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잠깐의 정적 후.
고개를 숙인 윤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런 말이 나와 버린 거야!’
이보다 더 얼굴이 빨개질 수 없는 시호였다.
“우, 웃지 마!”
하지만 윤기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매일 제게 미안해하셔야겠습니다.”
윤기가 시호를 끌어안고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시호는 매일 귀여우니까.”
내가 미쳤지. 속이 체한 거지,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잖아, 서시호야. 응?
‘이건 몇 달 치 놀림감이다…….’
망연자실한 시호와는 다르게 윤기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내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 아픈데, 계속 그렇게 웃고 있을 거야?”
“음, 마음은 찢어지는데 입가는 왜 자꾸 올라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시호가 등을 돌렸다.
“너 매일 놀릴 거지.”
윤기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어깨에 촉, 입을 맞추었다.
“시호가 그날 얼마나 귀여우냐에 따라 다르지.”
“아, 진짜!”
다시 웃음이 터진 윤기. 그 맑고 청량한 소리에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시호도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체해도 즐거울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오늘이었다.
***
한 주가 지난 뒤.
연교시청과의 계약이 종료된 윤기와 수원, 태홍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윤기는 곧바로 무영단과 계약을 맺었고, 수원과 태홍은 선발전을 대비하여 바짝 훈련에 매진했다.
선발전에서는 총 다섯 명의 선수가 선출되었다. 남자 선수가 세 명, 여자 선수가 두 명이었다.
이로써 무영단의 선수는 윤기와 스카우트로 선발된 남녀 선수 각각 한 명을 합하여 총 8명이 되었다.
남자 선수 세 명 안에는 수원과 태홍도 들었다. 인연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실력만으로 선출된 결과였다.
“매일매일 동영상 찍으면서 열심히 훈련하더니, 짧은 기간 내에 정말 많이 늘었다. 고생 많았어.”
시호의 칭찬에 그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 너희 우는 거야?”
“갑자기 긴장이 풀리네요, 흑, 눈물이 저절로…….”
“그동안 진짜… 마음고생 엄청 했거든요……. 불합격하면 어떻게 하나 잠도 못 잤는데…….”
덩치만 컸지, 아직도 고등학생 때랑 똑같았다.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여지없이 눈물을 흘리던 태홍과 수원이었다.
귀여운 녀석들. 시호는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도닥였다.
“수고했어. 순전히 실력으로 뽑힌 거니까 기뻐해도 돼. 감독님이랑 코치님도 너희가 엄청 기대된다고 하시더라.”
“흐으윽, 선배님……!”
태홍과 수원이 양쪽에서 시호를 끌어안으려 할 때.
그녀의 몸이 뒤로 쑥 빠졌다.
제 등 뒤에 시호를 둔 윤기의 왼쪽 눈썹이 위로 삐딱하게 들렸다.
“긴기!”
“흐윽, 마이 브라더……!”
친구들은 꺽꺽 울 때면 꼭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안는 버릇이 있었다.
그들은 시호 대신 윤기를 끌어안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이들이 시호를 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우이고 3인방이 회포를 푸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시호에게 남자 선수들이 다가왔다.
“단장님, 안녕하십니까! 현승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선발전에서 1등을 한 승재는 대학을 막 졸업한 선수였다. 그만큼 실력과 배포가 대단했다.
“아, 현승재 선수. 축하해요. 같이 잘 해 봐요. 저도 열심히 서포트하겠습니다.”
시호가 손을 내밀자 귓불이 붉어진 승재가 수줍게 손을 맞잡았다.
“…….”
수원과 태홍에게 시달리고 있던 윤기가 그 장면을 보고 언짢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시호는 자신의 연인이기도 하지만 이제부터는 무영단의 단장이기도 하다.
선수와 단장 사이를 일일이 질투했다간 끝도 없을 것이다. 같은 소속팀인 이상 매일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분간 인고의 나날이 계속되겠다고 윤기는 생각했다.
그리고 더 문제는.
“단장님! 정말 존경합니다!”
“저, 중학교 때부터 단장님 동영상 보면서 검도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시호에게 달라붙는다는 거였다.
전(前) 용산구청 소속 차현아와 대학을 막 졸업한 공단아가 꺅꺅거리며 다가왔다.
시호를 둘러싼 그들은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잔뜩 흥분해 있었다.
이래서야 앞으로 시호와 둘만의 시간은 끽해야 주말밖에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0월 전국체전만 지나 봐라.’
***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던 윤기가 이내 격렬하게 헤집으며 시호를 바짝 끌어안았다.
아까부터 참고 또 참았다.
시호가 예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대할 때도, 제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부끄러워할 때도.
“잠은 워크숍 가는 버스 안에서 자요, 선배. 어깨 빌려 줄 테니까.”
감은 눈꺼풀 위에 살짝 입을 맞춘 윤기는 앙증맞게 솟은 콧등을 지나 붉게 물든 뺨을 거쳐 다시 벌어진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붙었다 떨어지는 야릇한 소리가 그들의 신경을 더욱 자극했다.
살갗과 살갗이 맞닿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야릇한 감각에 못 이긴 시호는 윤기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아찔함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워크숍을 다녀오면 무영단이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된다. 필연적으로 둘만의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고 또 아쉬워서 그들은 더욱더 격정적으로 서로를 잡아당겼다.
뽀얀 어깨에 입을 맞춘 윤기는 자신이 남긴 흔적을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시호가 손을 뻗어 자신의 뺨을 감싸자, 윤기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손목 안쪽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워.”
그녀가 눈을 휘며 웃었다. 윤기도 따라 미소하며 시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팔베개를 해 주었다.
제 품에 감기듯 안겨 오는 시호가 못내 예뻐서 윤기는 심장이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있잖아. 우리 사이…… 밝혀야 하나?”
고민하던 시호가 입을 열었다.
“여기저기 잘도 놀러 다녀 놓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게 될 것 같은데.”
“왜?”
시호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이자 윤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 시선이 계속 당신만 좇을 테니까.”
그녀의 뺨을 감싸고 다시 깊게 입을 맞춘 윤기는 몇 번이고 집요하게 머금고 난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가, 갑자기 뭐야…….”
“당신이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기윤기가 익숙해질 날이 있을까 싶다. 눈을 사르르 접으며 저런 말을 하면 홀리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잘 참을 수 있을 거야. 인내와 절제 면에선 기윤기를 따라갈 사람이 없고, 또 이제 주장님이니까.”
임 감독은 윤기가 주장을 맡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코치인 용진도 대찬성이었다.
시호 역시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혹여 윤기에게 너무 무거운 책임감을 지워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윤기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을 위해 원치 않는 희생을 한 것은 아닐까, 시호는 걱정이 되었다.
“윤기야, 혹시 정말로 원하지 않는 거였다면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어.”
“제가 원해서 하는 겁니다. 주장이 되면 단장실에 자주 심부름을 보내 주겠다고, 감독님께서 제안을 해 주셨거든요.”
장난스러운 말에도 시호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거야?”
윤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호를 보았다.
“흐음. 오늘 선발전에서 저 말고 주장을 맡기고 싶은 선수가 있었던 겁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선배가 원해서 무영단을 맡았듯이, 나도 원해서 맡은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서시호 곁에 있고 싶으니까.”
윤기가 사르락 앞으로 넘어온 시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우승할 자신이 있기도 하고.”
그 말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기윤기가 아니면 누가 금메달을 거머쥔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아직 워크숍까지는 만 하루가 남아 있는데.”
시호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커다란 손이 허리를 타고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아…….”
은밀하게 지분거리는 손길에 시호가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하던 거 마저 계속하죠. 아까부터 참느라 죽는 줄 알았으니까.”
참긴 뭘 참았다고 그래, 라고 항의하려던 시호의 입술은 가볍게 먹혔다.
***
시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침 9시였다.
온몸이 다 뻐근해서 이대로 다시 침대에 눕고 싶었다. 윤기가 놔주지 않은 탓이다.
밤새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났더니 온몸이 쑤시고 화끈거린다.
“으으…… 찌뿌둥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윤기는 아침 운동을 나간 듯했다.
“도대체 언제 나간 거지?”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서 나갔으니 수면 시간은 기껏해야 한두 시간일 터였다. 게다가 워크숍 당일 아침까지 운동이라니.
“참 기윤기답다니까.”
스트레칭을 마친 시호는 이불을 정리하고 욕실로 향했다.
“버스에서 곯아떨어질 것 같은데.”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는 동안 하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세수를 할 때만 번쩍 들었던 정신은 다시 몽롱한 수면의 세계로 빠져들기를 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속이 비어서 더 그런 듯했다. 시호는 드라이어를 정리한 후 부엌으로 가서 간단히 과일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태블릿으로 선수들의 시합 동영상을 보았다.
그저 뒤로 물러나 후원만 해 주고 행사 때만 얼굴을 비치는 단장이 아니라, 선수들과 부대끼며 그들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제공하는 서포터이고 싶었다.
임 감독과 용진에게 이런 뜻을 잘 설명했고, 그들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시호 정도의 인재를 놀게 놔둘 수는 없지.]
[그럼요. 어디, 은퇴한 레전드 선수 좀 팍팍 굴려 볼까요, 감독님?]
사실상 시호도 코치진이나 다름없었다. 선수들도 기뻐하며 그녀를 반겼다.
시호는 우선 대학을 졸업한 선수들의 동영상부터 보았다. 프로의 세계로 발을 떼기 전 나쁜 버릇이나 고쳐야 할 자세를 교정해 주고 싶었다.
가장 먼저 여자부 공단아 선수의 영상을 분석한 뒤, 남자부 현승재의 영상을 틀었다.
185cm가 넘는 장신에 체격이 다부진데도 빠른 몸의 움직임, 긴 팔을 이용한 원거리 타격, 웬만해서는 밀리지 않는 강한 하체의 힘까지.
“기윤기 판박이네? 신기해라. 신체 조건까지 닮기는 힘든데.”
더더욱 승재에게 기대가 되었다.
주장인 윤기를 가까이에서 보고 배운다면 몇 년 안에 엄청난 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시호는 확신했다.
승재의 영상을 보며 리갈패드에 바쁘게 글씨를 휘갈기고 있는 도중, 현관 벨이 울렸다.
월패드에 윤기의 모습이 보이자 시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왔어?”
윤기가 시호를 보자마자 끌어안고는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샤워를 마치자마자 왔는지 시원한 보디 제품의 향기가 물씬 풍겨 왔다.
“운동하고 온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호가 와아, 하며 감탄했다.
“잠도 별로 못 잤으면서……. 오늘 워크숍 가도 괜찮겠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윤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 체력을 의심하시는 모양인데. 어젯밤이 별로 힘들지 않았나 보군요.”
시호가 눈을 크게 뜨며 팔을 붕붕 내저었다.
“아냐, 충분히 잘 알고 있어!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릴 정도로 힘든걸.”
힘들다는 말에 윤기가 시호의 어깨를 감싸 안으로 이끌었다.
“준비는 다 했어요?”
“아니, 아직. 아침으로 샐러드 먹고 있었어.”
“짐은 제가 쌀 테니까 선배는 쉬고 있어…….”
거실로 들어가던 윤기는 테이블 위에 놓인 태블릿을 보고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화면은 호면을 옆구리에 낀 승재가 리포터의 질문에 대답하려 입을 막 벌린 상태로 정지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