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임 감독이 손뼉을 짝짝 쳤다.
“자, 자! 제이슨 대표님의 호의는 감사드리지만 워크숍의 목적은 수련과 친목에 있다. 한 층에 두 명씩은 물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고 편하겠지만 워크숍의 취지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
윤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데.
“그러니 코치진을 포함해서 남자는 2층 왼쪽에 있는 방을, 여자는 오른쪽에 있는 방을 쓰자. 대신 1인 1실은 허용한다. 대부분 지하 강당에서 시간을 보낼 거니까 괜찮겠지?”
“예!”
끙. 예감이 적중하자 윤기가 미간을 굳혔다.
그 모습에 시호는 소리 죽여 웃었다.
“좋아. 그럼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지하 1층 수련관으로 신속하게 모인다, 실시!”
“실시!”
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코치진 역시 성별을 나누어 왼쪽과 오른쪽으로 향했다.
각자 짐을 풀고 나온 선수들은 도복을 입은 채 호구 가방을 들고 계단으로 향했고, 코치진은 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기로 했다.
“아, 저 깜빡하고 휴대폰을 두고 왔네요. 먼저 내려가세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숙소로 돌아온 시호는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보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기윤기 때문이야.”
키스로 혼을 쏙 빼 놓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특히 방금 전 수원이 ‘한 층에 두 명씩 쓰자’고 말했을 때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듯 열기가 넘실거렸다.
“정신 차리자, 정신.”
침실에서 휴대폰을 챙겨 나온 시호는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커다란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깜짝이야……. 왜 여기에 있어?”
안으로 슥 들어온 윤기가 문을 닫았다.
“면수건을 다른 가방에다 넣어 둔 것을 깜빡해서요.”
“나도 휴대폰 두고 나와서 다시 온 건데. 우리 둘 다 좀 위험하다? 정신 차려야지, 안 그러면 실수하겠어.”
문손잡이로 뻗어 가는 시호의 손목을 붙잡은 윤기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입술을 한 번 길게 머금었다.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모로 기울여서 입술을 빈틈없이 겹쳐 왔다.
강인한 손이 등을 받쳐 당기며 말캉한 혀를 더욱 옥죄이듯 얽었다.
숙소에는 둘뿐이었지만 누가 언제 자신이나 윤기를 찾을지 몰라서 시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시호가 어깨를 밀어내려 하자 윤기는 아까처럼 그녀의 양 손목을 붙잡아 제 목을 감싸게 한 다음, 가는 허리를 휘감아 제게로 더욱 밀착시켰다.
입술과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텅 빈 숙소를 가득 울렸다.
시호를 점점 벽으로 밀어붙인 윤기는 그녀의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손으로 감싸며 계속해서 강한 키스를 이어 갔다.
밑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초조해지는 마음과, 윤기가 선사하는 짜릿한 감각을 더 맛보고 싶은 마음이 시호의 안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파고드는 축축한 근육에서 과즙처럼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윤기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입술을 떼고 숨결이 섞이는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었다.
“하아, 어서 내려가야…….”
윤기가 엄지로 그녀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슥 훔치고는 제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런 야한 얼굴로 내려가려고? 서시호 정말 변태…….”
윤기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시호가 발끈했다.
“너 때문이잖아!”
“뭐가 말입니까?”
“네가 변태처럼 만들었잖아. 자기가 먼저 해 놓고선……!”
“사람 변태로 만들기 딱 좋은 얼굴이라고 말하려던 거였는데. 본인이 변태라고 인정하는 건가?”
커진 시호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어…….”
입가에 힘을 주며 참던 윤기는 그녀의 어깨 위로 무너지듯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 진짜 너무 귀여워.”
윤기가 웃으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시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너랑 말 안 해.”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윤기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정말?”
놀리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순식간에 눈꼬리가 아련하게 내려간다.
“좀 봐주지. 난 당신이 봐주지 않으면 힘이 안 나는데.”
이 요망한 기윤기.
요물 같은 기윤기.
그런 눈빛으로 그런 말은 반칙이지.
페어플레이의 진수를 보여 주던 기 선수는 어디 가고, 온갖 필살기와 반칙으로 무장한 요물만이 남아서 요정 같은 모습으로 애원하듯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커다란 그가 상체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선배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 좀 친 건데. 봐주면 안 돼요?”
“이제 안 그럴 거야?”
“…….”
윤기는 대답이 없었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거짓말은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정말 나랑 말 안 할 거예요?”
“할 거야. 주장하고 어떻게 말을 안 해.”
윤기가 슬그머니 손깍지를 껴 왔다.
“이거 놓지? 어느 팀 주장이 단장한테 이러나.”
“밤에 단둘이서 산책 안 나갈 거예요? 난 그것만 기다리면서 버티고 있는데.”
그녀의 손등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에선 갈망과 애탐이 묻어났다.
“이제 진지하게 주장으로 돌아갈게요. 그러니까 밤에는 단장이 아니라 내 여자로 있어 줘요. 응?”
“생각해 보고.”
흥.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나가는 시호의 귓불은 사과처럼 빨갰다.
윤기의 입가가 또 속절없이 위로 들렸다.
“미치겠네. 왜 저렇게 귀여운 거야.”
그는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긴 다리로 시호의 뒤를 쫓았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모두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에게 내부를 안내받고 있었다.
“……그리고 샤워실 안쪽 문을 열면 편백나무로 제작한 사우나도 있으니 언제든지 이용하시면 됩니다. 카운터 음료 냉장고 안에 있는 것 전부 무료 제공이니까 언제든 이용하셔도 되고요.”
“우와아! 대박!”
“강당 안에 샤워실이 다 있네요?”
“저희 지사장님께서 친한 친구의 입김이 들어간 특별 주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이슨이다. 시호와 윤기는 서로 마주 보았다.
그런 그들을 발견한 임 감독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 단장님과 주장님 오셨구먼.”
“늦어서 죄송합니다. 면수건을 다른 가방에 넣어 둔 것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뭐, 죄송할 것까지야. 그럼 내부는 이쯤 둘러보면 됐으니, 이제 정렬할까?”
자, 정렬!
임 감독의 호령에 선수들이 마룻바닥에 일렬로 마주 서서 정좌하며 호구를 착용할 준비를 했다.
어쩌다 보니 윤기를 비롯한 세 명의 남자 선수들이 왼쪽에, 세 명의 여자 선수들과 막내 승재가 오른쪽에 서로 마주 앉게 되었다.
임 감독과 용진도 각자의 장비를 가져와 진지한 자세로 착용하기 시작했다.
도복을 입고 있지 않은 사람은 시호뿐이었다.
어쩐지 소외감이 들었다.
나도 저쪽에 속해 있다면 좋을 텐데.
선수들에게서 희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시호도 익히 알고 있는 기대 어린 긴장이었다.
캐나다에서 기적처럼 누렸던 그 순간이 떠오르니 쓰림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그때처럼 호구를 쓸 수 없었다.
밴쿠버에서는 격렬하게 훈련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과의 대련이기에 발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움직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프로 선수들의 훈련 시간이다. 자신을 배려해 달라며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시호는 심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자며 씁쓸한 속을 달랬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둘이었다.
하나는 왼편의 윤기, 다른 하나는 오른편의 승재였다.
윤기의 시선은 언제나 시호를 따라갔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
한편, 윤기의 맞은편에 앉지 못한 승재는 아쉬운 마음에 힐끔힐끔 그를 훔쳐보다가 주장의 시선이 자꾸만 향하는 곳을 무심결에 쳐다보았고, 그러다 발견하게 되었다.
윤기의 시선은 촬영을 맡은 지우와 심판을 맡은 시호가 나란히 서 있는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하도 가까이 붙어 있어서 둘 중에 누구를 보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짐작건대 아마도 시호인 듯했다.
지우는 아직도 윤기를 어려워하며 쩔쩔매는 반면에 시호는 우이고 선후배 사이이며 차를 함께 타고 올 정도로 친하다.
윤기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보게 된 시호의 표정은 무척이나 쓸쓸했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이 보아도 공허함이 느껴지는데 윤기는 오죽할까.
‘무슨 고민 있으신가?’
아무래도 선수단을 운영하는 사람이니 이런저런 애로 사항이 많을 것이다.
‘내가 더 열심히, 잘해야지.’
단장님의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기 위해 결심한 일이 윤기를 자극하는 도화선이 될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승재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 준비 다 됐으면 시작한다!”
준비운동인 연격은 현재 앞에 있는 사람과 진행했다.
“연격!”
“연격! 하나! 머리!”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죽도가 일제히 위로 들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지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촬영에 들어갔고, 시호도 날카로운 눈으로 선수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살폈다.
최대한 객관적이려 노력했지만 윤기에게 시선이 한 번 더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인이어서도 그렇지만 선수로서도 확실히 특출한 사람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과 강한 힘을 실어도 가볍게 내리치는 것처럼 보이는 힘의 조절이 무척 능숙했다.
동시에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윤기와 무척이나 닮아 있는 승재였다.
“어쩜 저렇게 닮았지.”
촬영을 하던 지우가 제게 건넨 말인 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네?’ 하고 물었다.
“단장님,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아니, 혼잣말이었어. 윤기와 승재의 자세가 많이 닮아서. 신기하네.”
그들을 유심히 살피던 지우가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칼코마니 같아요! 신장이랑 체격도 비슷해서 완전 쌍둥이 같은데요?”
그 말, 윤기가 들었다면 정말 싫어했겠다…….
아마 지우는 그의 눈빛 레이저 공격에 형체도 없이 바스러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 사람의 움직임은 정말로 한배에서 나온 형제처럼 판박이였다.
“대련하면 어떨지 궁금해요. 현승재 선수님은 대학 땐 그리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는데, 4학년이 되면서부터 실력이 급성장했다고 했어요.”
“선수님이라고 불러?”
“네에, 아직은 좀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쑥스러움이 많은 지우가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기윤기 주장님 영상을 꾸준히 보다 보니까 몸에 축적되었나 봐요.”
“언제 그렇게 대화를 나눴어?”
그러자 지우의 뺨이 더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버,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거든요.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몸을 비비 꼬는 지우를 보며 시호는 픽 웃었다. 좋을 때네. 풋풋하고.
“보기 좋다.”
“네? 아, 아니에요! 그런 사이가 아니라!”
“같은 소속팀으로서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한 건데. 내가 실례되는 말을 했나?”
“아! 그, 그런 뜻이었구나.”
시호는 이쯤에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더 놀렸다간 지우의 얼굴이 터질 것 같아서다.
다시 윤기와 승재를 눈에 담던 시호가 임 감독과 용진에게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첫 순서로 윤기와 승재를 대련시키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