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75화 (75/81)

외전. 제04화

“그런다고 네가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니?”

가시 돋친 소연의 말에 민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어림도 없는 소리다. 한 번 좋은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간의 잘못이 녹아 없어지지는 않는다.

“민주야, 너 왜 이러는 거야. 응?”

“내가 스스로한테 부끄러워서 그래.”

“민주야.”

“한 번도 내가 날 좋아한 적이 없어서 그래. 당당한 적이 없어서 이래. 시호랑 어울리는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이젠 너무 늦어서 이래!”

민주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나, 이제 정말 제대로 살아 보려고 해.”

“…….”

“그리고 이건 명백히 네가 잘못한 거잖아. 그 게시글 하나 때문에 도대체 몇 명이 피해를 보고 있는 거야? 얼른 정정하고 사과문 올려. 지금 당장. 안 그럼 나도 캡처 화면 올릴 수밖에 없어.”

다시 한번 고성이 오갔다. 그렇게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소연은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면서 사과문을 게재했다.

“됐냐? 됐어? 너 때문에 난 이제 연교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니게 생겼어.”

“반은 나 때문인 거 인정할게. 하지만 잘못된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보다, 인정하고 사과하는 편이 더 좋다는 거. 언젠가 너도 알게 될 거야.”

“지가 언제부터 성인군자였다고. 너,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살아생전 다시는 보지 말자고!”

차에서 내린 소연은 문이 부서져라 세차게 닫았다.

“부서지겠네.”

시호가 뽑은 새 차와 비교하여 초라하다고 생각했던 이 차는,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구매한 중고차였다. 이 차를 살 때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었는지, 민주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안해. 주인인 내가 널 아껴 주지 않는데, 누가 널 아껴 주겠니.”

민주는 휴대폰을 꺼내어 단체문자방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시호에 대해 함부로 말한 거 사과할게. 거의 허위사실이 많아. 시호는 여우도 아니고 위자료 장사하는 애도 아냐. 내가 그런 식으로 유도해서 말한 거 인정하고 사과할 테니까, 너희도 헛된 말 퍼트리지 않았으면 해. 친구로서 마지막 부탁이야.]

민주는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목록에서 단체문자방이 사라졌다.

이 쉬운 걸, 그동안 뭐가 무서워서 못 하고 있었을까.

이제 자신의 곁에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남지 않았지만, 민주는 훨씬 홀가분해졌다.

제대로 한 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말자.”

그날 이후로 친구들에게 전화가 빗발쳤지만 민주는 받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져 또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시호를 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었다.

지금 민주는 어느 때보다도 평안했고, 스스로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여담으로, 소연이 글을 올린 이후 맘카페는 난리가 났다.

그간 소연에게 당한 이들이 전부 울분을 토해 냈다.

소연은 그들에게 일일이 사죄하러 다녀야 했고, 그녀 때문에 장사를 접은 반찬가게 주인은 다시 연교로 돌아왔다.

‘앞으로도 행복하기를. 그리고…… 언젠가 다시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빈 민주는 혹여 시호가 저를 발견하고 마음 불편해할까 봐 얼른 마트를 나섰다.

***

“선배, 우리 저것도 살까요?”

윤기가 가리킨 것은 무알코올 샴페인이었다.

“샴페인을?”

“기념할 만한 날이니까.”

윤기가 시호의 어깨를 감쌌다.

“우리 약혼했다는 거 본가에 알린 기념으로. 어때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별걸 다 기념한다. 그래, 기윤기가 귀여우니까 사지, 뭐.”

시호는 웃으면서 샴페인을 카트 안에 담았다.

“집에 가서 마셔 보고, 괜찮으면 수련관에도 몇 병 사다 놔야겠다. 가끔은 탄산수보다는 이게 좋을 것 같아.”

“애들도 좋아할 거예요.”

카트 안을 휘 훑어본 윤기가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제 거의 다 산 건가?”

“응, 필요한 건 다 샀어.”

“그럼 빨리 가요.”

“왜? 뭐 급한 일 있어?”

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둘만 있고 싶어서.”

“뭐야, 진짜.”

시호의 볼이 붉어지는 것을 본 윤기의 눈이 짙게 내려앉았다.

“농담 아닌데. 진지해요, 나.”

하루 종일 수련관에서 시간을 보낸 후 퇴근하고 나면 잠들기 전까지 겨우 서너 시간만 시호와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 그나마 주말에는 같이 오래 있는 편이지만.

곧 다가올 대회를 앞둔 요즘은 주말에도 특훈을 하기 때문에 둘이서만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장을 보고 나온 그들은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윤기는 내내 시호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시호의 집에 도착하여 냉장고 안에 사 온 것을 정리한 후, 두 사람은 샴페인과 잔을 꺼냈다.

“차가워서 다행이다.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중에 먹어야 하나 했는데.”

황금빛 액체가 찰랑거리며 잔 속으로 떨어졌다.

“건배.”

유리잔이 맞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퍼졌다. 무알코올이라고 해서 별 기대 안 했는데,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

“선수들도 좋아하겠다. 소주파인 감독님하고 용진 선배는 싫어하겠지만.”

조리장님과 미연 언니도 좋아하겠는걸.

“선배.”

반짝이는 액체를 바라보고 있던 시호가 고개를 들었다.

“응?”

커다란 손이 머리를 감싸더니 이내 입술이 포개졌다.

샴페인의 달콤하고 톡 쏘는 맛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이렇게 마시니까 더 맛있네요.”

입술과 입술 사이에 은사가 길게 늘어졌다.

쪽, 하고 다시 한번 입술을 맞댄 윤기는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듯 도톰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키스하는 와중에 시호의 손에 들린 잔을 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으음…….”

잠시 떨어진 입술 사이로 시호가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뜨겁고 달큰한 숨결이 넘어올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목울대에서 거친 소리를 낸 윤기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어 제 다리 위로 옮겨 왔다.

“이렇게 들지 말라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곱게 타박하는 시호가 너무나도 예뻐 보였다.

“네 몸 이제 공공재인 거 몰라?”

“서시호만 소유하는 사유재산이면 좋겠는데.”

하얀 목덜미에 키스하며, 윤기는 그녀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다소 높은 체온.

부드러운 살결.

움찔거리는 야하고 귀여운 몸짓.

두 사람은 점점 더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윤기야, 여기서 말고…….”

시호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얀 이마에 쪽, 키스한 윤기가 그녀를 안아 든 채 침대로 향했다. 키스가 격렬해질 때마다 옷가지가 바닥으로 하나씩 툭, 툭 떨어졌다.

“선배.”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반질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던 시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하으…….”

시호가 움찔거릴 때마다 윤기는 달래듯 연신 목덜미와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윤기가 움직일 때마다 깊은 나락에 빠졌다가 다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감각이 반복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윤기는 언제나 시호에게 더 깊이 다가가 밀착하고 싶었다.

아무도 그들 사이에 들어올 수 없도록.

그런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격렬하게 움직이게 되었다. 윤기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시호의 위에서 내려온 윤기는 팔베개를 해 주며 그녀와 마주 보았다.

“시호야. 괜찮아?”

윤기는 평소보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뺨을 감싸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으응…….”

그가 시호의 이마에 달래듯 짧게 입 맞추었다.

“오늘따라 더…… 강한 것 같아.”

“오늘따라 당신이 너무 예뻐서.”

시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젠 이런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내 얄미운 후배는.

“조금 더 있으면 실업대회네.”

지금은 12월.

내년 3월이면 전국실업검도대회가 열린다.

무영단의 목표는 단체부 우승, 그리고 남녀 개인전에서 각각 우승자를 배출하는 것이다.

“어때, 기분은?”

“그다지 좋지는 않아요.”

“왜?”

시호가 눈을 크게 뜨자, 그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시호는 이런 순간에도 나 말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 싶어서.”

아, 실수.

요즘 윤기와 둘이 있을 때면 검도대회 얘기를 많이 했던지라 무심코 나와 버렸다.

사랑을 나눈 뒤 침대에 누워 마주 보고 있을 때 적합한 대화 주제는 아니다, 확실히.

“미안. 나도 모르게.”

“지금은 나만 생각해 줘요. 평소에 다른 놈들한테 많이 양보하니까.”

윤기가 시호의 뺨을 감싸 살살 쓰다듬었다.

저만 봐 달라는 뜻이었다.

“윤기야, 만약 내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순간 커진 동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나도 평생 결혼하지 않겠지.”

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선배가 아니면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

“선배 곁에 계속 있을 겁니다. 평생.”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벗어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어쩜 이렇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쩜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다가갈 수 있을까.

이 과분한 사랑을 받을 때마다 문득 불안해진다.

자신은 윤기가 바라는 만큼의 사랑을 주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

어느 날 문득 지쳐 버린 그가 휭하니 떠나 버릴까 봐.

“윤기야, 너는.”

잠깐 침묵한 시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치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단박에 가라앉았다.

“……무슨 뜻이에요?”

“가끔 생각해. 난 과분할 정도로 네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데, 넌 어떨까. 만족하고 있을까, 하는.”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상황도 복잡하잖아.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좀 더…….”

“당신이 아니면 안 돼, 나는.”

윤기가 강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입니다. 당신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뭐가 어떻든 상관없어.”

머릿속에, 마음속에 이미 그렇게 굳어졌다.

나는 서시호가 아니면 안 된다.

“아직 과분하다고 느끼지는 못하나 봐.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윤기가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나 지금 좀 화났으니까, 당신이 달래 줘야 해요.”

“하아…….”

“내가 뭘 하든 다 받아 줘야 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혀가 미친 듯이 뒤엉켰다.

시호는 몇 번이고 저를 파고드는 윤기를 받아들였다.

아주 작은 틈도 벌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그를 붙잡고 끌어안았다.

새벽까지 사랑을 확인한 후에야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미약하게 피어오르던 불안은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윤기야.”

시호는 드물게 먼저 잠이 들어 버린 윤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굵은 팔이 제 허리를 단단히 휘감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입고 싶은 걸로 선택해도 될까?”

순간 미간을 찡그린 윤기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꼭 자신의 말에 대답한 것처럼 보여서 시호는 소리 죽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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