤기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리고 평소대로 매끈하게 되돌아왔다.
“토요일에 저녁 먹고 올라올 거죠?”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아빠랑 같이 식사한 지 너무 오래돼서.”
“당신 부모님께서 날 본다면 좋아하실까요?”
“당연하지. 겉으로 막 티를 내시지는 않겠지만, 두 분이서 계실 땐 엄청 칭찬하면서 좋아하실 거야.”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야. 잘생겼지,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졌지, 자상하지, 다정하지.”
시호가 쪽, 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좋아하실 거야, 분명. 우리 부모님 안목, 나랑 완전 똑같거든.”
그녀의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섭섭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크기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사랑해요, 선배.”
“나도.”
“사랑한다, 시호야.”
시호가 작게 웃었다.
“나도 사랑해, 윤기야.”
수줍은 답변에 윤기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언제부터인가 시호는 사랑한다는 말에 ‘나도’라고만 답하는 대신 ‘나도 사랑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호가 자신에게 녹아드는 것이 기뻤다.
온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훨씬 더.
“그런데 이제부터 번쩍번쩍 안아 들지 마. 알았지? 부상은 예고 없이 별안간에 오니까.”
자, 약속.
시호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귀여워.’
윤기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와 새끼손가락을 얽었다.
이 사람을 닮은 아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윤기는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멈칫했다.
시호가 원하지 않기에 아이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이런 생각도 부상이 생기는 거랑 똑같을까?
예고 없이, 별안간에.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정말로 시호를 닮은, 그녀와 자신의 아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윤기는 이 또한 가슴에 묻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언젠가 반드시 그런 날이 오기를 빌며, 윤기는 시호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
“저 왔어요.”
시호는 짙은 녹색의 철로 만들어진 대문을 넘어 작은 뜰 안으로 들어섰다.
부모님은 여느 때처럼 미리 나와 계셨다.
“안에서 기다리시라니까.”
“바깥 공기도 쐴 겸 겸사겸사 나온 거야. 오느라 고생했지? 얼른 들어가자.”
아빠가 시호의 손에 들린 것을 일부 받아 들었다.
곧장 부엌으로 들어선 시호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집에 오면서.”
“윤기가 드리는 것들이에요.”
멋쩍은 표정을 지은 시호의 볼이 조금 붉어졌다.
“제가 사 오려고 했는데, 굳이 자기가 준비하겠다면서.”
“어머, 어쩜.”
“이건 한우고, 이건 윤기네 집에서 직접 담근 청이랑 떡이래요. 저건 산삼 달인 물이고, 그리고 저건 제주도에 있는 집안 소유 과수원에서 올라온 귤이고요.”
엄마 아빠의 눈이 커졌다.
“아휴, 많기도 하다.”
“이거 고맙고 미안해서 어쩌지?”
“부담 갖지 마시라고도 꼭 전해 달라고 했어요. 더 해 드리고 싶은데 무거우니까 일단 이것만 보낸다고.”
시호는 괜히 부모님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부모님은 기사를 통해 저와 윤기 사이를 알게 되셨다.
미리 말씀을 드리려고 했지만, 그러기 전에 기사가 터지기도 했고.
또, 아직 딸의 이혼으로 인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충격을 안겨 드리기는 싫었다.
그리고 아주 깊숙한 곳에 감추어 놓은 속내는…….
자신과 윤기가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확실하게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다.
검도를 평생 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처럼.
또한 자신이 결혼과 이혼을 하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다시 한번.”
“괜찮다. 다 자기만의 적합한 때가 있는 법이지.”
아빠의 말에 시호는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언제나 자신을 믿어 주고 묵묵히 응원해 주는 부모님의 사랑이 다시금 깊이 느껴졌다.
“시호 넌 어릴 때부터 뭐든 척척 알아서 했지. 엄마 아빠가 키웠다고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저 믿고 따를 거란다.”
“엄마…….”
마치 자신의 마음을 꿰뚫은 듯한 엄마의 말에 시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네 마음이 따르는 대로 해. 우리 딸은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했으니까.”
부모님 앞에선 잘 울지 않는 시호지만 지금만큼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빠가 시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간 많이 힘들었지? 엄마 아빠 앞에선 그렇게 참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시호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릴 적에도 이렇게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은 아무 말 없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딸을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