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선발전 이후로 선배 입에서 부쩍 그 이름이 자주 들리는 듯하네요.”
“그래? 딱히 그런 것 같지는…….”
“그날도 옆에 자주 붙어 있었죠. 딱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던데.”
어쩐지 윤기의 눈빛에서 서슬 퍼런 칼날이 비치는 듯해서 시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랑을 나눈 후 중간중간 짧은 휴식(?)을 가질 때마다 그들은 선수들에 대해 논의했다.
둘이 있을 때 다른 사람 이름을 꺼내는 것을 싫어하는 윤기지만, 아무래도 주장이라는 직책을 맡다 보니 선수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코치진과 함께 훈련 시스템을 세워 놓기는 했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선수들에 맞게 이것저것 변경될 사항이 많을 터였다.
혼란이 커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성향을 미리미리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시호는 모든 선수들의 이름을 골고루 말했으나 윤기의 귀에는 신경이 쏠려 있는 ‘현승재’라는 이름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뜬 윤기는 위험한 열기를 뿜어냈다.
“그건 너 때문이야.”
윤기가 미간을 좁히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너한테 말을 걸고 싶은데 쑥스럽고 무서워서 근처만 빙빙 맴돈 거야. 나한테 계속 너 멋있고 닮고 싶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런 식으로 선배를 유혹했군.
대학을 갓 졸업한 햇병아리가 쓸 법한 전략이다.
선배 선수의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그녀의 호감을 사는 것.
시호의 눈에는 승재가 귀엽게 보였던 게 분명하다. 그러니 상대를 해 준 것일 테지.
물론 고등학생일 때부터 모든 팀원들의 얘기를 하나하나 귀담아듣던 시호였다.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혹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일단은 잠자코 말을 들어 주었다.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시호의 태도에 어느새 상대방은 저도 모르는 새 그녀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시호의 면모는 한편으로 그를 위협하는 무기도 되었다.
그런 애송이에게 시호를 뺏길까 봐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신경을 쓸 정도로 거슬리기는 했다.
윤기는 시호의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싸다가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알아주세요. 제가 질투심이 아주 많다는 걸.”
시호가 눈을 크게 떴다.
“선배의 눈이 닿는 곳 전부 다 신경 쓰일 정도로.”
붙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당긴 윤기가 시호를 품에 안고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다른 선수들에게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도 간간이 날 떠올려 줘요. 내 신경은 온통 서시호만 따라다니니까.”
***
낮 12시.
무영관 앞에는 45인승 대형 리무진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저마다 가방이나 캐리어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는 선수들의 표정에서 기대감이 엿보였다.
“우와, 우리 단장님 클라스!”
“인원은 열네 명인데 저렇게 크고 고급스러운 리무진 버스라니.”
“임원진 가까이에 앉아서 눈치 보지 말고 쾌적하게 가라는 뜻에서 준비하신 거래. 대박이지.”
“호구가방 다 넣어도 트렁크 넉넉한 거 봤어? 거기 앉아서 가도 되겠더라.”
“나 전 소속팀에서는 선수들이 알아서 이동해야 한 적도 있었는데.”
“나도! 그때에 비하면 진짜 출세했다, 우리.”
“나 무영단에 뼈를 묻을 거야. 단장님한테 영원히 충성해야지.”
붉은 SUV 차량이 무영관 대문 왼쪽 옆 주차장에 정차했다.
문을 열고 내리는 두 사람을 보며 선수들은 와아, 하고 입을 벌렸다.
베이지색 슬랙스와 흰색 린넨 셔츠를 입고 연한 핑크색 카디건을 어깨에 두른 산뜻한 차림의 시호와, 여느 때처럼 트레이닝복을 입었지만 어쩐지 더 멋있어 보이는 윤기는 꼭 화보에서 튀어나온 모델 커플처럼 잘 어울렸다.
신장 차이도, 체격 차이도, 서늘한 이미지도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조합이었다.
“되게 멋있다…….”
“화보 촬영 가는 연예인과 스태프 같아요, 지금 우리 상황.”
수원과 태홍도 넋을 놓고 속삭였다.
“난 기윤기 초딩 때부터 봐 왔어도 날마다 새롭다.”
“미 투. 농담으로라도 못생겼다고 할 수가 없는 미친 얼굴.”
“선배도 멋있는 건 알았지만 둘이 나란히 서니까 진짜…… 와.”
모두의 시선이 자신과 윤기를 향하자 시호는 민망해져서 괜히 목을 크흠, 가다듬었다.
“목 아파요?”
“아니. 좀 민망해서. 오늘 나 좀 이상한가?”
“내 뒤로 와요. 평소보다 더 예뻐서 쳐다보는 거니까.”
윤기의 말에 더욱 민망해진 시호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유혹하는 건가? 귀엽게.”
“너 남들 앞에서도 그러기만 해 봐. 단장 위엄 깎아 먹으면 깎아 먹을수록 훈련 고될 줄 알아.”
“기대되는데요. 시호가 어떻게 얼마나 벌을 줄지.”
“흐즈 므르, 즌쯔.(하지 마라, 진짜.)”
시호가 이를 악물며 조용히 읊조리자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여기저기서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주장이 웃을 줄도 아는 분이셨구나.”
“그러게. 처음 봐. 엄청 무서우신 분인 줄 알았더니, 단장님한테는 되게 다정하신데?”
“같은 우이고 출신이니까 친하신가 봐.”
주위에서 소곤거리는 말에 수원과 태홍이 시선을 교환했다.
“근데 두 사람, 사귄다고 밝히기로 했었나? 저건 암만 봐도 ‘우리 지금 사귀고 있어요’인데.”
“긴기 인스타 만든 거 보면 딱히 감출 생각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선배님이랑 윤기가 말할 때까지 우리는 입 다물자.”
“오케이. 입 잘못 놀렸다간 기윤기한테 된통 털리지. 뼈도 못 추릴 듯.”
시호와 윤기에 뒤이어 임 감독이 도착하자 무영단 식구들은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맨 앞 왼쪽 좌석에는 단장과 주장이, 오른쪽 두 번째 좌석에는 감독과 조리장이 앉았다.
대각선 뒤로는 코치와 부조리장이 앉아서, 지그재그로 앉은 형국이 되었다.
좌석 한 줄을 띄우고 나서는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우선 선수들끼리 친해져야 분위기가 좋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시호는 창가에, 윤기는 복도 쪽에 자리를 잡았다. 뜻대로 시호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된 윤기는 자리에 앉자마자 손가락을 얽어 왔다.
당황한 시호가 움찔거리며 쳐다보자 그가 씩 웃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안 보입니다. 그러려고 지그재그로 앉자고 했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건 각자 눈치 보지 말고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라는 뜻으로…….”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고 자유롭게 하자, 시호야.”
그가 그녀 쪽으로 은근히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귓가가 간지러웠다. 시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러자 윤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느끼는 것 같은데.”
“무슨……!”
“선배 그 표정. 딱 침대에 누워서 키스하기 직전이거든.”
얼음인간 기윤기의 뜨거운 속살거림에 선선한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더워졌다. 시호는 어깨에 둘렀던 카디건을 풀어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기대서 좀 자요. 피곤하잖아.”
“누구 때문인데.”
“그러니까 어깨 빌려 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장난스럽게 웃는 윤기가 눈부셨고 그만큼 얄미웠다.
얼굴은 쓸데없이 왜 저렇게 빛나나. 토라진 척도 못 하게.
“그동안 나 못 놀려서 무슨 재미로 살았어?”
“그래서 재미없게 살았지. 서시호가 옆에 없으니까.”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이제 눈 감아요. 도착하면 단장님 위엄 유지할 수 있도록 깨워 줄게.”
부드러운 속삭임에 속이 간질거린다. 둘만 있는 공간도 아닌데 마음이 허물어지려고 해서 시호는 입가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한편, 맨 뒷좌석을 사수한 태홍과 수원은 입을 떠억 벌리고 서로를 보았다.
“야, 우리가 여기 안 앉았으면 저 사람들 어쩌려고 저러냐.”
“진짜 크게 한턱 쏴야 한다.”
“으악! 기윤기가 우리 주장님 이마에 뽀뽀하는 모습을 보다니! 적응 안 되고 어색하고 오글거려서 미치겠다!”
“나 도착하자마자 바다에 들어가려고. 이대로는 말라비틀어질 듯.”
친구들의 대화를 알 리 없는 윤기는 리조트에 도착할 때까지 시호가 편히 잘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살폈다.
***
도착 장소에 거의 다 왔다는 기사의 말에 윤기는 시호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선배, 이제 일어나야 해요. 거의 다 왔어.”
“으응…….”
평소와는 달리 잠투정을 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피곤했나 보다.
‘귀여워.’
그녀를 더 재우고 싶었지만 윤기는 아쉬운 마음으로 시호를 깨웠다.
천천히 올라가는 눈꺼풀 밑으로 몽롱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다 왔어……?”
“예. 5분 후면 도착한답니다.”
“엄청 편하게 잤어. 침대에서 잔 줄 알았다니까.”
아직 잠이 덜 깬 시호가 배시시 눈을 접으며 웃었다.
“고마워, 우리 윤기.”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고 쪽 입을 맞춘 시호는 팔을 위로 쭉 뻗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진짜 단잠 잤어. 온천이라도 갔다 온 기분이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시호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윤기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왜 그래?”
손으로 입가를 가린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어깨 아팠어? 팔 저려?”
“아니, 그게 아니라.”
하아. 그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예쁘게 웃어 주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워크숍 내내 어떻게 참으라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인내와 고난의 시간이 시작될 텐데.
윤기가 시호의 손을 꽉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밤에 꼭 둘이서만 산책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