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62화 (62/81)

제62화

“뭘 보고 계셨습니까?”

낮아진 윤기의 목소리와 깍듯한 존대는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증거였다.

시호의 어깨를 붙잡은 커다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 밥 먹는 동안 선수들 영상 분석하고 있었어. 가장 경험이 없는 선수 순서대로 보고 있던 참이야.”

“…….”

“윤기야, 나 어깨가 좀.”

아. 윤기는 얼른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나 굳은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리갈패드로 향했다.

승재에 대해 이런저런 코멘트를 써 놓은 그녀의 글씨체.

시호가 아침부터 저 아닌 다른 남자를, 그것도 이렇게 세세하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께 선발전이 열렸던 날에도 승재는 유독 시호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시호의 곁에 있으면 잠깐 떨어져 있더라도 윤기가 다시 그녀의 근처로 왔기 때문에, 승재는 혹시 윤기와 한마디라도 섞어 볼 수 있을까 싶어서 내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윤기는 그때부터 어쩐지 승재가 거슬리던 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시호의 태블릿 화면에 떡하니 승재의 얼굴이 일시 정지 된 상태로 박제되어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샐러드를.”

먹으면서도 꼭 현승재를 봐야 합니까?

이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시호는 단장이고 자신은 주장이다. 이런 유치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 어차피 시간도 별로 없고 간단하게 먹고 싶어서. 대신 영양소는 골고루 들어갔으니까 걱정하지 마.”

윤기의 말을 ‘아침을 너무 부실하게 먹는 것 아니냐’는 걱정으로 알아들은 시호가 괜찮다는 듯 그의 팔을 붙잡고 흔들며 말했다.

“부산댁 아주머니랑 미연 언니가 도착하자마자 상다리 휘어지도록 진수성찬 차려 준다고 했거든. 그래서 좀 가볍게 먹었어.”

“……가면 제대로 먹기로 약속하는 겁니다.”

“응, 걱정 마. 너무 놀라지나 말아. 나 엄청 많이 먹을 거거든. 참, 넌 아침 먹었어?”

“저도 간단하게 먹고 왔습니다. 선배가 아직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일어나서 놀랐어요.”

“나도 모르게 설렜나 봐. 워크숍을 피크닉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야, 내 무의식은.”

대학교 4학년 때, 발목을 다치기 전 참여한 하계 훈련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단체 활동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비록 명목은 훈련 방향과 단체의 방향성을 논의하는 워크숍이지만 어쨌든 함께 떠난다는 사실은 시호를 들뜨게 만들었다.

워크숍 장소는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어 경관이 예술이라고 소문난 동해의 고급 리조트였다.

후원사 체결 기사 발표 시기에 대해 조율하려 통화를 하던 중, 워크숍을 앞두고 있다는 시호의 말에 제이슨이 제이크래프트와 제휴를 맺은 글로벌 호텔&리조트 그룹의 한국 체인과 연결해 주었다.

[아직 계약서 쓰기도 전이에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하루라도 빨리 무영단 후원사라는 거 알리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거든요. 애들이 서 단장님이랑 기윤기 선수 보고 싶다고 매일 노래를 부릅니다.]

[저희도 너무 보고 싶어요. 일정 조율해서 친선 경기라도 가지면 어떨까요? 밴쿠버에서 너무 잘해 주셔서, 이번에는 저희가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좋지요! 저희 애들 모두 한국을 좋아하지만 한국에 가 본 친구들은 별로 없어서 아주 좋아할 겁니다. 음, 교류회를 하려면 우선 로건 입단속부터 시켜야겠군요. 하하.]

시호는 웃음으로 제이슨의 말에 동의했다.

[장소 제공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그럼 친선 교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지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제이슨이 말해 준 리조트의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살펴보니, 정말로 경관이 무척 근사했고 시설도 아주 훌륭했다.

투숙객들의 평가도 아주 높아서 기대가 더욱 커졌다. 선수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하루 빨리 가고 싶었다.

“힘든 훈련은 선수들만 하니까 더 신났나 봐.”

“서시호 단장님은 이틀 동안 저와 강도 높은 훈련을 하셨으니 푹 쉬셔도 됩니다.”

머릿속에 그와의 뜨거운 시간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볼이 붉어진 시호가 하아아, 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 나도 훈련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대련을 쉬지 않고 열 번 연속 이어서 한 것 같았어.”

“그래서 싫었어요?”

답을 알고 있는 듯한 은근한 눈빛과 입가에 비스듬히 걸린 미소에 윤기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 빛났고, 또 그만큼 얄밉게 느껴졌다.

“……이럴 때면 너 한 대 때려 주고 싶어.”

“시호가 때리고 싶다면 맞아야지.”

시호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제 얼굴로 가져간 윤기가 그녀의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감쌌다.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선배가 하고 싶은 거면 나도 좋으니까.”

“너, 너, 밖에서는 절대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 누가 보면 내가 때리는 거 좋아하는 변태라고 오해하기 딱 좋다고, 지금!”

“아니었습니까?”

“참나. 내가 언제 때린 적이라도 있다는 말투야, 지금.”

“학생일 때 많이 때렸잖습니까. 맞을 때 나던 강한 마찰음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대련했을 때를 그렇게 말하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냐? 그러는 너도 죽도로 나 때렸잖아. 그리고 변태는 내가 아니라 너거든? 밤새 한숨도 안 재우고 온몸에 계속 자국 남긴 게 누군데.”

‘당신이 승재의 영상을 보고 있어서 질투가 났다’고 말할 수 없던 윤기는 그녀에게 강렬한 기억을 심어 주어서 저 외에는 누구도 쉽게 떠올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쪽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제게 곱게 눈을 흘기는 시호의 손목을 붙잡은 윤기는 손목 안쪽, 푸른 정맥이 드러난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빨아들였다.

뜨거운 입술의 온도가 손목 위에 낙인처럼 스며들었다.

이윽고 윤기가 그녀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시호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제 곧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겠지.

그러다 축축하고 유연한 근육이 아랫입술을 살짝살짝 핥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틈을 벌려 매끈하게 들어올 것이다.

그럼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주저앉지 않으려 그의 목을 감싸…….

감싸 안아 지탱하는 것이 순서인데…….

눈을 감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시호는 살며시 눈을 떴다.

윤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만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관찰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모공 개수를 세려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에서 눈동자를 도륵도륵 굴리며 세심히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으음.”

윤기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더러 변태라고 한 여자가 변태처럼 음흉한 표정을 짓고 기대에 차서 입술을 내미는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꽤 흥미롭네요. 서시호에게 이런 오리 같은 면모가 있을 줄이야.”

눈을 깜빡이던 시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대로 약이 올랐다는 신호다.

윤기는 픽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주장이었고, 선수로서 정점에 서 있던 시호에게 감히 장난을 치거나 놀리는 사람이 없었던 탓인지 그녀는 의외로 조금만 건드려도 재밌는 반응을 보였다.

놀림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탓에 아주 사소한 장난에도 지금처럼 볼이 상기되고 눈가를 파르르 떨며 분해했다.

그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윤기는 시호를 자주 놀렸고, 그녀가 분해하면 귀여워서 이내 참지 못하고 와락 끌어안아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기 일쑤였다.

이대로 그녀를 안고 침실로 향하여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기억이겠지만.

이틀 내내 제게 시달린 시호는 피곤한 상태였고 오후에는 워크숍도 있었다. 해서, 윤기는 시호를 놀리는 쪽을 택했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지금 시호는 머릿속에 다른 사람을 떠올릴 틈이 없을 정도로 분해하고 있었다.

“너, 지, 지금 나한테 변태라고 했어?”

시호는 당황스러움과 분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면 말을 더듬곤 했다. 이럴 땐-고작 삼십 분도 안 되어 풀어지기는 했지만-토라져서 제게 등을 돌리고 일에 매진했다.

그 모습이 또 지나치게 귀여워서 미소를 지은 채 옆에 붙어서 얼굴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시호는 윤기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못 이겨 먼저 입을 열어 버리곤 했다.

가장 오래 버텼던 시간이 삼십 분이었다.

“변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변태처럼 음흉하다고 했지.”

웃음기 어린 말에 시호가 입을 꾹 다물더니 픽 고개를 돌렸다.

“버스에서 따로 앉아. 네 옆에 안 앉을 거야.”

순식간에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윤기의 흉흉한 기운에 잠시 눌릴 뻔했지만, 시호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여기서 지면 안 돼. 그럼 앞으로 기윤기가 놀리는 정도가 더 심해질 거야.

‘기선을 제압해 주겠어.’

쓸데없이 승부욕에 휩싸인 시호가 턱을 치켜 올리고 도도하게 말했다.

“불안해서 변태랑 어떻게 나란히 앉아 갈 수 있겠어, 그 긴 거리를.”

“주장과 단장 간 의사소통이 긴밀하고 원활해야 선수들에게도 좋을 텐데요.”

“그러니까 감독님과 코치님이 계시는 거지. 변태와는 거리가 먼 두 분과 긴밀하고 원활한 대화를 나누도록 해.”

“내가 아니면 누구와 앉으려고? 감독님은 조리장님과 식단 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고 하셨고, 코치님께서는 부조리장님인 아내분과 같이 앉으실 텐데요.”

엇. 잠시 말문이 막힌 시호는 이내 한 사람을 떠올렸다.

“지우 옆에 앉을 거야. 홍보 마케팅 전략 전술을 의논하면서 아주 전략적인 시간을 보낼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미간을 좁힌 윤기는 수원을 팔아먹기로 했다.

“수원이가 영상 편집에 대해 지우 씨한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태홍이랑 앉을 거야.”

“주건희 선수와 앉을 거라던데.”

끙.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선수들에 대해 이렇게 속속들이 잘 파악하고 있는 애를.

어쨌든 꽤나 주장다운 윤기의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살짝 모양이 빠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호는 무심결에 테이블을 보았다.

“그럼 승재랑 앉지, 뭐. 마지막으로 영상 분석한 대상이기도 하고, 나한테 조언을 듣고 싶다고 했었거든. 우리 선수단 막내와 가까워지는 보람된 시간을…….”

방금보다 더욱더 흉흉, 아니 흉흉을 넘어서 흉악해진 윤기의 분위기에 시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어째 더 말했다간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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