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6화
진지하게 대답하던 윤기의 얼굴이 지금의 시호와 꼭 닮았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미연은 흐뭇한 표정으로 시호를 보았다.
이런 시커먼 속내도 모른 채, 시호는 진지하게 드레스를 골랐다.
“저는 이게 괜찮아 보여요.”
시호가 고른 디자인은 몸에 달라붙어 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스라인 드레스였다.
“어머, 너무 예쁘겠다! 우리 시호는 키도 크고 몸매도 좋으니까 엄청 예쁠 거야.”
“두 분 모두 안목이 좋으세요. 제가 필요가 없는데요?”
선진이 정말로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고객님께서 고르신 이 드레스는 특히 소규모 예식에서 진가를 발휘해요. 눈에 확 들어와서 시선이 전부 신부에게 집중되거든요.”
소규모 예식이라.
어제 윤기의 말을 듣고 잠시 잠깐 생각해 보기는 했다.
만약 윤기와 결혼을 한다면 어떤 형태일까?
사람을 많이 초대하는 것은 싫었다. 우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만 초대하여 조촐하게 치르고 싶었다.
장소는 오직 한 곳이었다.
무영관.
제 삶의 출발점이 된 소중한 곳.
자신을 위해 주는 사람들과 땀 흘리며 울고 웃던 보금자리.
“그럼 한 분씩 입고 나오시겠어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시호야, 먼저 입어 봐.”
“아니에요, 언니 드레스 고르러 온 건데요.”
“내가 긴장되어서 그래. 응?”
미연이 시호의 팔짱을 끼고 애원하듯 입술을 내밀었다.
“알았어요. 그럼 먼저 입고 나올게요.”
“고마워, 우리 단장님!”
결국 시호는 선진과 함께 탈의실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꺼낸 미연이 후후, 하고 웃었다.
“도윤아, 엄마가 세계 최고의 검도선수를 스승님으로 모셔 갈게.”
붉은 벨벳 커튼이 열리고.
어깨를 훤히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시호가 나타났다.
“헉…….”
미연은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입을 떡 벌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시호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미연 자신도 시호에게 반할 것만 같았다.
“와…… 시호야, 너무 예쁜 거 아니야?”
“그런가요?”
시호가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작게 미소했다.
“응. 진짜 너무너무너무 예뻐. 꼭 모델 같아. 어쩜 그렇게 잘 어울려?”
세상에! 미쳤어, 미쳤어.
넋을 놓은 미연이 계속해서 탄성을 내지르자 부끄러워진 시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저희 카탈로그 모델보다 훨씬 소화를 잘하시는데요. 이 드레스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이에요.”
선진도 감탄해 마지않았다.
시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잘…… 어울리나?
제 눈에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사실 이런 과감한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싶었다.
다시는 드레스를 입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머, 내 정신 좀 봐! 시호야, 여기 좀 봐 봐.”
정신을 차린 미연이 얼른 휴대폰을 들고 여러 각도에서 시호를 찍어 댔다.
“세상에, 뒷모습도 너무 예뻐! 시호야, 그냥 언니랑 결혼할래? 도윤이랑 셋이 행복하게 살자.”
시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용진 선배가 들으면 울 거예요, 언니.”
“그 인간이야 울든 말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어머머, 옆모습도 예술이야!”
찰칵찰칵.
미연은 눈을 빛내며 사진을 마구 찍어 댔다.
얼굴이 빨개진 시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허, 고개 들어야지!”
“언니, 이제 그만 찍으면 안 될까요?”
“원장님, 혹시 이 드레스와 어울릴 만한 부케가 있을까요?”
“어머, 그럼요. 저희가 가져다 놓은 샘플 조화 몇 개가 있거든요? 잠시만요!”
선진도 자신의 드레스를 찰떡같이 소화하는 고객을 만나 아주 신이 났다.
“시호야, 지금 이대로 식장에 들어가도 되겠다. 넌 얼굴도 워낙 예쁘고 자세도 곧고 우아하니까 별다른 거 안 해도 될 거야.”
호호, 우리 기윤기 주장님이 보면 혼이 빠져나가겠네, 빠져나가겠어.
미연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갈아입을까 봐요.”
“나랑 같이 사진 찍어야지! 나 드레스 입고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줘.”
선진이 보라색 조화로 만든 부케를 들고 왔다.
“이건 도라지꽃인데요, 신부님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미연이 와아, 하고 감탄했다.
“도라지꽃으로 만든 부케는 처음 봐요.”
“예쁘죠? 도라지꽃은 서로에게 기대어 의지하기에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랍니다.”
시호는 꽃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서로 의지하기에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꼭 자신과 윤기를 빗대어 표현한 것처럼 느껴졌다.
영원한 사랑.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여겼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한결같은 윤기의 마음이 그렇다.
그는 꼭 나무 같았다.
그 자리에 깊이 뿌리를 박은 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서 있는 모습이.
차갑고 세찬 비를,
때론 자신을 낱낱이 비추어 버겁게 느껴지는 태양을,
심지어는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마저 온몸으로 감싸 주는 그의 사랑에 시호는 다시 한번 감사를 느꼈다.
“그럼 나도 갈아입고 올게!”
미연이 붉은 벨벳 커튼 안으로 사라졌다. 기다리는 동안 시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색하지만 이상하지는 않다.
‘윤기도 보면 좋아해 줄까?’
사진을 찍을까, 했지만 어쩐지 쑥스러워서 그만두었다.
미연이 차고 넘치게 찍었으니까, 나중에 보내 주면 그걸 보여 줘야지.
“어때? 시호만큼은 못하겠지만.”
엎어 놓은 튤립 모양의 미니드레스를 입은 미연은 정말로 요정처럼 깜찍하고 사랑스러웠다.
“와. 너무 예뻐요, 언니. 용진 선배가 보면 다시 한번 반하겠어요.”
“꺅, 정말? 그럼 나도 사진 좀 찍어 줄래?”
고개를 끄덕인 시호가 미연의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어떤 각도에서 찍어도 무척이나 예뻐서, 아까 미연이 그렇게 셔터를 눌러 댄 건가 싶었다.
“원장님, 저희 둘이 찍어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선진이 웃으며 두 사람을 화면 안에 담았다.
닮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자매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자! 하나, 둘, 셋!”
미연은 드레스를 두 벌 더 입어 보았다. 그때마다 사진을 찍었음은 물론이다.
“시호야, 오늘 너무 고생했어.”
“고생은요. 저도 즐거웠는걸요.”
미연이 시호의 손을 잡았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시호가 다시 드레스를 입게 된다면 그땐 내가 부케를 만들고 싶어.”
“부케를요?”
“응. 내가 꽃꽂이도 좀 하거든.”
“와아. 언니는 정말 못하는 게 없네요.”
“도윤 아빠가 도장 운영하던 시절에 미래가 불안해서 이것저것 배워 뒀지.”
아마 시호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도장은 폐업했을 거고, 삶이 힘들어졌을 것이다.
“시호야, 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요즘 너무 행복해. 과분할 정도로. 오죽하면 매일 네가 있는 방향에다가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고 싶다니까?”
“저야말로 선배와 언니 덕분에 무사히 선수단 꾸려 나가고 있는걸요.”
말도 참 예쁘게 하지.
미연이 눈물을 글썽였다.
“가끔 생각해. 네가 힘들 때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고마워요, 언니.”
그녀의 진심이 느껴져서 시호도 뭉클했다.
“그러니까 부케는 나한테 맡겨 줘. 우리 시호만큼 예쁘게 한번 만들어 볼게.”
가만히 생각하던 시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만약에 하게 된다면, 부탁드릴게요.”
미연은 속으로 놀랐다.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하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할 줄 알았다.
윤기의 힘이었다.
그의 정성이 시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미연은 새로운 출발을 앞둔 그들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가자, 언니가 맛있는 거 사 줄게!”
***
다음 날.
부조리장인 미연과 주장인 윤기의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용진이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윤기를 보며 웃었다.
“주장님, 사진 잘 봤죠?”
“정말 감사드립니다.”
자신을 보는 윤기의 눈에 존경이 담긴 것을 느낀 미연이 호호호, 하고 웃었다.
“우리 도윤이도 주장님처럼 잘 자라 주면 참 좋겠네요.”
“최선을 다해서 지켜보겠습니다.”
미연이 윤기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엄청 예쁘죠?”
“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기를 보며 미연은 속으로 꺅, 소리 질렀다.
어머머, 왜 내가 떨리나 몰라.
“부케는 내가 만들어 주기로 했어요. 훈련 끝나고 시간 될 때 도라지꽃의 꽃말 검색해 봐요.”
윤기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미연이 만든 부케를 들고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시호를 볼 수 있을까.
표정이 어두워지는 윤기를 보며 미연이 작게 웃었다.
“머지않은 것 같아요.”
“……예?”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부탁한다고, 시호가 어제 그랬거든요.”
크게 벌어진 윤기의 동공이 흔들렸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내가 거짓말할 사람으로 보여요?”
정말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고?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윤기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같기도 하고, 감격에 겨운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시호가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옆에 있어 줄 거죠?”
윤기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나도 열심히 부채질할게요. 드레스 입은 시호, 꼭 다시 보고 싶거든. 얼마나 예쁘던지, 여자인 나도 반할 뻔했다니까?”
윤기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도 실물을 보고 싶었다.
얼마나 예쁠까.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자신의 아내가 되는 날의 시호는.
윤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꼭 내일 결혼식을 앞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걱정 마요. 도윤 아빠랑 내가 도와줄게.”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우리 사이에. 무영단은 가족이나 다름없죠.”
그 말 그대로였다.
무영단 사람들은 서로를 향한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시호가 언젠가 자신과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여지를 남긴 것만으로도 윤기는 힘이 났다.
평소보다 더욱 집중이 잘되었고, 기합이 들어갔다.
“…….”
선수들을 살피던 시호의 눈이 윤기에게 머물렀다.
‘한결같은 사람.’
시합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대회를 앞둘 때나 아닐 때나 윤기는 늘 한결같았다.
기댈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앞으로도 그러겠지.
우리 사이가 지금처럼 유지되든, 혹은 바뀌든.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던 시호는 조용히 수련관을 나와 별채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