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제02화
윤기가 그녀를 불렀지만 생각에 빠진 시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는 이혼 소식을 전했던 그날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혼하게 됐어요.”
몹시 놀란 표정을 짓던 부모님은 이내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시호 네가 그렇게 결심한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래. 엄마 아빠는 너 믿어.”
비교적 담담하게 대화를 나눈 뒤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와 차로 향하던 시호는 키를 두고 온 것이 기억나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집 뒤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소리를 죽이고 걸어가니 엄마가 화단에 쪼그려 앉아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울고 계셨다.
부상으로 인해 검도를 그만두었을 때도, RS그룹에서 결혼을 반대할 때도, 전 시부모가 상견례 자리에서 은근히 무례하게 굴 때도.
엄마 아빠는 의연하고 담담했다.
딸이 속상해할까 봐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다가,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야 한숨이든 눈물이든 내보였을 부모님.
두 번째로 만난 사람도 집안에서 자신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면, 또 얼마나 속상해하실까.
“선배, 잠든 거예요?”
“으응, 피곤하네…….”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오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시호는 괜히 졸린 척 하품을 했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은 윤기가 여린 어깨에 입을 맞추고는 스탠드를 껐다.
윤기가 시호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속에서 시호는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다.
***
“긴기, 표정이 왜 그래?”
출근한 태홍은 로커의 문을 열어 둔 채 가만히 서 있는 윤기의 어깨를 툭 쳤다.
“뭐 두고 왔어?”
“아니.”
윤기는 생각에 잠긴 채로 고개만 흔들었다.
어제부터 시호가 이상하다.
정확히는 퇴근 후 협회장을 만나고 온 뒤부터.
자신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을 땐 그러려니 했다. 피곤할 테니까.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시호는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금방 피해 버리기 일쑤였다.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윤기의 눈에는 다 보였다.
왜일까.
이유가 뭘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평소 시호는 이따금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숨기지 않고 차분히 대화로 풀어 갔다.
‘나도 모르게 실수한 게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아침, 마 브라더스!”
라커룸의 문을 열며 수원이 경쾌한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좀 덜 시달렸다, 야.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기자들도 힘든가 봐.”
옷을 벗던 수원은 ‘아!’ 하고 윤기를 보았다.
“맞다! 긴기, 나 어제 아저씨하고 단장님 봤다?”
윤기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저씨?”
“너희 아버지 말이야.”
수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윤기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어디서.”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수원이 흠칫했다.
“어우, 너 목소리 그렇게 깔 때마다 무지 쫄려.”
“어디서 봤냐니까.”
험악한 윤기의 기세에 수원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어째 괜한 사달을 만드는 기분인데.
“부모님 모시고 한식집 갔다가 봤어. 왜, 미성동 쪽에 연가라고 엄청 커다란 한옥 식당 있잖아.”
윤기의 얼굴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버지를 만나고 온 뒤부터 시호가 자신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는다.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괘, 괜히 말했나?”
“아니. 고맙다.”
수원이 아니었더라면 시호가 왜 자신을 피하는지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쉽게 드러내려 하지 않으니까.
“…….”
아버지는 교양 있고 이해심이 넓은 분이었다. 시호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겠지만…….
심호흡한 윤기는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퇴근 후에 본가에 들렀다 와야겠군.’
***
“그간 자주 못 왔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조부의 서재를 찾은 윤기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는 학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훈련 때문에 바빴던 게지. 앉거라.”
부모님과 함께 널찍한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은 윤기는 학윤과 마주 보았다.
“몸은 건강하고?”
“예.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다행이구나.”
잠시 숨을 고른 학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누구를 만나고 있다고.”
할아버지의 말에 부모님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예.”
“이혼을 했다던데. 맞느냐?”
윤기는 학윤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음.”
조부의 얼굴에 언짢아하는 기색이 번졌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건을 맞추기보다는 되도록 네가 원하는 처자와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윤기의 부친인 선욱과 모친인 정안이 윤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의 미소에 윤기는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 번 다녀온 처자만 아니면 누구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농까지 했지.”
“…….”
“요즘 네 큰아비도 그렇고 주위가 시끄러운 것도 다 그 처자 때문이라는데. 맞느냐?”
상대방을 압도하는 형형한 조부의 눈빛에도 윤기는 눌리지 않았다.
“맞습니다.”
“집안을 시끄럽고 들끓게 하는 사람은 안 된다.”
“전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이전에 맺은 인연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사귀는 게 아니다.”
윤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건 상대측이지, 선배 잘못이 아닙니다.”
쯧, 하고 학윤이 혀를 찼다. 선배라는 호칭이 듣기 거북한 탓이다.
“너보다 나이가 많다고 들었다.”
“겨우 두세 살 차이입니다.”
윤기가 강한 의지를 담아 말을 이었다.
“집에서 반대해도 전 그 사람과 반드시 결혼할 겁니다.”
가족과 안 보고 살 각오도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유, 윤기야.”
정안이 놀란 표정으로 아들을 보았지만 윤기는 단호했다.
어릴 적부터 한번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관철했던 윤기다. 그 강한 의지를 늘 대견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학윤과 윤기는 눈싸움을 하듯 한 치의 양보 없이 강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았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깨고 먼저 눈길을 거둔 것은 학윤이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하다.”
윤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바로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다면 고려해 보마.”
할아버지가 이만큼 물러나 준 적은 아버지의 뒤를 잇는 대신 검도를 택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3년 안에 정상에 오를 자신이 없다면 여기서 그만두어라.]
그마저도 조건부였다.
윤기는 할아버지가 내건 조건을 훌륭하게 이행해 냈고, 그날부터 학윤은 손자의 길을 인정했다.
그러나 윤기는 결혼까지 할아버지가 내건 조건을 지킬 생각은 없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뭐라고?”
“그 사람은 이혼 후에 자신의 삶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아주 훌륭하게요. 집안에서 원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집안이 내건 조건을 지키는 것보다 시호를 지키는 것이 윤기에게는 훨씬 중요했다.
“그 사람이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아이를 가질 생각, 절대 없습니다.”
단호한 손자의 말에 학윤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허, 하고 짧게 탄식했다.
윤기가 자신의 뜻에 반발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모두 검도와 관련이 있었으니.
학윤에게는 참으로 애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집안의 대를 잇는 것보다 그 사람이 제게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윤기는 학윤의 눈을 직시하며 다시 한번 크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 사람과 결혼하겠습니다.”
이미 확고하게 굳어진 손자의 결심을 꺾을 재간이 없었다. 고집이 센 것도 그렇고,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윤기였다.
이대로라면 윤기는 집안과 인연을 끊고서라도 그 처자와 결혼할 것이 뻔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쉽게 허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번 다녀온 사람만 아니면 된다고, 학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하필 이혼한 사람을 마음에 들일 줄이야.
“넌 아직 젊고 시간은 많다. 인연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쉽게 결정하기는 이르다.”
한발 물러난 학윤이 달래듯 말했다.
“그래, 할아버지 말씀이 맞다. 조금 더 생각을…….”
선욱이 한마디 거들었지만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흘러도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윤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알려 드리려고 온 겁니다.”
“윤기야, 차분하게 더 얘기를 해 보자. 응?”
“제 뜻 분명히 말씀드렸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 저……!”
고개를 숙여 어른들께 인사한 윤기는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곧은 걸음걸음마다 강한 의지를 남겨 놓은 채 손자는 나가 버리고 말았다.
“제가 나가 볼게요, 아버님.”
정안이 아들의 뒤를 쫓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학윤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구나. 저 고집을 어쩔꼬.”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부친을 보던 선욱이 작게 웃었다.
“가족 중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죠, 윤기가.”
“웃을 일이 아니다. 저러다 정말로 덜컥 식이라도 올리면…….”
후, 하고 학윤의 입에서 드물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제 만나 봤다면서.”
“예.”
“어떠냐.”
“이혼했다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습니다.”
선욱의 말에 학윤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래?”
“예의 바르고 똑바른 아이더군요. 무엇보다 윤기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사랑만 가지고는 결혼생활을 헤쳐 나가기 힘든 법이다. 방패막이는 많을수록 좋아.”
선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때론 사랑보다 조건이 결혼을 견고하게 지켜 준다.
하지만 어제 시호를 만났을 때.
말은 그렇게 했지마는 선욱은 내심 아쉬웠다.
이혼 경력만 없었더라면 단박에 허락했을 정도로 시호가 마음에 들었다.
윤기가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못 이긴 척 꺾여 줄 의향이 있을 정도로.
“아버지, 윤기가 제게 해 될 사람을 가까이하지는 않잖아요. 결혼은 좀 그렇더라도 만나는 것 자체는 괜찮을 듯합니다.”
“음,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되바라진 아이는 아닌가 보군.”
학윤은 시호가 궁금해졌지만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스멀스멀 걱정이 피어올랐다.
이혼한 사람을 손자며느리로 맞아들일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어째 예감이 참.
“이번 제사는 더욱 정성껏 모셔야겠다.”
***
윤기는 시호의 집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니 단단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유하게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선배.”
안으로 들어선 윤기가 당연하게 시호를 당겨 안았다.
그녀에게서 늘 느껴지는 싱그러운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본가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시호의 몸이 흠칫 굳자, 윤기가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들었어요. 어제 아버지 만났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