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사람들의 함성과 환호성, 눈물 섞인 응원 소리가 강당 안을 가득 메웠다.
일렬로 마주 선 선수들은 다섯 걸음 앞으로 나가 상호 간, 그리고 심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서로에게 다가가 악수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와 장비를 챙겨 일어났다.
임 감독을 따라 대기실로 돌아가는 선수들을 시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장님, 우리가 이겼어요! 이겼다고요!”
“전국체전 우승이다!”
제 머리를 울리는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우승. 기어코 그 우승을 해내고 말았다.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순간.
시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어머, 흐윽…… 단장니임…….”
시호를 따라 미연, 부산댁, 그리고 선수들이 차례로 울음을 터뜨렸다.
특히 그간 시호가 얼마나 힘겹게 살았는지, 무엇을 희생하며 견뎌 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부산댁은 엄마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축하드려요, 단장님. 아주 잘 버티셨어요. 너무 잘해 오셨어요.”
부산댁의 말에 눈에서 샘이 터졌다. 시호는 푸근한 품에서 한동안 울음을 쏟아 냈다.
미연도 시합 때마다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는 남편의 면수건으로 눈가를 찍었고, 여자 선수들도 동그랗게 모여 그녀를 감싸며 함께 울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런 그들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찍기 시작했다.
본래 시합이 모두 끝난 후에 개최되는 시상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관계자 외에는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비어 있는 몇몇 좌석을 제외하고는 전부 꽉 차 있는 상태에서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내 평생 시상식까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던 적은 처음인데.”
임 감독의 속삭임에 용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진짜 제대로 축하받는 기분이 들어 아주 좋네요. 하하핫.”
3위와 2위의 시상이 끝나고 드디어 1위인 경기 대표팀이 호명되었다.
임 감독이 1등 단상에 올라가 메달과 트로피를 양손에 쥐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무영단! 무영단! 무영단!”
“와아아아! 축하합니다!”
그야말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단상에서 내려온 임 감독을 둘러싼 선수들이 사방에서 그를 붙잡고 헹가래를 쳤다.
“어이쿠, 이놈들아! 심장마비 온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임 감독의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다음은 그간 친한 선배처럼, 형처럼 살뜰히 선수들을 챙긴 코치, 용진이었다.
“더 높이! 팔 근력 이것밖에 안 되나!”
“부조리장님이 해 주시는 맛있는 음식 때문에 코치님이 무거워지신 거라고요!”
수원의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자, 다음은 엄청난 카리스마로 우리를 휘어잡아 잘 이끌어 준 주장, 기윤기!”
수원의 외침에 잠시 주춤하던 선수들이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기를 들어 올렸다.
“이제는 따뜻한 도시 남자가 된 기윤기! 고생 많았다!”
“주장,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 같으면 차가운 오러를 뿜어내며 제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을 윤기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
“어흑, 주장…….”
승재가 눈물을 터뜨리며 손등으로 눈가를 슥슥 훔쳤다.
“이야, 긴기랑 외모랑 스타일이 제일 닮은 우리 막내가 우니까 꼭 어린 기윤기가 우는 것 같아서 기분 좋다, 야.”
태홍의 말에 픽 웃은 윤기가 무심하게 승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봉에 서느라 고생 많았다.”
“주자앙!”
승재가 그에게 와락 안겼다.
잠시 미간을 찌푸린 윤기는 하아, 한숨을 쉬며 가장 어린 동료의 등을 무심히 툭툭 두드렸다.
“긴기, 나도 위로해 줭!”
수원이 뒤에서 달라붙자 태홍 역시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주건, 넌 왼팔을 맡아라!”
건희도 가세하니 그들은 꼭 합체한 로봇처럼 보였다.
“이렇게 사이가 좋아질 줄은 몰랐는데.”
“다 감독님 덕분이죠. 그리고 주장의 마음을 녹여 준 우리 단장님 덕분이기도 하고요.”
용진의 말에 임 감독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선수들끼리 기쁨을 나누기를 기다린 듯 시호와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자 그들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임 감독은 들고 있던 메달을 윤기에게 건넸다.
“자! 단장님 목에 걸어 드려라, 주장.”
시호가 눈을 크게 뜨고 임 감독을 보았다. 메달을 받아 든 윤기는 시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목에 금메달을 걸어 주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윤기가 고개를 숙이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선수들 역시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크게 외쳤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단장님!”
“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음을 꾹 참은 시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무영단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앞으로도…… 잘…….”
하지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한 믿음과 따뜻함이 담긴 얼굴들을 보니 새삼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느껴져 울컥했다.
“주장, 우리 대신해서 단장님 좀 힘껏 안아 드려라.”
윤기가 눈을 크게 떴다. 임 감독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이 단장님 안아 드리는데 뭐 문제 있냐?”
“없습니다!”
“개미 똥꾸멍만큼도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태홍과 수원이 크게 외치며 윤기의 등을 살짝 밀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윤기는 상체를 굽혀 시호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동안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서시호 단장님.”
사방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무영단 식구들을 포함하여,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 흐뭇해하는 시선이었다.
윤기는 커다란 손으로 시호의 눈물을 슥슥 닦아 주었다.
“꺄아악!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결혼해! 결혼해!”
어디선가 터져 나온 외침에 윤기와 시호가 동시에 흠칫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렸다.
눈치 빠른 코치진과 선수들이 미묘해진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일부러 수선을 떨었다.
“이제 뒤풀이 가자! 나랑 조리장님이 실력 발휘 제대로 했으니까 기대해도 좋아.”
“우어어어! 조리장님, 부조리장님 최고!”
“자, 자! 기자들 피해서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옙! 주장, 어서 가자!”
서둘러 시상식장을 빠져나가려는데 협회장이 다가왔다.
“크흠, 아주 축하하네, 임 감독. 그리고 서 단장.”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 결혼할 땐 내가 주례를 서 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무영단 식구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민감해 죽겠는데, 거기에 불을 붙이다니!’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린 협회장은 계속해서 폭탄을 던져 댔다.
“허허, 날 잡으면 꼭 불러 주게나. 기왕이면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으면 딱 좋겠네. 누구를 닮아도 어여쁠 테니 말이야. 검도를 배우고 싶어 하면 내가 직접 가르쳐 주겠네. 하하하하하!”
‘망했다…….’
점점 더 굳어 가는 시호와 윤기의 표정을 보며 무영단 식구들은 한숨을 쉬었다.
‘협회장님, 분위기 파악 좀……!’
‘저희 뒤풀이 앞두고 있다고요!’
무언의 항의를 듣지 못한 협회장이 쐐기를 박았다.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지금 사람들 앞에서 공표를 하면 어떤가! 두 사람이 미래를 약속……!”
무영단 사람들은 속으로 끼야아악! 비명을 질렀다.
“협회장님, 밖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호의 깔끔하고 단호한 인사에 머쓱해진 협회장이 허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가 보게나.”
이 정도면 다른 남자 소개시켜 주려던 실수는 만회가 됐겠지?
***
다행히 뒤풀이 분위기는 좋았다.
임 감독과 용진은 오랜만에 얼큰하게 취해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노고를 치하했고, 선수들은 술 대신 탄산수로 기분을 내며 흥겹게 자축했다.
자리가 파한 뒤.
윤기는 시호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여기 정말 오랜만에 온…….”
시호의 몸이 뒤로 돌려졌다. 윤기는 문을 닫자마자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아 번쩍 들어 안은 윤기는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다급한 와중에도 시호의 옷을 벗겨 내는 손길은 정확하고 섬세했다.
자신의 티셔츠는 거칠게 벗어 던진 윤기는 그대로 시호의 몸을 덮었다.
미친 듯이 혀를 섞으며, 윤기는 시호에게로 천천히 제 무게를 실었다.
“아흑…….”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빠듯한 맞물림에 시호의 손톱이 윤기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꼭 처음인 것처럼 벅차고 힘들었다. 희미한 고통과 짜릿한 쾌감이 거센 소나기처럼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그간 대회를 준비하며 잔뜩 억눌렀던 그녀를 향한 욕망이 둑이 터진 듯 폭발했다.
거칠게 밀어붙이고 싶지 않은데, 시호의 따뜻함을 느껴 버린 몸은 통제를 벗어났다.
곧게 뻗은 목덜미를 따라 올라간 입술이 여린 귓불을 머금으며 혀로 귓바퀴를 따라 그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척한 소리와 뭉근한 자극에 시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윤기야…….”
희미한 음성에 윤기가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또 그것대로 아찔한 고문이었다. 그가 선사하는 감각이 아주 세세하게 느껴져서, 시호의 몸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한동안 더 부드럽게 안고 싶었는데. 시호의 움직임에 윤기는 그녀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 정신없이 몰아쳤다.
어떻게 몇 달 동안이나 시호를 안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스스로가 참 독한 놈이라는 것을 깨닫는 윤기였다.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시호의 이마에 키스하고 몸을 일으킨 윤기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곧바로 하려고……?”
그를 따라 몸을 일으킨 시호가 이불로 가슴께를 가리며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그녀의 귀여운 오해에 픽 웃은 윤기가 손에 쥔 것을 흔들었다.
붉은 벨벳 상자를 본 시호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건……?”
“우승하면 소원 들어주기로 하셨습니다.”
윤기가 상자를 열었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청명히 빛나고 있었다.
“거창하고 멋있는 말은 할 줄 모릅니다.”
윤기가 반지를 꺼냈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그녀의 왼손을 붙잡고 그것을 천천히 밀어 끼웠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얼마가 걸리든 기다릴 수 있어요. 다만, 당신의 대답은 무조건 예스여야 해.”
사이즈는 딱 맞았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진지한 그의 눈빛에 목이 메었다.
심장은 물렁하게 녹아 버렸는데, 머릿속에서는 그간 애써 무시하고 있던 목소리가 맴돌았다.
[어떤 며느릿감이 좋은지 물어봤었거든. 유하고 따뜻한 처자가 좋다고 해서 물색해 놨었지.]
[아버지가 제게 관심이 많긴 하지만…….]
[한 번 갔다 온 사람만 아니면 괜찮다고…….]
윤기와 그의 가족을 생각하면 거절해야 옳았다.
무엇이 윤기를 위하는 길인지는 굳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아도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이 달싹이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윤기의 심장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약속했으니까.’
약속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더욱.
윤기의 소원이라고 하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알았어.”
방금 제 귀로 듣고도 윤기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 주십시오.”
그리 말하는 그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그럴게. 네가 기다려 준다면 언젠가…… 그러자, 우리.”
제가 그리 대답하라고 해 놓고, 막상 ‘알았다’는 대답을 듣자 얼어 버린 윤기를 보니 시호는 멋쩍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겠어?”
“물론. 당신이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시호는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도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꾹 참고 오늘만 기다렸어.”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시호가 입을 열었다.
“사랑해.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윤기야.”
점점 커지는 그의 동공에 시호가 환히 웃었다.
“언제나 사랑할게.”
시호를 품에 꽉 끌어안은 윤기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방금 우리 약혼한 겁니까?”
“약혼?”
“결혼을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시호의 뺨을 감싼 윤기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약혼한 건 표시 내고 다녀도 됩니까?”
낮게 웃은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려 붉은 입술을 머금었다.
시호의 손가락에 낀 반지가 반짝거렸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