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매일 보긴 했지만, 대부분 시호는 별채에서 업무를 보았고 윤기는 본관에서 훈련을 했기에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마저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잠들기 전의 짧은 통화만이 온전히 서로와 보내는 시간의 전부였다.
목표와 보상이 분명했기에 견딜 수 있던 시간들이었다.
“오랜만이네. 퇴근 후에 단둘이서 보는 건.”
탁. 차의 문이 닫히자 오롯이 둘만의 공간이었다.
숨을 들이마신 시호는 눈을 고쳐 뜨고는 향기의 원천을 따라갔다.
뒷좌석에 아주 커다란 장미꽃 다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기가 긴 팔을 뻗어 그것을 잡은 뒤 시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와아, 너무 예쁘다! 향기도 정말 좋아.”
행복하게 웃는 시호를 보니 윤기는 심장이 뻐근해졌다.
“고마워.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흔할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호와 어울리는 꽃은 붉은 장미뿐이었다.
고결하며 관능적이고 아름다우며 매혹적인 모습이 그녀와 닮았다.
사실…… 그녀에게 주고 싶은 진짜 선물은 따로 있었다.
주머니 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리던 윤기는 결국 빈손을 빼냈다.
한 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 아무 데도 안 가도 되겠습니까?”
“응, 여기가 더 좋아. 남들 시선 신경 안 쓰고 둘만 있을 수 있잖아.”
사실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하려 했었다. 하지만 시호는 대회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니 그냥 둘이서 소박하게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럼에도 윤기는 옷을 갖춰 입었다. 장소가 어디건 오늘이 시호의 생일이라는 것은 변함없으니까.
“우리 기윤기 선수, 오늘 너무 멋있는데?”
장미꽃 다발을 끌어안은 채 시호가 볼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또 반한 것 같아.”
그는 순간 미간에 힘을 잔뜩 주었다.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힘겨워 보였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시호의 얼굴을 감쌌다.
“키스해도 됩니까?”
윤기의 차를 볼 때부터 빠르게 뛰던 시호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간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아주 잠깐 손을 붙잡았던 것이 스킨십의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꼭 처음으로 키스를 하는 것처럼 떨려 왔다.
“뭐야, 갑자기.”
수없이 많은 키스를 나누었는데 왜 새삼스럽게 부끄러운 건지.
“싫습니까?”
열기가 뒤섞여 탁해진 그의 음성을 들으니, 그가 선사하는 쾌락을 기억하고 있는 몸 안쪽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윤기의 눈빛이 짙게 내려앉았다.
“시호야.”
시선을 내린 시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꽃다발이 도로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윤기는 시호의 턱을 들어 올려 엄지로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매만졌다.
“후…….”
그는 긴 숨을 내뱉는 것으로 제 안에서 날뛰는 열기를 조금이라도 억누르려 애썼다.
지금 그대로 시호에게 닿았다간 키스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파르르 떨리는 시호의 속눈썹을 본 순간, 윤기는 더 참지 못하고 줄곧 맛보고 싶었던 입술을 깊게 물었다.
“흡……!”
벌어진 틈으로 거침없이 혀를 밀어 넣은 윤기는 시호의 턱을 더 아래로 벌리며 혀뿌리를 뽑을 듯 휘감고 빨아 댔다.
달콤한 과즙이 뒤섞이며 질척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윤기는 시호의 목을 감싸 당기며 더 깊이 다가갔다.
어지럽게 뒤엉키는 혀와,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다시 붙는 야릇한 마찰음에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간 찌르르-한 쾌감에 발가락이 오므라졌다. 시호는 윤기의 목을 휘감고 저도 모르게 더 가까이 당겼다.
맞닿은 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힘겹게 새어 나왔다.
한차례 더 강하게 몰아붙인 윤기는 입술을 떼었다가 아쉬운 듯 다시 아랫입술을 한 번 부드럽게 베어 물었다.
시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윤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더 했다간 이대로 그녀를 눕혀 버리고 말 것 같다.
“생일 축하해요. 나한테 와 줘서 고맙고.”
시호는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윤기의 너른 등을 끌어안았다.
“나도 고마워. 축하해 주고 옆에 있어 줘서. 대회 앞두고 있어서 많이 바빴을 텐데.”
“나한텐 당신이 언제나 1순위야.”
잠시 본관에 갈 때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윤기의 시선이 늘 저를 따라다니는 것을 느끼던 시호였다.
“나도…… 네가 가장 소중해.”
그녀의 말에 윤기는 번개가 심장에 내리친 듯 왼쪽 가슴이 저릿해졌다.
“한 달 후에는 단장님이 아니라 내 여자로만 대할 겁니다.”
미소 지은 시호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
10월 전국체전의 막이 올랐다.
남자 일반부는 개막식 이후 네 번째 날 아침 9시부터 진행되었다.
오늘은 예년보다 관심과 열기가 더 뜨거웠다.
바로 전 RS그룹 며느리이자 여자부 최고의 선수였던 서시호와, 현재 남자 검도계의 정점인 기윤기가 연인이자 단장과 선수의 관계로 공식 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전국체전 검도 경기가 열리는 장소는 서울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의 강당일 정도로 비인기 종목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교문 앞에 카메라와 기자들이 바글거렸다. 오죽하면 검도협회 관계자 몇 명이 급하게 차출되어 그들을 통제할 정도였다.
“어어! 저기 무영단 리무진 버스다!”
“차 지나갑니다! 비켜 주세요!”
“내린다, 내린다! 좀 비켜 봐요! 어어? 서시호는 없네?”
임 감독과 용진, 그리고 윤기를 비롯한 선수들이 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대회장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기윤기 선수! 서시호 씨 이혼에 영향을 끼쳤습니까?”
“두 사람이 정말 이혼 전부터 만나고 있었나요?”
선수들의 맨 뒤에서 따라가던 용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항의를 할까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하지 말라는 시호의 말을 떠올리고는 주먹을 꾹 쥐었다.
“본 대회와 관계없는 질문은 삼가 주십시오!”
대기실까지 따라가려는 기자들을 진행요원들이 막아섰다.
“서시호 씨와는 언제부터 만나셨습니까?”
“무영단 후원사가 제이크래프트인데 어떻게 연결된 겁니까?”
“혹시 기윤기 선수 집안과 관계가 있습니까? RS그룹과 모종의 계약이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요원과 기자 간에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소란을 뒤로하고 간신히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선수들은 휴우, 하고 한숨을 돌렸다.
용진이 윤기에게 슬쩍 다가갔다.
“괜찮아?”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 무덤덤한 윤기의 얼굴에 용진은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임 감독이 손뼉을 짝짝 쳤다.
“자, 비가 내리든 바람이 불든 동요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의 목표만 생각하면 된다. 알았나?”
“예!”
“넵!”
“연습하던 대로만 하자. 자, 무영단은!”
“강하다!”
무영단 선수들은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대회식장.
무대 위에는 관계자들의 자리가 마련되었고 그 바로 아래에는 심판 위원들의 자리가 정비되어 있었다.
대회장 자리에 앉은 협회장과 부대회장 자리에 앉은 부협회장은 교문 밖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난생처음으로 겪어 보는, 프로 야구 개막식 못지않게 뜨거운 취재 열기에 검도계 사람들 역시 덩달아 들떴다.
비록 그 목적은 검도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윤기와 시호의 모습을 담기 위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관심이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서시호와 기윤기의 영향력이 아주 대단합니다.”
부협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협회장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시호에게 남자를 소개시켜 주려 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미리 말을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에휴…….”
“왜 그러세요, 회장님?”
“으응? 아무것도 아닐세. 어쨌든 검도를 향한 관심이 이 정도로 뜨거웠던 적은 처음이지 않나. 기회라고 생각하자고.”
“그러네요. 평소엔 남아돌던 제작 상품이 벌써 다 팔렸다고 합니다.”
“뭐, 뭐라고?”
매번 1층에 면수건과 죽도, 호구, 호면 모양의 열쇠고리 등 검도 관련 상품을 제작해서 판매했지만 재고가 계속 쌓여서 적자였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 동이 났다.
시호와 윤기를 보러 온 사람들이 대기하던 도중, 그것들에 관심을 보이며 너도 나도 샀던 것이다.
특히 시호가 현역 시절에 썼던 색상과 무늬라고 알려진 면수건은 5분 만에 매진되었다.
“허허, 그것 참. 요즘 아이돌 가수들이 파는 것을 굿즈라고 하던데, 우리도 두 아이돌 덕분에 검도 굿즈가 다 팔리네그려.”
“이야, 협회장님 참 젊게 사십니다. 그런 말도 다 아세요?”
알다마다. 직업과 나이가 다른 남녀를 엮어 주려면 이런저런 지식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협회장은 자신의 유일한 실수인 시호와 윤기 사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꼭 눈치 없는 늙은이가 되어 버린 기분에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모른다.
‘내 꼭 만회해야지.’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총 15개의 시도 대표팀이 참가하여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이번 대회는 모든 선수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윤기에게는 한 게임도 질 수 없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오늘 반드시 우승한다.’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이루고야 마는 제 성격이 오늘만큼 든든할 수가 없었다.
부전승으로 올라간 서울 선발팀을 제외한 나머지 14개 시도 대표팀이 각각 맞붙었다.
경기도 대표팀인 무영단은 전남 대표팀과의 예선전에서 깔끔한 승리를 거두고 인천을 상대로 준준결승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우와아아! 기윤기 대박!”
윤기가 강한 기합과 함께 상대의 머리를 치고 빠르게 나가는 순간, 세 명의 심판이 동시에 청색 깃발을 위로 들어 올렸다.
경기장 중앙으로 돌아와 상대 선수와 마주 선 윤기는 칼을 거둬들이고 뒤로 물러난 뒤 고개를 숙여 상호 간 예를 표했다.
다섯 명 중 마지막으로 출전한 주장이 자리로 돌아오자, 호면을 벗고 대기하던 선수들이 모두 일어나 다시 다섯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상대편 선수들과 악수를 했다.
무영단은 준결승에 진출했다.
경남, 경기, 전북, 서울이 준결승에 올라가게 되었다.
대기실로 향하는 선수들. 윤기의 뒤에서 걷던 태홍이 그에게 다가갔다.
“긴기, 왜 그래?”
어깨를 돌리는 윤기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설마 아까 팔뚝 맞은 것 때문에?”
예선전에서 상대 선수의 실수로 죽도가 윤기의 팔뚝에 내리꽂혔다.
내색을 안 해서 괜찮은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부상을 입은 듯했다.
역시나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임 감독이 윤기를 불러 제휴 병원에서 출장을 온 무영단 전담 주치의에게 팔을 보이도록 했다.
“좀 부었네요. 뼈는 상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이 상태로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의사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핵심 전력이 빠지면 우승은 어려웠다.
“전 괜찮습니다.”
윤기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답했다.
“결승까지 다 치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