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76화 (76/81)

외전. 제05화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고?”

비서의 보고에 재혁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떨어뜨릴 뻔했다.

“예. GY화학 기선욱 대표가 지인에게 ‘아들이 말을 안 듣는데, 자식을 어떻게 이기느냐’며 술집에서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재혁은 연교에 지사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그쪽에 사람을 자주 보냈다.

그가 보낸 사람이 하는 일은 주로 시호의 소식을 수집하여 전달하는 것이었다.

“언제?”

“그건 정확히 모르겠지만, 정황을 살펴보건대 기윤기 선수가 집안의 반대에도 결혼을 밀어붙이는 모양입니다.”

마치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모양새다.

“그런데 그 전에, 기선욱 대표와 사모님께서 만났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비서의 입에 담긴 ‘사모님’이라는 말에 재혁의 기분이 조금 풀렸다.

“시호는 뭐라고 했다던가?”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답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모님께도 했던 말이었다. 그저 죄송하다고, 잘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었다.

그녀는 아픈 상처를 되풀이할 모양이다. 어차피 기윤기 선수 집안에서 거절당할 텐데.

‘이제 내가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있는데.’

독립한 후로, 재혁은 부모님과 멀어졌다. 사나흘에 한 번씩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이 다였다.

모친인 명현이 매일같이 아들의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가 답장을 한 적은 드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의 행동은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본가에서 일했던 부산댁의 증언이 아니었더라면 재혁은 지금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단장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하지만 전무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셨죠. 그랬다간 사모님께서 더 경을 치실 테니까요.”

“어머니께서 언성을 높이는 분은 아닙니다만.”

부산댁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아무리 예전이라지만, 전무님께서도 검도를 하셨던 분이잖아요. 호면 너머로도 상대방의 투지가 느껴지는데, 하물며 가까이에서 얼굴을 맞대고 사는 사이는 오죽할까요.”

언제나 얌전한 태도로 음식만 만들고 있던 부산댁은 마치 선수 시절의 시호가 발산할 법한 기백을 풍기고 있었다.

“꼭 목소리가 거칠고 커야만 경을 치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혐오감과 미움은 충분히 전달됩니다.”

어머니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재결합해서 아이를 가졌을지도 모르는데.

아버지가 조금만 더 감싸 주었다면 지금쯤 시호는 못 이긴 척 제 품에 안겼을 텐데.

“……후.”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부모님을 향한 원망이 한없이 뻗어 나갔다.

“더 전할 소식은 없나?”

그때 재킷 안쪽에 넣어 두었던 비서의 휴대폰이 지잉-울렸다.

“어…….”

“무슨 일이야?”

“방금 전에 사모님께서…… 웨딩드레스숍에 가셨다는 보고입니다.”

재혁의 심장이 쿵-떨어졌다.

과거 시호의 말이 떠올랐다.

[글쎄. 내가 또 결혼할 일이 있을까. 한 번 해 보니까 더는 못 할 짓이더라.]

아냐, 시호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어.

재혁은 애써 희망적으로 머릿속 회로를 돌려 보았지만 본능은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시호는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릴 것이라는 걸.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런 것은 싫었다.

벌써 세간에는 말이 돌고 있었다. RS그룹에서의 거센 시집살이 때문에 시호가 견디지 못했다, 도대체 남편 놈은 뭐 한 거냐, 사모 얼굴 보니 은근히 뒤에서 멕이는 스타일이다 등등.

제 가족과 자신을 향한 욕이 태반이었다.

윤기와 시호가 해수욕장에서 찍힌 사진이 공개된 후로 반향이 컸다.

그가 아주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있는 구도였다.

재혁의 눈에도 시호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자신과 함께할 땐 한 번도 볼 수 없던 얼굴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윤기에게 남자로서 졌다는 생각이 들자, 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혁을 괴롭히는 것은 시호에게 용서받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협회장에게 전화 걸어요. 그룹 차원에서 대규모 후원을 하겠다고. RS그룹의 이름을 딴 장학금제도를 만들어도 좋겠지.”

시호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검도 꿈나무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최상의 수련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

자신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당장은 마음을 표현할 수 없겠지만.

분명 그녀도 고마워하며 자신을 용서할 것이다.

“국내 청소년 스포츠 유형 장학금 중에 가장 액수가 큰 제도의 두 배 정도 규모로 책정할 겁니다. 우리 그룹 체면도 있으니.”

재혁은 그렇게 마음의 짐을 덜고, 스스로를 용서했다.

***

퇴근 후.

미연과 시호는 드레스숍으로 향했다.

“고마워요, 단장님. 내가 너무 주책이지?”

“아니에요. 이런 자리에 저랑 같이 와 주셔서 기쁜걸요.”

“어머, 당연하지! 내가 우리 시호 아니면 연교에서 누구랑 놀아. 조리장님은 오늘 손자랑 데이트한다고 하셨고, 도윤 아빠한테는 지금 보여 주기 싫고.”

미연이 눈을 찡긋했다.

“당일에 짠! 보여 주고 싶은 거 있지. 아줌마가 너무 주책인가?”

시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라도 그러고 싶었을 거예요.”

“그치? 나이를 얼마나 먹든 여자는 여자니까.”

용진과 미연은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찍기로 했다.

무영단으로 새로 이적도 했고, 이적하자마자 전국대회 우승도 차지한 기념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무영단에 뼈를 묻을 거야. 그러니까 무영단의 성과에 따라 기념일을 만드는 게 맞지.]

미연은 드레스를 함께 골라 달라고 부탁했고, 시호는 기꺼이 응했다.

“어서 오십시오.”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했다.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윤미연입니다.”

“네, 확인되었습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사람은 고급스러운 응접실처럼 꾸며진 대기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메릴린 드레스숍 원장인 경선진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단아한 스타일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희 메릴린 드레스숍을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상담을 신청하셨는데, 맞으십니까?”

“네, 맞아요.”

“이쪽으로 앉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호와 미연은 선진과 마주 앉았다.

“어느 분께서 입으시는 걸까요?”

“저요. 리마인드 웨딩을 찍으려고 하거든요.”

“어머, 축하드립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스타일이나 색깔이 있으십니까?”

“음, 그냥 저랑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주시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차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꽃차, 허브차, 우롱차, 아메리카노, 모카라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미연은 꽃차를, 시호는 우롱차를 주문했다.

“리마인드 웨딩이라고 하셨지요? 결혼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올해로 7년째예요.”

“실례지만 아이는 있으신가요?”

“네. 여섯 살짜리 아들이 있어요.”

“어머, 너무 젊어 보이세요. 사실 전 신혼이신 줄 알고 너무 빨리 리마인드 웨딩을 준비하신다, 했는데.”

“어머, 원장님 영업 잘하시네요! 기뻐라.”

미연의 높고 맑은 웃음소리에 시호는 물론 선진도 따라 웃었다.

“고객님께서는 체구가 아담하고 성격도 밝고 웃는 모습이 화사하시니, 가슴 부분이 꽃 모양으로 표현된 벨(bell)라인의 미니드레스가 어떠세요?”

선진이 카탈로그를 펼쳐서 보여 주었다.

“요정처럼 사랑스러우실 거예요.”

“세상에, 너무 귀여워요! 이 거꾸로 된 튤립 모양이 특히 예쁜데요?”

“안목이 좋으시네요. 안 그래도 그 스타일을 추천하려고 했거든요.”

드레스를 고르는 미연은 꼭 결혼식을 처음 올리는 사람처럼 행복하고 설레어 보였다.

시호는 자신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창 드레스를 고르던 미연은 갑자기 시호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저기, 원장님. 이쪽은 제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동생인데, 어떤 스타일이 어울릴까요?”

“어, 언니.”

당황한 시호가 미연의 손을 붙잡았다.

“음, 고객님을 보자마자 머메이드라인이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키도 크고 늘씬하시니까 무척 우아하고 아름다울 거예요.”

“아뇨, 전…….”

“그럼 저희 둘이 같이 입어 봐도 되나요?”

“그럼요, 저희 홍보물에도 동석하신 1인에 한해 웨딩드레스를 입어 볼 수 있다고 명시해 놓았는걸요.”

시호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미연을 쳐다보자 그녀가 혀를 살짝 내밀었다.

“우리 시호가 드레스 입은 모습을 꼭 보고 싶지 뭐야. 우리 같이 입고 사진 찍자, 자매같이. 응?”

울망울망한 미연의 눈을 보고 있자니 쉽사리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전부터 귀여운 것에 약한 시호였다.

“……한 벌만 입어 볼게요.”

“야호! 그럼 시호 네가 원하는 스타일로 골라 봐.”

“네, 그러세요. 방금 제가 말씀드린 건 그냥 참고만 하시고요. 고객님께서 입고 싶은 디자인으로 선택해 보세요.”

시호는 카달로그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입고 싶은 디자인의 드레스라.

첫 결혼식 때는 원하는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지 못했다.

시모는 노출이 조금이라도 있는 드레스는 품위가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덕분에 시호는 목까지 칼라를 잠근, 살결이라고는 얼굴과 손밖에 보이지 않는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그건 드레스가 아니라 그냥 레이스로 온몸을 꽁꽁 싸맨 거였다.

[그런데 보고는 싶다. 선배가 드레스 입고 내 옆에 서 있는 모습.]

그냥 한번 입어 본다 생각하고 고른다면…….

“…….”

미연은 어느새 카탈로그를 진지하게 살펴보는 시호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이럴 때 보면 참 귀엽다니까.

사실 미연은 윤기와 모종의 계약(?)을 맺었다.

솔직히 윤기와는 제대로 말을 섞어 보지 못해서 좀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미연이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주장님, 우리 그이랑 저랑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찍을 예정이에요.”

“……축하드립니다.”

“드레스 고를 때 시호도 데리고 가서 한번 입혀 볼까요?”

좀처럼 감정을 내보이지 않던 윤기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신, 우리 도윤이 한번 봐 주세요. 기윤기 선수랑 시합하는 게 꿈이라네요.”

“얼마든지, 언제든지 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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