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3화
“어떻게 알았어?”
시호의 물음에 윤기가 얼굴을 구겼다.
“왜 바로 말하지 않았어요.”
“미안해서.”
안았던 팔을 푼 윤기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너무 미안해서.”
“뭐가 미안한데.”
“그냥 다.”
“선배가 미안해해야 하는 건 혼자서 아버지를 만나고 내게 얘기하지 않은 것, 그거 하나예요.”
시호는 그저 힘없이 웃기만 했다. 그 모습에 윤기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커다란 손이 하얀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시호가 눈을 크게 떴다.
“말씀드리고 왔습니다. 제 뜻은 변함없을 거라고요.”
“네 뜻이…… 뭔데?”
“결혼요. 제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서시호일 거라고.”
튀어 오른 심장이 가슴에 쿵쿵 부딪치는 기분이었다.
시호는 입술을 달싹여 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어, 어른들은 뭐라고 하셨어? 아니, 말하지 마. 나중에, 나중에 들을게.”
하얗게 질린 시호를 끌어안은 윤기가 진정시키려는 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많이 반대하셨지?”
“음.”
잠시 생각하던 윤기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응? 모르겠다고?
“허락하신 건 아닌데 반대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받아들여 주실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난 선배가 아니면 안 된다고 그저 알려 드리려고 간 것뿐이니까.”
시호는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선배?”
“고마워.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
윤기는 시호의 눈가를 부드럽게 닦아 냈다.
자신의 앞에서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점이 좋았다. 아프고 슬플 때도 그래 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멀어지려고 하지도 말고, 숨기려고 하지도 마.”
“흑…….”
“우리만 생각해요.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
윤기의 말에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가 품을 파고들자 윤기는 기꺼이 받아 주었다.
“뭐든 다 말하기로 해 놓고. 약속을 어겼네, 선배.”
“……미안.”
훌쩍이며 사과하는 시호가 귀여워서 그가 피식 웃었다.
강한 사람. 동시에 여린 사람.
언제나 시호의 곁에서 그녀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고 싶었다.
언제, 어느 때나 시호가 편히 기대어 쉴 수 있게.
“강요하지 않을게요.”
윤기가 시호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데 보고는 싶다. 선배가 드레스 입고 내 옆에 서 있는 모습.”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아름다울까, 자신의 신부가 되기 위해 드레스를 입은 시호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런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윤기는 믿었다.
여린 몸을 더 꽉 끌어안은 윤기가 별안간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놀란 시호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울보 시호 안아서 달래 주려고.”
“이렇게 번쩍번쩍 들지 말라고 했잖아!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그래.”
“내 여자 하나 들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그가 씩 웃었다.
“오늘 증명해야겠네요.”
“어, 얼른 안 내려? 진짜 다친다고!”
이번에는 윤기도 져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호가 계속해서 이번 일을 생각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당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매달리느니 차라리 신경을 다른 곳에 돌리는 것이 낫다.
윤기는 시호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그럼 다치지 않게 내려놔야겠네.”
그대로 침실로 향한 윤기가 시호를 침대에 곱게 내려놓은 뒤, 위로 올라갔다.
“이럼 되죠?”
“그건 그런데…….”
제 몸을 타고 슬금슬금 올라오는 손길이 야릇해졌다.
금세 얼굴이 달아오른 시호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윤기야.”
“이건 안 다치잖아요. 하게 해 줘, 응?”
입술이 겹쳐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옷가지가 침대 밑으로 툭, 툭, 떨어졌다.
이윽고 야릇한 소리와 함께 침대의 시트가 무참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살결이 맞닿자 시호는 달뜨는 동시에 안정감을 느꼈다.
윤기의 품에 안겨 있으면 어떤 고민도, 시름도 잊혔다.
시호는 제게 깊게 다가오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고 싶다던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 댔다.
***
사랑을 나눈 뒤.
시호와 윤기는 장을 보러 갔다.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모자를 눌러쓰고 옆 동네에 위치한 대형 마트로 향했다.
그곳은 민주가 사는 곳이었다.
마침 마트에 들른 민주는 함께 카트를 끌고 가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검은 캡모자를 맞춰 쓴 그들은 멀리서도 행복해 보였다.
시호가 고른 물건을 들고 뭐라 말하면, 윤기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따금 시호의 허리를 감싸 안기도 하고, 머리에 짧게 입을 맞추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다행이네.’
가슴이 쓰려 왔지만 그게 다였다.
예전처럼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 질투심이나 시기심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시호가 부럽긴 했다.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는 저 애는 언제 어디서든 환하게 빛났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시호가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민주는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저 애의 하루가 평안해서.
그저 운이 좋다고 치부하며 깎아내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현실이 나아지거나 자존감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았다.
민주는 백번 생각해도 지금의 자신이 훨씬 낫다고 느꼈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시간을 과거로 되감았다.
맘카페에 글을 올린 것이 소연이라는 게 밝혀진 후.
“각자 시간을 갖고 좀 진정이 된 후에 차분히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
“시호야, 네가 날 진심으로 생각해 줬다는 거 알아. 자격지심으로 꼬인 내 마음이 너를 힘들게 했다는 것도.”
“…….”
“소연이한테는 전화하지 않아도 돼.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게. 그럼 조심히 들어가.”
초밥집에서 시호와 헤어지고 차에 탄 민주는 심호흡을 했다.
선바이저의 거울을 보았다.
그 안에 담긴 자신의 모습은 추하고, 치사하고, 역겨웠다.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었었나?
그저 운이 좋다기엔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 낸 시호였다.
그것을 민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써 외면했다.
그 정도로 노력할 자신도 없었고, 성공한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자신도 없었다.
시호는 저를 진심으로 대해 주었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친구의 곁에 있고 싶었다.
왜? 시호가 좋아서?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자랑거리용으로?
……둘 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후자의 비중이 높아졌을 뿐.
“흑, 흐으윽.”
울음이 터졌다.
이것이 시호와의 마지막일 터였다. 나 같아도 나 같은 애를 친구로 두기 싫은데, 시호는 더하겠지.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온 걸까.
시호가 부러웠다면, 시호처럼 되고 싶었다면 그 애만큼 노력했어야 했다. 뒤에서 까 내리는 게 아니라.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리고 말았다.
눈물을 닦아 내던 민주는 심호흡을 하고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록 시호가 모를지언정 마무리는 확실히 지어야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한심하고 추악하게 살 수는 없었다.
- 여보세요.
까칠한 소연의 목소리에 흠칫한 민주는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좀 만나.”
- 너 지금 몇 시인지 알아? 나 애들 재울 시간이야.
“지금 안 만나면 너 고소당할지도 몰라.”
- 고, 고소?
“너희 집 앞으로 갈 테니까 20분 후에 나와.”
먼저 전화를 끊은 적은 처음이었다. 민주는 손끝이 떨려 왔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소연이 사는 아파트 정문에 다다랐을 때, 민주는 카디건을 걸치고 서 있는 소연을 발견했다.
민주가 갓길에 차를 세우자 부리나케 다가온 소연이 조수석에 올라타 문을 세게 닫았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고소라니?”
“맘카페에 올린 글 수정하고 사과해.”
“허! 너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그건 내 평판이 달린 문제…….”
“정정 안 하면 그동안 단톡방에서 네가 맘카페 임원들 씹은 거 캡처해서 올릴 거야.”
입을 떡 벌린 소연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미, 미쳤어, 인민주?”
“응, 나 미쳤어. 미친 채로 살았어, 내가. 그걸 이제야 알았네.”
“돌았구나!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왜, 서시호가 뭐라 그래? 돈 많은 제 시댁에 말해서 가만 안 둔다고 겁주디?”
처음 보는 민주의 단호한 모습에 꼬리를 내린 소연이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 거지? 민주야, 우리 남편 아는 사람 중에 기자가 있는데, 서시호가 협박한 거 기사로 내면…….”
“지금까지 우리가 시호 욕한 건 부러워서였잖아. 그렇게 되고 싶은데 못 되니까 깐 거지.”
정곡을 찔린 소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너, 너 무슨 그런 말을…….”
“그러면 안 됐는데. 시호를 욕하는 게 아니라 내 현실에 맞게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게 맞는데.”
자조하듯 중얼거린 민주는 눈에 힘을 주고 소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글 수정해. 네가 멋대로 오해한 거라고. 애들 상대로 하는 검도장이 아니라 프로 선수단이고, 선착순으로 죽도를 주니 어쩌니 하는 것도 다 네가 상대방 동의 없이 임의로 결정한 거라고.”
민주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 네가 사람들 실명으로 욕한 거 다 캡처해서 메일로 보내 뒀어.”
“미친년! 그럼 나만 죽을 것 같아? 너도 같이 욕했잖아!”
소연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야, 솔직히 네가 우리한테 욕해 달라고 서시호 소식 퍼 나른 거잖아! 기윤기 앞에서는 들이대지도 못하면서 뒤에서만 어떻게든 엮이려고 난리 치고!”
소연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지금 여기서 인정하지 못하고 또 도망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맞아. 나 잘못 살았어. 더럽고 치사하고 비겁했어. 근데 이제 안 그러려고.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더라.”
악귀 같은 얼굴로 소리치는 소연은 바로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친구라고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 없지, 우리 서로.”
“…….”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너도 잘못했고. 인정하자.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굳게 결심한 듯한 민주의 모습에 소연은 할 말을 잃었다.
민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제대로 살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