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나도 영상 분석하면서 둘이 많이 닮았단 생각을 하던 참이었거든. 자네도 그렇지?”
“예, 감독님. 지금 승재의 모습은 윤기가 승재 나이였을 때와 똑같이 닮았어요. 뭐, 불과 몇 년 전이지만요.”
갑상과 갑을 착용한 임 감독은 준비운동을 끝내고 정렬한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기윤기! 현승재!”
윤기의 눈 밑이 움찔거렸다. 왜 자꾸만 저 녀석과 얽히는 거지.
반대로,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진 승재는 기뻐하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늘 영상으로만 접하던 기윤기 선수와 칼을 맞대어 보다니.
오늘을 기념일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윤기의 시선이 흘깃 시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자연스레 승재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시선 또한 윤기가 빨랐다. 그래서 그는 시호를 쳐다봤다가 다시 정면으로 향하는 승재의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하.’
승재가 그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윤기가 미간을 구긴 채 자신을 강렬한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승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뭐, 뭐지? 내가 뭐 실수했나?’
아직 시합하기도 전인데, 죽도를 쥐고 있는 호완 안의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대련 상대로 윤기와 마주하니 평소 느끼던 것의 수십 배의 압박감이 승재를 짓눌렀다.
기세에서 지면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데, 윤기의 흉흉한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질 것만 같았다.
‘아냐, 이런 생각 하면 안 돼! 선발전 때 단장님이 그러셨잖아, 붙기도 전에 결과부터 예측하지 말라고. 절대 기세에서 지면 안 된다고.’
시호의 말을 떠올리자 승재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흘깃거렸다.
그러자 윤기의 눈이 더더욱 위험한 빛을 띠었다.
심호흡을 한 승재는 온몸에 힘을 주며 윤기의 눈빛을 받아 냈다.
햇병아리의 도전적인 눈빛이 윤기를 자극했다.
선수로서도, 또한 남자로서도.
시호를 마음에 둔 것을 보니 안목 하나는 제대로 된 놈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질 수 없었다.
“정렬!”
고개를 숙이며 서로에 대한 예를 드러낸 두 사람.
동시에 죽도를 빼 들고 끝을 맞대며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윤기와 몸이 강하게 부딪친 순간, 승재는 곧바로 이를 악물었다.
단장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절대로 기세에서만큼은 지지 않……!
“손목!”
……으리라고 생각한 지 1초 만에 점수를 내어 주고 말았다.
시호가 청색 깃발을 위로 들었다.
윤기의 호면 끈에 묶인 청색의 끈이 오늘따라 더욱 빛나 보였다.
대학교 4학년이 된 이후로 힘과 스피드는 누구와 붙어도 자신 있었는데, 역시 기윤기는 기윤기였다.
아주 거대하고 단단한 검은색 트럭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생각할 틈은 없었다.
윤기는 쉴 틈 없이 승재를 몰아세웠다.
‘윽……!’
승재는 공격할 틈을 노리기는커녕 방어하기에 바빴다.
‘이게 정녕 사람인가?!’
그래도 자신은 인간계에서 꽤 상위권이라고 생각했는데, 윤기는 ‘이게 바로 천상계 레벨이란다’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손목!”
또다시 청색 깃발이 위로 번쩍 들렸다.
연이어 들리는 죽도의 마찰음에 모두 숨을 죽이고 그들의 빠른 움직임을 눈으로 좇기 바빴다.
제한 시간이 거의 끝나 갈 무렵.
“머리!”
시호가 다시 청색 깃발을 들었다.
완벽한 윤기의 승리였다.
“헉, 허억…….”
호면 속 승재의 이마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두 선수는 뒤로 다섯 걸음 물러나 서로에게 머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물러나 정좌했다.
윤기는 심호흡을 깊게 하는 것으로 벌써 숨을 고른 모양이었다.
반면 승재의 어깨는 여전히 위아래로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우리 주장이 햇병아리한테 신고식 한번 제대로 시키는구나. 하하하.”
임 감독의 말에 용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현승재, 지옥의 맛은 어땠냐?”
정말…… 지옥이었습니다…….
승재는 눈빛으로 답했다. 4분 동안 정말로, 진심으로 죽을 뻔했다.
아직도 손목이 얼얼하고 숨이 찼다.
상대방의 틈을 살필 겨를이 요만큼도 없이 막아 내기에 급급한 적은 처음이었다.
또한 실력 차가 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도 아주 잘했다. 기윤기가 그 정도로 공격하는데 3점밖에 안 내어 준 건 햇병아리치고는 대단히 선방한 거니까 너무 기죽지 말도록.”
선수들은 마주 선 상태에서 시계 방향으로 돌며 대련을 했다.
지우는 선수들의 모습을 꼼꼼히 화면에 담았고 시호 역시 한 사람 한 사람 주의 깊게 살폈다.
로테이션을 세 번 돌고 나서야 오늘 치 훈련이 끝났다.
윤기와 다시 마주 선 승재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와 세 번이나 칼을 부딪치면서 느낀 건데.
‘앞으로 주장의 심기를 절대로 거스르지 말자.’
물론 칼에 사적인 감정을 담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저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지 않나.
그래도 최대한 윤기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승재는 다짐했다.
‘단장님께 물어봐야겠어. 주장이 싫어하는 행동은 뭔지.’
그것이 윤기의 눈 밖에 나는 행동 0순위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승재는 또 제 무덤을 파고 있었다.
“자, 고생 많았다. 오늘 말해 준 것들을 토대로 스스로의 검도에 대해 잘 생각하도록. 홈페이지랑 에, 그 뭐냐.”
용진이 임 감독의 귀에 속삭였다.
“유튜브요, 감독님.”
“어어, 그래. 유티비에 훈련 영상 올라갈 거니까 잘 참고하고. 그럼 한 시간 후에 옥상정원으로 집합하도록!”
윤기가 선수들을 슥 살핀 뒤 임 감독을 향해 서서 몸을 바로 했다.
“정렬.”
차가운 중저음의 목소리에 선수들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인사.”
선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윤기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였다.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임 감독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용진과 함께 먼저 강당을 나섰다.
장비를 챙긴 지우와 시호가 그 뒤를 따랐다.
시호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던 윤기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정좌하고 호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긴기, 너 정말 이러기야?”
옆으로 다가온 수원과 태홍이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윤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뭐가.”
“벌써부터 그렇게 막 편애하고. 어? 아무리 햇병아리 후배라지만 질투 난다고. 어?”
편애? 질투? 이게 웬 개소리인가.
호구를 모두 정리한 윤기가 고개를 들어 수원을 보았다.
“긴기. 우린 아직 너의 애정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어.”
수원보다는 아주 조금 더 정상에 속하는 태홍까지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놈들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잘못이다.
호구를 가방에 넣은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원과 태홍이 그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징그러운 사내놈 둘이 제 손을 꼭 붙잡으니 거미 100마리가 온몸을 기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손을 뿌리친 윤기가 제 손을 털었다.
시호의 손을 붙잡고 정화해야겠다.
“이거 봐, 이거 봐! 사랑이 식었어!”
사랑은 개뿔. 그런 건 시호의 몫이다.
“계속 헛소리할 거면 간다.”
“너 현승재 왜 예뻐하는 거야.”
지금까지 그들이 한 말 중 가장 신박한 개소리였다.
“현승재한테만 그렇게 온 힘을 다하고. 그렇게 몰아붙여서 실력 키우게 하려는 거지!”
“승재 볼 때만 눈빛이 완전 생생하게 살아나서는 신나게 죽도 휘둘렀잖아. 정식으로 후계자로 삼겠다, 이거야?”
윤기가 얼굴을 구기자 수원과 태홍이 더 난리를 쳤다.
“저거 봐, 저거 봐! 고딩 때랑 똑같은 표정!”
“시호 선배 좋아하는 거 안 들키려고 일부러 더 무섭게 일그러지던…… 윽!”
윤기가 툭 치자 수원이 배를 움켜쥐고 한껏 과장되게 쓰러졌다.
“내가 죽거든…… 기윤기를 순장해 줘……. 꽥.”
“미친놈.”
수원이 다시 스프링처럼 튕겨져 일어났다.
“애정 표현을 보아하니 아직 현승재에게 지지 않은 모양이군. 움하하하하!”
“긴기, 나한테도 욕해 줘!”
“돌았어, 너희 둘은.”
태홍과 수원이 마치 ‘슬램덩크’의 강백호와 서태웅처럼 비장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예에쓰-! 아직 우리는 건재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윤기는 얼른 가방을 챙겨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한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빨리 씻고 나와서 시호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함께 보내려는 생각이었다.
녹초가 되도록 운동을 했으니, 선수들이 각자 방에서 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옥상정원에는 조리장인 부산댁과 부조리장인 미연이 한창 음식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고.
그렇다고 15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만날 수도 없고.
자신이 시호의 방으로 가거나, 시호가 자신의 방으로 오는 것이 가장 좋지만 누가 보게 될지 모른다.
연인이라는 것을 숨길 생각은 없지만, 모범을 보여야 하는 단장과 주장이 워크숍에 와서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못할 것이다.
“…….”
밤 산책뿐이겠군.
그것만큼은 반드시 사수하리라 생각하며 윤기는 욕실로 들어갔다.
***
한 시간 후.
옥상정원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미리 준비해 온 음식을 먹고 연신 감탄하는 선수들을 보며 부산댁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 생애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부산댁은 이제 ‘작은사모님’이라는 말 대신 ‘단장님’이라고 곧잘 불렀다.
“조리장님 음식이 워낙 훌륭해야 말이죠. 저희 선수단한테 꼭 먹이고 싶었어요.”
시호의 말에 부산댁은 눈물을 글썽였다.
“어릴 때 집이 너무 가난해서 여기저기 식모살이 전전하며 살았어요. 성북동에 정착한 후로도 눈치 살피면서 음식만 했는데. 내 생애 이런 좋은 곳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조리장이라고 불릴 줄은…….”
시호가 말없이 부산댁의 손을 잡아 주자 그녀가 활짝 웃었다.
“꼭 보상을 받는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단장님. 앞으로 잘할게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조리장님 음식 한 번 맛보면 다른 음식은 입에도 못 대는데, 저기 애들 먹는 거 보이시죠? 앞으로 조리장님 엄청 바빠지게 생겼는데 어쩌죠?”
“아휴, 걱정 마세요! 우리 선수들 위해서라면 휴일도 필요 없어요. 성북동에 있을 땐 쉬는 날이 그렇게 기다려졌는데, 요새는 매일매일 출근하고 싶어서 창단일만 손꼽아 기다린다니까요.”
정식 창단일은 일주일 뒤였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출범이었다.
부산댁의 말마따나 모두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이다. 시호 역시 지금 이 순간이 그간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우리 잘생긴 주장 청년이 단장님께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에요. 아까부터 계속 이쪽을 쳐다보네요.”
고개를 살짝 돌린 시호는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럼 전 부족한 게 없나 살펴볼게요.”
인자한 미소를 지은 부산댁이 자리를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윤기가 다가왔다.
“선…….”
잠시 입을 다문 그가 정정했다.
“단장님.”
민망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해서 시호가 배시시 웃었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