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72화 (외전) (72/81)

외전. 제01화

연교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한식 레스토랑 ‘연가’.

시호는 GY화학의 대표와 마주 앉아 있었다. 언젠가 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 윤기와 만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윤기와 아주 많이 닮은 중년의 남자는 윤기의 부친인 기선욱이었다.

협회장과 볼일이 있어 만나러 갔다가, 마침 그곳에 방문한 선욱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선욱의 제안으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많이 놀랐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그러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송구합니다.”

“윤기 그 녀석이 부모에게 제 일을 미주알고주알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시호는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사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선욱이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왜 만나느냐고 다짜고짜 삿대질을 한 것도 아닌데 큰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죄를 지은 것인지도 모른다.

윤기의 집안은 대대로 뼈대 있는 명문가로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데.

자신이 파란을 몰고 와 버렸다.

“……면목 없습니다.”

전국체전 이후로 무영단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포츠 실업팀이 되었다.

시호와 선수들이 같이 출퇴근하는 사진이 심심치 않게 찍혔고, 무작정 인터뷰를 진행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많이 불편했지만 마냥 불평할 일도 아니었다.

검도를 향한 관심이 덩달아 높아지면서 후원도 늘었다.

협회장이 시호를 보자고 청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힘들겠지만, 이런 화제성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쉽다고.

시호와 무영단의 코치진, 그리고 선수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조금만 불편을 감수하면 검도를 하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게 많은 기회가 생길 터였다.

동시에 시호의 전 시댁과 윤기의 집안도 뜨거운 관심사였다.

RS그룹의 전 며느리와, GY화학 대표의 아들 간에 러브스토리라니.

누구라도 구미가 당길 만한 화젯거리였다.

한동안 GY화학의 홈페이지 접속이 불가능할 정도로 서버가 마비되고, 통화 연결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윤기의 큰아버지인 기민욱 국회의원 또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국회 출근길이 몇 번이나 막힌 적도 있었다.

“불편을 겪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요즘 검도계에 긍정적인 바람이 불어서 저도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저는 윤기의 삶에 지나치게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그건 그 아이가 결정할 일이지요.”

시호는 말없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윤기가 좋다는 사람이라면 저희도 마음을 열고 최대한 받아들이기로, 아내와도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욱이 물 한 모금을 넘겼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호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고막을 울리는 듯했다.

“서 단장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과분한 말에 시호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인내하며 견뎠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저도 윤기를 보면서 검도선수의 삶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특히 여자 선수는 더욱 힘들죠.”

선욱이 작게 미소했다.

“아들이 왜 서 단장을 택했는지 인정하게 됐어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작은 희망이 샘솟았다.

어쩌면, 어쩌면 나를 받아 주실지도 몰라.

작게 심호흡을 하던 그때.

“서 단장님 자체만 보면 무척 존경스럽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윤기의 짝으로 본다면…… 버겁다고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선욱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당황한 시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 아닙니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욱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늘 생각해 왔는데, 제 자식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못나고 부족한 사람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시호는 누군가 제 심장을 꽉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내 아들과 만나지 말라고 면전에 대고 욕하거나 물을 끼얹었더라면.

혹은 뺨이라도 내리쳤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이 모욕과 수모를 겪고도 포기하지 않을 만큼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명분이라도 내세울 수 있었을 텐데.

“…….”

이토록 정중하고 간절한 선욱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희는 아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풍파가 오지 않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 비껴가기를 바라고 있지요.”

풍파라는 말에 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RS그룹이라는 대기업과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일로 엮이는 것도, 그럼으로써 겪어야 하는 부정적이고 부당한 모든 것들도 너무나 염려됩니다.”

시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선욱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자신이라도 그럴 것이다.

아들이 여러모로 시끄러운 여자보다는, 그에게 안정과 평화를 줄 수 있는 여자와 만나기를 바랄 것이다.

“제 형님과 제 회사도 영향을 받고 있고요.”

무릎을 꿇은 시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불편을 겪게 해 드려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서 단장님 탓만은 아닙니다.”

“아뇨,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윤기가 이런 일에 휘말릴 일은 없었을 텐데.

시호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윤기와 헤어지지 못하는 것 또한 죄송합니다.”

아까보다 더욱 커다랗고 어두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식사를 들여온 직원이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고 나갈 때까지도 그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연애를 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것을 시호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혼은…… 장담을 못 하겠습니다.”

시호도 바로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당장 5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욱에게 기꺼이 ‘연애만 하겠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윤기를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윤기를 웃게 만들고, 행복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진심 어린 말에 선욱이 후우, 하고 숨을 길게 내쉬며 긴장을 풀듯 살짝 웃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는데, 일단 식사 먼저 할까요? 음식에 먼지 앉겠습니다.”

당장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이니만큼 더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시호는 생각했다.

연교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에 올 때마다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낀 적이 없다고.

***

“잘 다녀왔어요?”

윤기가 시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에게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응, 다녀왔지.”

“또 귀찮게 굴었겠군요.”

협회장은 무영단에 방문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특히 화제의 중심인 윤기와 시호에게 무척이나 치근거렸다.

검도계에 이바지한 공헌이 대단히 크니 이사직을 맡아 달라는 둥, 임원진과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자는 둥, 무영단 소속 전부에게 공로상을 돌리겠다는 둥 아주 난리였다.

운동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로 매번 거절해도 어찌나 한결같이 들이대는지.

“늘 그렇지, 뭐. 이젠 그러려니 하는걸.”

시호가 힘없이 웃었다.

윤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얼굴이 어두워.”

“……일은 무슨.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윤기의 얼굴을 보니 자꾸만 부친인 선욱과 그의 가족이 떠올라서, 시호는 시선을 피했다.

“일찍 쉴까 해. 내일은 꿈나무 교실도 열리니까.”

“그래요. 침대로 가요.”

윤기가 시호의 어깨를 감싸 침대로 데려간 뒤 이불을 걷어 주었다.

시호가 눕자, 그는 당연한 듯이 침대를 돌아가서 그녀의 옆자리에 누웠다. 시호는 그에게 등을 보이며 누웠고, 윤기는 익숙하다는 듯이 뒤에서 끌어안았다.

평소에 이렇게 자주 있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등 돌린 자신을 윤기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굵고 단단한 팔이 시호의 허리를 감았다.

“윤기야.”

“응.”

“너 어릴 때 어땠어?”

“어릴 때?”

“그냥. 궁금해서.”

윤기가 음,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평범했습니다.”

“평범?”

그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검도를 했다는 것 빼면 특별할 게 없었습니다.”

“집안이 많이 엄격한 편이었을 것 같아.”

“예. 아무래도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까요. 위계질서가 엄격했습니다.”

그의 가족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으면서도 듣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많이 엄격하셨구나.”

“예의와 신의를 지키며 도의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그러기 위해 항상 노력하셨고요.”

도의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

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분께서 손자와 저의 결혼을 허락하실 리 없다.

이혼이 도의에 어긋나는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윤기 조부님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엄격한 할아버지에 비해 부모님은 비교적 제게 관대하신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균형이 잘 맞춰졌던 것 같습니다.”

흠 없고 우아하며 격식 있는 윤기의 집안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았다. 속이 답답해져서 시호는 손으로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선배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가족들은 어떤 분들이신지.”

부모님을 떠올리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시에 뭉클해졌다.

목을 한번 가다듬은 시호는 조용조용 말했다.

“아빠는 성실함의 표본이시고 엄마는 외유내강의 모범이야.”

“딱 당신이네.”

그의 말에 시호가 작게 웃었다.

“듣기에는 좋다.”

“정말이에요. 선배는 언제나 성실하고, 마음이 강하니까.”

정말 그럴까.

“지금까지 잘 해내 온 것만 봐도 그렇지.”

시호는 윤기의 말에 기대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에게 닥친 어두운 상황도 현명하게 헤쳐 나올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우리 가족은 연락을 자주 하거나 살가운 말을 나누지는 않아. 아빠는 말없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하시고, 엄마는 밑반찬을 꼼꼼히 싸 주는 것으로 표현하시지.”

언제나 자신을 믿어 주며 묵묵히 기다려 주는 엄마 아빠를 떠올리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윤기의 부친과 나눈 대화를 알게 된다면 슬퍼하실 것이다.

“……선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