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60화 (60/81)

제60화

솔직히 말해야겠지?

하지만 갓길에 차를 너무 오래 세워 두었고, 윗배도 다시금 아파 왔다.

“우리 일단 집으로 갈까? 여기서 계속 얘기하기는 좀.”

아까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시호의 얼굴은 여전히 희게 질려 있었다.

윤기는 시호에게 안전벨트를 매어 주고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주차를 마친 윤기는 빠르게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고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당연한 일을.”

시호가 커다란 손을 붙잡고 내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져간 그가 시호의 어깨를 끌어안아 지탱했다.

두 사람은 시호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집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인데도 윤기는 시호가 유리로 만든 사람이라도 되는 듯 세심하게 보살폈다.

“천천히 목 안으로 넘겨 봐요.”

소화제의 뚜껑을 열어서 시호에게 건넨 윤기는 그녀가 남기지 않고 다 마시는 것을 지켜본 후 침실까지 번쩍 안아 들었다.

“내가 걸어가도 되는데.”

“다 낫기 전까지 선배 발이 땅에 직접 닿을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다소 엄한 말투였지만 시호는 심장이 간질거렸다.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신경 써 주는 윤기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어릴 때도 이렇게 신경 써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 아빠는 바쁠뿐더러 아픈 것을 들키면 운동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에 절대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휴식에 익숙해진 몸은 금세 뒤처졌다.

시호는 아파도 아파할 수 없었고, 결혼을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세상이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었다.

시호를 침대에 눕힌 윤기는 트레이닝복의 저지를 벗어 의자에 걸어 놓은 뒤, 그녀의 옆에 앉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마치 자기가 더 아프다는 듯 힘이 꾹 들어간 미간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마에 넘어온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는 그의 손길은 강인한 생김과 다르게 무척이나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좀 체한 건데, 누가 보면 큰 수술이라도 하고 난 사람인 줄 알겠다.”

“제겐 선배가 아프면 경중에 상관없이 심각합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기가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손에 무언가를 쥐고 금세 돌아왔다.

시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커플링을 끼워 준 윤기의 눈가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앞으로는 까먹지 말아요. 또 빼먹으면 혼내 줄 거니까.”

“혼내 줄 거라고?”

시호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어떻게 혼내 줄 건데?”

그의 눈동자에 위험한 빛이 감돌았다.

“알고 싶어요?”

“응. 궁금한데?”

“지금은 좀 위험할 텐데. 컨디션도 안 좋고.”

붉은 입술을 뭉개듯이 문지르는 그의 손끝에서 야릇한 의도가 느껴졌다.

몸 상태만 괜찮았다면 먼저 그에게 안겨 들었을 만큼 뭉근한 열기가 배 속에서 솔솔 피어올랐다.

“오늘은 선배가 다 나을 때까지 옆에 있기만 할 거니까 겁먹지 말아요.”

겁먹은 것이 아니라 기대한 거였는데.

하지만 시호는 입을 다물었다. 속을 그대로 말했다간 다 낫고 난 뒤에 윤기에게 놀림감이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지금은 격렬한 사랑을 나누기보다는, 어릴 때도 받아 본 적 없는 다정한 보살핌을 받는 편이 더 좋았다.

윤기가 시호의 손을 붙잡고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눌러 주었다.

“대회 다가오면 그 부위를 엄청 눌렀어.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너무 긴장이 되어서 조금만 먹어도 체했거든.”

멈칫하던 윤기가 다시 움직임을 이어 갔다. 방금 전보다 강도가 훨씬 약해져 있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선배가 긴장을 하는 줄은.”

“그랬을 거야. 부모님도 모르셨으니까. 아무도 몰랐어. 이따금 나 스스로도 속일 정도였으니까.”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했다. 아프다고 해서 사정을 봐주거나 물러 주는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시호는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운동을 그만두어야 하는 형편이었기에 더더욱 이를 악물어야 했다.

시호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중학교 때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습니다.”

담담하고 낮은 음성에 시호가 귀를 기울였다.

“1학년 때 학교 대표로 시도 대항전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2, 3학년 선배들이 아버지가 손을 써서 선발된 거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버지가 제게 관심이 많긴 하지만 결코 그런 쪽으로 손을 대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편법을 쓸 정도로 실력이 없으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셨던 분이니까요.”

아버지가 윤기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에 시호는 한쪽 가슴이 쓰려 왔다.

만약, 정말 만약에…… 윤기가 자신을 결혼할 여자라고 소개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설령 미소를 짓는다 해도 그것이 진심일 리 없었다. 귀하디귀한 외아들의 짝으로 ‘한 번 갔다 온 사람’은 탐탁지 않을 테니까.

시호는 결코 윤기의 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독립운동가와 학자를 몇 명이나 배출한 명문가. 거기다 할아버지는 고매한 성품의 한학자라고 했다.

매년 새해가 되면 정치권의 굵직굵직한 인사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스승인 기학윤 선생에게 인사를 드리러 연교로 향했다.

‘세월이 흘러도 공정하고 청명한 한 그루 소나무와 같은 기상’을 지닌 기학윤 선생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었고, 특히나 연교에 사는 사람들은 기학윤 선생 집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분이 ‘마녀’ 혹은 ‘취집녀’라는 별명을 가진 이혼녀를 손자의 짝으로 받아들여 집안으로 들일 리 없었다.

‘이제 20대도 거의 끝나 갈 무렵인데. 막 연애하는 중인데 벌써 결혼하고 인사드리러 갈 상상까지 하는 거야? 서시호 진짜 김칫국 너무 심하게 들이마신다.’

이게 다 얼마 전 윤기의 ‘결혼하자’는 말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자꾸만 그의 눈빛과 음성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울려 퍼져서 이런 쓸데없는 상상의 가지가 멋대로 뻗어 나갔다.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며 치고받고 싸운 적은 그게 처음이었습니다.”

윤기의 말에 시호는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와 다시 그의 말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시비를 건 것도, 먼저 주먹을 휘두른 것도 저쪽이었지만 알려진 집안이란 탓에 이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고, 갑질을 한다는 말까지 떠돌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과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절대로 내색하면 안 되겠구나. 감정도, 기분도, 그 어떤 것도. 다 흠이 될 테니까.”

시호의 결혼 소식을 접한 후에 무섭도록 차가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전에도 딱히 감정 표현이 선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 덜 차갑고 딱딱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선배와 비교할 수준은 못 되는군요.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는데 주장이라는 이유로 다 큰 어른처럼 처신해야 했을 테니.”

시호의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어린 소녀는 윤기의 위로에 비로소 활짝 웃었다. 알아줘서 고마워, 라고 속삭이며.

“그걸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어. 남들 눈엔 티끌만 한 상처도 내겐 우주만큼 커다랗다고 하잖아.”

“나한테는 서시호가 그래. 아주 자그마한 상처도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겐 우주보다 큰 아픔이니까.”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이 경건한 사제처럼 보였다.

“이제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긴장이 되면 긴장된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찡찡거려도 돼요. 해도 돼. 뭐든.”

확실하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은 제쳐 두자. 지금은 이 행복을 느끼기만도 벅차니까.

그렇게 생각한 시호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나 팔베개 안 해 줘? 아직 속 안 좋아서 끌어안고 있을 게 필요한데.”

윤기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옆에 누워 팔을 내어 주었다.

“그래, 이렇게. 잘하네, 우리 시호.”

시호를 품에 안은 윤기는 연신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안색이 괜찮아졌을 때쯤.

“그래서. 식사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윤기가 봐주는 건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인내심이 강한 시호가 이 정도로 체했다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무리한 요구라도 한 겁니까?”

무리한 요구……이기는 했지. 무려 새로운 시작을 하라며 다른 남자를 소개시켜 주었으니까.

하지만 있는 그대로 말했다간 윤기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자신을 재운 뒤 혼자서 협회장을 찾아가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냥 뭐, 신생팀이고 워낙 관심을 많이 받고 있으니까 부담스럽겠지만 좋은 성적 내 달라, 그런 거지. 단장이 되니까 그런 말도 허투루 들을 수가 없더라고.”

“정말 그게 답니까?”

여전히 석연치 않은 윤기의 표정. 시호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생각지 못한 스킨십에 그의 눈동자가 커지며 흔들렸다.

“어리광 부려도 된다더니 막상 부리니까 나한테 집중도 안 하고. 이럼 다시는 안 이럴 거야.”

시호가 윤기의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나 아직 아프다구.”

시호 나름대로는 윤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너무도 큰 자극이자 유혹이었다. 제 품에 안겨서 부루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라 말하는 시호라니.

정말이지…….

윤기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계속 시호의 말간 얼굴을 보고 있다간 저야말로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마른세수를 한 그는 시호를 꽉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서시호. 누가 그렇게 귀여우래.”

누구를 말려 죽이려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시호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를 안은 윤기의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무척 딱딱했다.

“어, 음, 귀여워서 미안해……?”

윤기가 흠칫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