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윤기는 관중석 어딘가에 앉아 있을 시호를 생각했다.
그녀는 무영단 여자 선수들과 미연, 지우, 부산댁과 함께 관중석에 앉아 있겠다고 했다.
임 감독과 용진은 사람들의 시선을 염려하여 만류했지만 시호는 고개를 저었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숨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잘 보이는 곳에서 경기를 제대로 보고 싶어요.]
[저희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님!]
[저희가 오늘 일일 단장님 지킴이거든요, 호호. 요리로 단련된 이 팔뚝 보이시죠? 대한민국 아줌마 무시하시면 큰일 납니다~]
미연이 팔뚝을 들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자 웃음이 퍼져 나갔다.
처음엔 시호를 말리려던 윤기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시호는,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 누구보다 떳떳하다. 그러니 더욱 당당해져야 한다.
앞으로는 둘이서 늘 함께할 텐데 그때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시호의 곁에는 그녀를 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윤기도 믿고 안심할 수 있는 든든한 동료들이었다.
그간 선수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들인 사람은 태홍과 수원이 고작이었지만, 주장을 맡으며 알게 되었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면 괜찮은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늘 혼자서 이뤄 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윤기였지만, 시합에 참가하면서 시호의 곁을 지킬 수는 없었다.
무영단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혼자 있을 시호 생각에 불안해서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윤기는 ‘동료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에이스라는 이유로 언제나 해결사 역할을 떠맡아 왔다. 이기고 있을 땐 분위기를 끌어가야 했고, 지고 있을 땐 분위기를 뒤집어야 했다.
윤기가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아주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비록 승패의 원인이 다른 선수에게 있더라도 결과는 모두 그의 책임이었다.
한 사람에게만 과도하게 주어지는 책임감에 윤기는 더욱 차갑고 냉정해졌다. 그러지 않으면 정신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주장을 맡게 된 지금은 오히려 그런 압박감에서 자유로웠다.
선수들은 그를 정신적으로 의지했지만 각자 자신의 몫을 해내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했다.
철민과 용진이라는 좋은 스승을 만난 덕분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시호였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무영단에 속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평생 몰랐을 감정들이었다.
시호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동시에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도 예전엔 나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자만이더라.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주는 것은 아주 당연한 건데, 그걸 이제야 깨달았어.]
[…….]
[넌 나보다 더 일찍 깨닫기를 바라.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거든.]
시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따뜻한 세상에서 살아갔으면 좋겠어, 윤기야.]
시호는 제게 그런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누군가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은 참…… 따뜻하고 뭉클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다르게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 자세를 잡아 주기도 하고, 가끔이지만 고민이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마치 우이고등학교 시절의 서시호 주장님처럼.
변화하는 윤기의 모습에 태홍과 수원은 놀라며 감격했고, 다른 선수들도 ‘대하기 어려운 레전드 선수’가 아니라 ‘우리 주장님’으로 대하며 아주 잘 따랐다.
[잘 이끌어 줘서 고마워, 윤기야.]
시호의 말은 윤기에겐 더없이 크고 귀한 선물이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된 시호에게 윤기 역시 선물을 안겨 주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문제없습니다.”
“그러다 심각한 부상이면 어쩌려고.”
임 감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칫하면 검도를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무영단 대기실에 정적이 흘렀다.
“순간 고통을 참다가 평생 손에서 검을 놓아야 할 수도 있어. 그래도 할 테냐?”
과거 임 감독의 제자 중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부상이 원인이 되어 결국 선수를 그만둔 사례가 있었다.
임 감독은 윤기 역시 그렇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만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면 앞으로 남은 날에 더 큰 성과를 이뤄 낼 수 있다.”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스스로와 약속했다. 오늘, 시호에게 선물을 안겨 주겠다고.
그녀에게 ‘알았다’는 말을 반드시 듣는 날로 정했다고.
“주치의 선생님이 무리라고 판단을 내리면 선수 목록에서 뺄 거다.”
한발 물러선 임 감독의 으름장에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주치의도 일단 경기에 참가하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주장, 정말 괜찮으세요?”
윤기는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다가와 묻는 승재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은 뒤, 주치의에게 찜질을 받았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그는 눈을 감고 시호를 떠올리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
경남 대표팀과의 준결승전에서 승리한 무영단은 서울 선발팀과의 결승을 앞두게 되었다.
관중석에 있던 무영단 식구들은 서로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아휴, 심장 떨려서 못 보겠네! 우리 도윤이 시합 때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미연의 말에 부산댁이 맞장구를 쳤다.
“검도대회를 직접 보는 건 난생처음인데 이렇게 심장이 벌렁벌렁할 줄은 몰랐네. 청심환을 먹었으니 망정이지.”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시호 역시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수로 참가했을 때보다 지켜보는 지금이 훨씬 더 힘들었다.
‘아까 맞은 팔은 괜찮을까…….’
윤기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대기실에 가 볼까도 생각했으나 그만두었다.
지금 얼굴을 보이면 오히려 그의 정신을 더 어지럽게 할 것만 같았다.
믿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시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드디어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시합장에 나온 선수들이 심판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물러갔다.
선봉에 서게 된 것은 승재였다.
“평소 연습한 대로만 해.”
윤기의 말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승재가 호구를 갖춰 입고 앞으로 나아갔다.
체격과 스타일이 윤기와 많이 닮은 승재는 상대에게 충분한 위압감을 주었다.
비록 무승부에 그쳤지만 기세는 확실히 가져왔다.
2위로 나선 이는 건희였다. 절제되고 신중한 스타일인 그는 접전 끝에 손목으로 점수를 얻어 냈다.
“와아! 주건희! 주건희!”
하지만 부담감이 컸는지, 다음 순서로 출전한 수원은 수비 대신 공격에 집중하다 빈틈을 보여 머리를 맞고 말았다.
“음, 중견이 실수를 했으니 부장과 주장이 잘해 주어야 한다.”
세 번째로 시합을 하는 사람을 중견, 네 번째 사람을 부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장은 마지막으로 출전했다.
앞서 출전한 선수들이 점수를 얻고 들어온다면 주장전까지는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여기서 이기면 윤기가 경기를 치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리 생각하며 열심히 틈을 노린 태홍이었지만 시간을 다 채우며 아쉽게 비기고 말았다.
호면을 쓰는 윤기를 바라보는 무영단 사람들의 시선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워서, 관중석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까지 그 마음이 전해질 정도였다.
“혹시 아까 부상을 입은 게 심각한 걸까요?”
선혜의 말에 시호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호면을 쓴 윤기가 관중석을 한 번 슥 바라보았다. 정확히 시호가 앉아 있는 쪽이었다.
어쩐지 호면 너머로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시합이 시작되었다.
결승이니만큼 섣부른 공격보다는 서로를 살피고 틈을 찾는 탐색전이 계속되었다.
동시에 공격이 들어간 순간.
심판 셋 중 두 명이 백색 깃발을 치켜들었다.
상대편의 득점 인정이었다.
“아……!”
서울 선발팀에서는 환호성이, 무영단 쪽에서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시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머리를 칠 때 올라간 윤기의 오른팔의 각도가 조금 이상했다.
“머리!”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빗나갔지만 상대편은 계속해서 윤기의 빈틈을 찾아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 때문일까? 아침에 기자들도 바글거렸고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서 부담이 된 걸까?
직전 경기에서 얻은 부상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쩐지 모든 게 자신의 탓처럼 느껴졌다.
“손목!”
그때 심판 두 명이 청색 깃발을 위로 번쩍 들었다.
곧바로 비디오 판독이 시행되었다.
‘제발, 제발!’
억겁 같은 몇 분이 지난 후.
윤기의 득점이 인정되었다.
“와아아아아! 기윤기! 기윤기!”
“주장! 조금만 더 힘내요!”
“무영단은 강하다! 파이팅!”
사방에서 응원이 쏟아졌다.
점수는 동점. 이제 누구든 먼저 선취점을 가져가는 쪽이 이기게 된다.
시호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었다. 제발 윤기의 부상이 심각한 것이 아니기를.
이기고 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윤기였다.
퍽, 퍽! 몸과 몸이 맞부딪치고 죽도와 죽도가 서로를 향해 쉴 틈 없이 공격을 가하는 격렬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두 선수 모두 물러설 곳은 없었다. 빈틈을 보이는 순간 그대로 승패가 결정된다.
‘……후.’
욱신거리는 팔의 통증에 윤기는 이를 악물었다.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공격 타이밍일 터였다.
상대 선수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죽도 손잡이를 꽉 부여잡는 손에서 그런 다짐이 느껴졌다.
호면 너머로 상대의 눈을 찌르듯 날카롭게 응시하던 윤기의 눈동자가 스르르-관중석 쪽을 향했다.
남들이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으나, 대련 상대의 눈에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다!’
서울 선발팀의 정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매번 대회에서 적수로 만나 왔던 윤기를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바람에 정호는 번번이 2인자로 밀려나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오늘이야말로 격차를 뒤집을 절호의 기회였다.
예선전에서 입은 부상 때문인지, 보통 때에 비하면 타격력이 약해진 윤기였다.
윤기가 주춤하는 틈을 타, 정호가 힘차게 도약하며 팔을 뻗었다.
“머리!”
동시에 자신의 허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흥분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외쳐 댔다.
“와아아! 머리! 머리 인정!”
“아냐, 허리 맞았어! 비디오 판독!”
“허리 제대로 들어갔는데 뭔 소리야!”
“머리 맞았어! 내가 봤다고!”
양측이 격렬하게 주장하며 항의했다.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자세를 바로잡은 두 선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정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 허리에 제대로 내리꽂혔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반면에…… 자신의 죽도는 윤기의 머리가 아니라 머리 앞쪽을 내리쳤다.
언뜻 제대로 공격이 들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윤기가 고개를 살짝 들어 피하면서 빗나가고 말았다.
‘부상을 입었는데도 상대가 안 되네.’
정호는 씁쓸히 자조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판독이 끝나고.
청색 깃발이 위로 들렸다.
“우와아아! 우승이다!”
무영단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상대 선수와 인사를 한 뒤 자리로 돌아온 윤기는 시호를 보았다.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