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둘이 있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려 했었다.
설마 밤에 산책하기로 한 것을 잊지는 않았는지 물으려 했다.
그런데 시호의 미소를 보는 순간.
사고가 멈췄다.
노을이 붉게 번진 하늘.
고기를 굽는 소리와 위로 너울너울 피어오르는 연기.
사람들이 즐겁게 떠드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시호를 아름답게 빛내 주는 배경처럼 느껴졌다.
얼어 버린 그의 머릿속을 깨뜨린 단어 하나.
결혼.
시호와 결혼이 하고 싶었다.
온 세상에 시호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옆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무엇으로든 엮여 있고 싶었다.
아주 깊게. 쉽게 떨어질 수 없게.
그러나…….
“윤기야, 왜 그래?”
그녀는 원하지 않을 테지.
‘아직은’이라고 덧붙이고 싶었다.
아직은 너무 이르니까.
아직은 무영단에 집중해야 할 때니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았다.
나중에라도 시호가 자신의 마음과 같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무슨 일 있어? 아님…… 어디 아픈 거야?”
걱정스러워하는 시호의 표정에 윤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그럼 얼굴이 왜 어두워?”
“…….”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서.
하루라도 빨리 내 사람이라고 공표하고 싶어서 미치겠거든.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호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고, 또 선수단 워크숍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는 도중에 프러포즈를 하기는 싫었다.
윤기는 10월에 열릴 전국체전과 내후년 5월에 있을 세계검도선수권 대회를 떠올렸다.
그리고 둘 중 한 곳에서라도 우승을 거머쥐는 순간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저희가 10월 전국체전에서 우승을 한다면.”
윤기는 좀 더 앞서 열리는 전국체전을 택했다. 그래야 더 빨리 프러포즈를 할 수 있으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무슨?”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들어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 순간만큼은 알겠다고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너무나도 간절한 그의 눈빛에 시호는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게.”
“그게 뭐든?”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 블랙홀이 있었다. 무엇이든 다 빨아들여 자신처럼 검게 물들일 것만 같았다.
“응, 그게 뭐든.”
시호는 단번에 그리 말할 수 있었다. 윤기를 믿고 있으니까.
제게 상처를 입히는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언제나 하나라도 더 해 주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니.
“그 대답이 널 기쁘게 하는 거라면 나도 좋아.”
“기쁠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검기만 하던 윤기의 눈동자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별이 떴다.
시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갖고 싶은 게 있는 건가?’
그렇담 전국체전이나 내후년 세계선수권대회가 다가오기 전에 사 주고 싶었다.
“갖고 싶은 물건이 있는 거야?”
음, 물건은 물건인가.
시호의 사인이 들어간 종이를 갖고 싶었다.
혼인신고서.
“그런 셈입니다.”
그런 셈?
뭔가 대답이 애매모호한데.
하지만 캐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아서 시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시기쯤 나오는 건가?
“그래, 알았어. 우승을 했는데 뭔들 못 해 드리겠습니까, 기 주장님.”
시호의 말에 윤기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가 그녀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귀에 속삭였다.
“밤에 산책하는 거, 잊지 않았죠?”
시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작게 미소했다.
“그거 알아요? 둘이 있을 시간만 생각하면서 버텼어.”
그가 새끼손가락으로 시호의 새끼손가락을 휘감았다.
놀란 그녀가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서 있는 덕분에 그들의 은밀한 접촉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누가 볼지 몰라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시호가 손을 빼려고 하자, 윤기는 그녀의 손을 한 번 꽉 붙잡고는 놓아주었다.
“운동에만 열중한다고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아요.”
“나 네가 속한 선수단 단장이야. 소속 선수가 운동에 매진한다는데 섭섭할 리가.”
“10월 전국체전까지 미친 듯이 달릴 겁니다. 그래서 당신한테 꼭 대답 들을 거고.”
도대체 무엇을 바라기에 윤기가 이토록 투지를 불태우는 걸까.
“미리 말해 주면 안 돼?”
“안 됩니다.”
“궁금해서 그래. 도대체 뭐가 기윤기를 이렇게 불태우나 싶어서.”
저를 불태우는 것은 딱 한 사람뿐입니다.
윤기는 속으로 대답하며 겉으로는 그저 씩 웃기만 했다.
***
옥상정원에서 벌어진 선수단 회식 자리에 술은 없었지만, 술을 마신 것 못지않게 흥겨웠다.
수원과 태홍의 덕이 컸다.
격의 없이 다가가 말을 걸고, 검도에 관한 의견을 나누면서 어느새 선수들은 제법 친해져 있었다.
누구도 선뜻 다가갈 수 없었던 윤기를 적절히 대화에 끌어들여서 선수들의 호감도가 더욱 커졌다.
특히 승재는 속으로 방방 뛰는 중이었다.
‘내가 기윤기 선배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비록 무리에 껴서, 태홍과 수원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무심히 대답하는 윤기의 말을 듣는 것이 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예전에는 대회장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보거나 영상 속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려 실물을 접하며 목소리를 생방송으로 듣고 있지 않나!
“주, 주장! 나보다 큰 선수한테 머리 맞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승재와 동갑이자 역시 대학을 갓 졸업한 후 무영단에 입단한 여자부 단아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피해.”
그의 무심한 대답에 수원과 태홍이 질색을 했다.
“야, 병아리한테 그게 무슨!”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줘 봐. 계책이라든가, 비법이라든가.”
“저 두 병아리들이 주장 음성 듣고 싶어서 안달 난 거 안 보이냐?”
수원이 단아와 승재를 가리켰다.
무감한 눈빛으로 단아를 보던 윤기의 눈이 승재에게 닿는 순간, 날카로운 빛을 번뜩였다.
승재가 흠칫하자 윤기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주로 내 머리를 공격해 올 테니까 그걸 역이용해.”
“역이용요?”
“머리 공격을 유도한 다음 한 박자 빠르게 움직여서 손목이나 허리를 때려.”
윤기의 대답에 선수들은 자신들과 그의 차이를 깨달았다.
상대보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말이 쉽지, 해 보면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다.
타고난 신체적 기량에 따라 다르긴 하나, 대체적으로 상대방의 훈련량의 두 배는 되어야 그 정도 움직임이 가능하다.
실전에서는 반 박자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벅차다.
“한 박자 빠르게…….”
중얼거린 승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미친 듯이 해 보는 거야.
그래서 오는 10월 전국체전 참가 명단에 선봉으로 기필코 이름을 올릴 거다.
승재는 윤기와 한 팀이 되어 대회에 나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대련 상대로 만나는 것도 좋지만, 한 번쯤은 그 대단한 선수의 동료이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보내온 러브콜을 마다하고 신생 선수단의 선발전에 참가했다. 이유는 딱 하나, 윤기가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승재는 유독 제게만 뾰족해지는 것 같은 윤기의 시선에 식은땀만 흘렸다.
“자, 우리 무영단!”
임 감독이 이온 음료가 들어 있는 잔을 들었다.
“앞으로 한 팀이 되어 선의의 경쟁자로서, 동시에 우정을 나누는 동료로서 한배를 타게 되었다. 서로 도와주고 끌어 주며 믿음으로 무장한 선수단이 되었으면 좋겠다. 알았나?”
“예!”
“옙!”
“자, 우리 단장님의 말씀을 끝으로 건배 한번 하자.”
임 감독이 시호를 향해 눈짓했다.
“우리 무영단의 모토는 ‘진심’입니다. 여러분께서 매순간 진심을 다하여 임하시는 만큼, 저를 포함해서 코치진 모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름길을 찾는 것보다는 조금 더 걸어가더라도 정직하고 솔직한 길을 택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 코치인 용진과 조리장인 부산댁, 부조리장인 미연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조리장을 맡게 된 성영숙입니다.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요리 해 드릴 테니까 우리 선수들 힘내세요.”
“부조리장인 윤미연입니다. 조리장님 도와서 영양 풍부, 풍미 철철 넘치는 음식들 많이 해 드릴게용!”
“와아!”
“조리장님 음식 최고!”
“부조리장님 완전 대박!”
“아이고, 하필 음식 해 주시는 분들 뒤라서 나는 완전 묻히게 생겼네. 앞으로 빡세게 굴릴 거니까 잘들 하자.”
“우우우.”
선수들이 용진에게 야유를 보내자 용진을 제외한 코치진은 웃음이 터졌다.
임 감독이 박수를 두 번 쳤다.
“그럼 구호 한 번 외치고 자리 정리하자. 내일 새벽 운동 하려면 일찍 일어나야지. 내가 ‘무영단’ 선창하면 ‘나가자’ 후창하는 거다. 자, 무영단!”
“나가자!”
“나가자!”
자리가 파한 뒤.
선수들은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친해진 이상 각자 순순히 방으로 돌아갈 수만은 없는 선수들이었다.
수원과 태홍의 지휘 아래 남자 선수들은 한방에 모였고, 여자 선수들도 밀린 이야기가 많은지 주장인 선혜의 방으로 들어갔다.
“긴기, 넌 안 갈래?”
“쉴 거다.”
하긴, 주장을 맡았으니 모범을 보여야겠지. 태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가 무심한 듯 강한 눈빛으로 선수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적당히 모여 있다 파하도록.”
“예, 옙!”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선수들은 윤기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윤기 방의 문이 닫히고.
선수들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장은 무섭지만 참 모범적이신 것 같아요.”
“응, 긴기가 좀 그래. 한 번도 정도에 어긋난 적이 없었지.”
“지금도 방에 들어가자마자 씻고 곧바로 누울걸. 기윤기는 컨디션 관리의 신이거든. 한 번도 허튼 생각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지.”
수원이 태홍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나 같으면 밤에 몰래 나가서 여자 친구 만났을 텐데.”
“그건 너니까 그런 거지, 새꺄. 긴기는 절대 그럴 놈 아님. 선배도 그렇고.”
한편, ‘절대 그럴 놈 아닌’ 윤기는 여자 친구와 밤 산책을 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혹시 시호가 추울 것을 대비하여 겉옷을 한 벌 챙긴 윤기는 다른 사람들이 방으로 모두 들어갔다고 판단한 후에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하니 시호는 이미 모래사장 위를 맨발로 걷고 있었다.
“선배.”
그의 부름에 뒤를 돈 시호가 미소를 지었다.
“왔어?”
“춥지는 않습니까?”
시호는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조금. 근데 견딜 수 있을 정도야.”
윤기는 가져온 옷을 시호에게 둘러 주고 꼭꼭 여몄다.
“고마워. 아까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 갑자기 좀 쌀쌀하네.”
“바닷가니까요.”
어느 정도 함께 걷다가 사람도 별로 없고, 리조트에서 꽤 멀어졌다 싶은 지점에 다다랐을 때.
윤기가 시호의 손을 잡고 손깍지를 끼었다.
“선배, 아까 저녁 식사 때 한 약속 잊으면 안 됩니다.”
“우승하면 네 말에 무조건 알았다고 대답하는 거?”
윤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뭘까. 아까부터 계속 생각했는데 모르겠…….”
윤기는 시호의 허리를 끌어당겨 입술을 뜨겁게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