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배 속에서 야릇한 감각이 피어올라 몸을 달궜다.
윤기의 어깨를 꼭 붙잡은 시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발꿈치를 들자, 윤기가 고개를 더욱 기울이며 상체를 숙여 주었다.
선선하게 낮은 온도. 잔잔한 파도 소리. 짙게 깔린 어둠.
맨발 아래 까끌하게 느껴지는 모래의 감각.
그 모든 것들이 윤기의 혀와 숨결에 뒤섞여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
입술이 잠깐 떨어진 틈으로 시호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몽롱하게 풀린 눈과 발그레 달아오른 볼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윤기는 다시 입술을 겹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제 옷깃을 꽉 붙잡은 손의 힘도, 제게 기댄 몸도 전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쏴아아-!
조용히 생겼다 조용히 사라져 가는 파도를 배경음 삼아 달아오른 숨결을 주고받았다.
달밤 아래 잊을 수 없는 키스였다.
시호를 품에 안고 손으로 머리를 감싼 윤기가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사랑해.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할 만큼.”
여린 어깨와 가는 허리를 휘감은 팔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책임져요. 당신이 없으면 이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나도…….”
시호는 입을 다물었다. 윤기가 안았던 팔을 풀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왜 말을 끝까지 안 해 주십니까?”
워크숍 내내 무감하고 차가웠으나, 제게만 닿으면 부드럽고 연하게 풀리는 윤기의 눈빛에 시호는 가슴이 시큰거렸다.
“나도 그때 말해 줄게. 네가 목표를 이루면.”
잠시 생각하던 윤기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의욕 끓어오르게 조련하는 법을 잘 아네, 우리 시호.”
윤기가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워크숍에 오기 전 두 사람 다 커플링을 집에 빼 놓고 왔다.
“10월 전국체전에서 반드시 우승할 겁니다. 그래서 원하는 걸 꼭 얻을 생각이에요.”
그는 진지했고, 진심이었다.
시호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눈을 내리깐 윤기는 맹세를 하는 기사처럼 느껴졌다.
절실함과 절박함이 가득 담긴 모습이 시호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
일주일 뒤, 무영단이 정식 출범했다.
은퇴하고 RS그룹으로 시집간 전 프로 선수 서시호가 단장을, 현재 대한민국 검도계의 정점에 서 있는 기윤기가 주장을 맡았다는 것이 큰 화제가 되었다.
동시에 RS그룹에서 시호와의 이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해서 관심은 더욱 뜨거워졌다.
검도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기사를 통해 그들을 알게 될 정도였다.
거기에 검도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한 게시물 때문에 무영단에 관심이 집중 포화되었다.
- 이거 예전에 올라왔다가 빛삭된 건데 캡처해서 갖고 있다가 푼다. 이때부터 사귄 듯? 아님 이거 때문에 이혼한 건가?
올라온 사진은 한 게시물 캡처본이었다. 흰 원피스를 입고 밀짚모자를 쓴 시호와,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웃는 윤기였다. 배경은 서해안 벌천포 해수욕장이었다.
원본 게시물의 본문에는…….
- 여친이랑 서해 벌천포 놀러 갔다가 기윤기 봄. 근데 이런 거 찍어서 올리면 고소당함?
……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밑으로 댓글이 하나 있었다.
- 기윤기 집안 배경은 알고 이런 거 함부로 올리냐? 큰아버지 민성당 대표고 아버지는 GY화학 대표에다 연교는 거의 기윤기네 땅. 여야 의원 다 기윤기 할아버지네 제자ㅇㅇ 너 인생 불쌍해서 못 본 척해 줄 테니까 빨리 삭제하셈ㅅㄱ 차피 검도 커뮤니티 이 시간대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어서 지금 지우면 괜춘.
그 댓글을 끝으로 게시물은 1분 만에 삭제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것을 캡처해 둔 사람이 있었고, 무영단 창단과 함께 두 사람의 연애가 알려지게 되었다.
윤기가 이혼의 원인이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었고, RS그룹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 진짜 기윤기랑 바람피워서 서시호 이혼한 거임? 그래서 재벌가치고 위자료를 적게 준 건가? 체면 차리기용으로?
- 돈 많은 이혼녀가 잘생기고 어린 운동선수 만나는 거 이쯤 되면 과학 아니냐. ㅂㅂㅂㄱ ㅇㅈ?
- 저렇게 운동하고 색기 넘치는 여자는 일반인으로는 만족 못 함ㅇㅇ 설마 전남편이 부실해서 이혼?
- 미친ㅋㅋㅋ 님 그러다 RS그룹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함요
범람하는 온갖 말들 속에서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말들에 일일이 반응하며 상처를 받을 정도로 시호는 마음이 무르지 않았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그보다 더 심한 말들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과도한 관심을 받으며 피해를 겪는 임 감독을 비롯하여 코치진과 선수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무영관 건물 입구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들이밀며 온갖 질문을 쏟아 냈다.
임 감독의 호통이 아니었더라면 내부까지 들어오려고 했을지도 몰랐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 시호는 코치진과 선수들을 향해 머리를 깊이 숙였다.
“제 불찰로 인해 운동 외적인 일로 불필요한 관심을 받게 되어 불편을 드린 점,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시호가 고개를 들고 두 손을 맞잡았다.
“제 이혼은 윤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었다.
시호는 마음이 뭉클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따뜻했고 신뢰가 가득했다.
“나는 서 단장을 믿는다.”
묵직한 말을 끝으로 임 감독은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았다. 용진도 동의한다는 듯 말을 보탰다.
“오랫동안 시호를 봐 온 선배이자 동료로서, 저 역시 서 단장님을 믿고 있습니다.”
고민하던 부산댁이 손을 들었다.
“사실, 저는 단장님 시댁에서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모두가 웅성거렸다. 시호와 눈이 마주치자 부산댁이 미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유명한 댁이라서 세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으나, 이것 하나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사용인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시고 챙겨 주신 것은 단장님뿐이었습니다.”
“…….”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내 일에 자부심을 갖고 싶어서 저는 높은 연봉을 마다하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 선수 여러분들, 단장님을 믿어 주세요.”
부산댁의 말에 선수들이 동조했다.
“저희도 단장님을 믿고 있습니다.”
여자부 주장 선혜가 시호를 보며 말했다.
“말씀 못 드렸는데… 선배님께서 현역이실 때 발목 부상을 입게 한 선수를 알고 있습니다.”
시호의 눈이 커졌다.
“그 선수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사고 직후, 단장님께서 그 선수에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저 불행한 사고일 뿐이니까 죄책감 갖지 말고 운동에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고.”
“…….”
”절대 본인 때문에 검도를 그만두지 말라고, 그렇게 안심시키면서 격려해 주셨다고.”
시호는 그때를 떠올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후배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런 말을 했었다.
마음은 한없이 절망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늘 주장을 맡아서 그런지 제 속은 내비치지 않고 후배를 위로하고 있었다.
“혹시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이 될까 봐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이상 말씀드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서요.”
선혜가 힘주어 말했다.
“저희 모두 단장님 믿고 있습니다. 무영단에 지원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서시호 선배님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혜를 비롯하여 태홍과 수원, 승재, 단아 등 선수들이 고개를 숙이며 스승에 대한 예를 취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윤기가 마지막으로 시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연이 시호의 손을 잡았고 부산댁이 미소 지으며 시호의 어깨를 감쌌다.
울컥. 뜨겁고 뭉클한 것이 가슴속에서부터 쑥 올라왔다. 눈시울이 시큰해지고 목이 멨다.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든든했다.
“저도.”
살짝 갈라져 떨리는 시호의 목소리. 그래서 더 진정성이 느껴졌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호가 선수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무영단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
탁탁탁, 타악.
“머리!”
“손목!”
발이 마룻바닥 위를 구르는 소리가 연이어 이어졌다. 대나무가 서로를 때리는 마찰음이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무영단은 10월에 있을 전국체전 준비에 한창이었다. 코치진이 워낙 베테랑인 데다가 선수들 또한 대학을 졸업한 두 선수를 빼면 프로리그에서 뛰던 현역이므로 훈련 체계는 순식간에 잡혔다.
기본기가 잘 잡혀 있고,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알며 성실한 사람들만 모아 놨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출범할 때 겪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무영단 선수들의 결속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한 달이 조금 지난 5월 말, 무영단 남자 선수들은 전국체전 검도 도대표선발전에서 일반부 1위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단체전 참가 인원은 다섯 명인지라 아쉽게도 세 명뿐인 여자부는 내년을 노리기로 했다.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두 명을 더 뽑는 것보다는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인재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선수들도 이에 동의해 주었다.
그럼에도 무영단은 전국체전 출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두 훈련에 매진했다.
네 달이 지난 후 9월.
“전국체전까지 딱 한 달 남았다.”
임 감독의 말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간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낸 적 없는 선수들이었다.
자발적으로 새벽 운동에 나왔고, 1시간의 점심, 저녁 시간 이후 오후 7시에서 늦으면 9시까지 맹훈련에 돌입했다.
주말에는 병원과 헬스클럽을 오가며 몸 관리를 했다. 영양과 칼로리를 계산하여 나오는 식사 덕분에 식단 관리는 따로 하지 않아도 됐다.
시호와 윤기는 무영단이 출범한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함께 잔 적이 없었다.
서로 약속을 했다. 대회가 다가올 때까지는 단장과 선수로서 각자의 위치를 지키자고.
단둘이서 식사를 하거나 데이트를 한 적도 없었고, 출퇴근도 각자 따로 했다.
많이 힘들었지만 윤기는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지금 이 시기만 견딜 수 있다면, 앞으로 오래도록 시호와 함께 잠들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한 날이므로 두 사람은 훈련이 끝난 후 잠깐 만나기로 했다.
전국체전까지 딱 한 달 남은 날이자 시호의 생일이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시호의 말에 점심시간에 모두 모여 가볍게 축하를 한 것이 다였다.
하지만 윤기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두 시간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시호를 만나러 가는 길, 윤기의 차 안에는 장미 향기가 넘실거렸다.
장소도 집이 아니라 바깥에서 보기로 했다.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전에 대회 한 달 전부터는 몸에 무리가 가거나 예상치 못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으므로 관계를 갖지 말자고 약속을 한 두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친 윤기는 시호와 만나기로 한 공원으로 향했다.
차를 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조수석의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윤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차의 문이 열렸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