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소개팅이라는 말에 시호는 위가 더 죄어드는 듯했다.
표정 관리를 하려 했지만, 수원이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변명하는 것을 보면 뜻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아! 최, 최근이 아니라요! 대학 때 아주 잠깐, 제가 억지로 끌고 가서… 윤기는 소개팅인 것도 몰랐거든요! 선배 결혼 소식 듣고 난 후로 정신이 나가 있는 게 하도…….”
“가수원.”
윤기의 낮고 시린 음성에 수원이 흡, 하며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수원뿐만 아니라 태홍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꼭 죄를 지은 것처럼 윤기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만큼 그의 눈빛과 목소리는 서늘하고 차가웠다.
“먼저 가 볼게.”
친구들은 그래, 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아냐. 저녁 먹고 들어와.”
시호가 윤기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같은데. 난 먼저 가 볼게.”
“선배.”
“나 빨리 가서 처리할 일이 있거든.”
윤기가 시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꽤나 센 악력에 조금 아플 정도였지만 시호는 내색하지 않았다.
“혼자 집중하고 싶어서 그래.”
“…….”
“수원아, 태홍아. 나중에 보자.”
미묘한 분위기에 휩싸인 그들에게로 검도복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 무리가 다가왔다.
“저기, 혹시 기윤기 선수 맞아요?”
“헐, 맞네!”
“저희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속초에서 우이고까지 원정 시합 왔거든요!”
“우와, 연교 오면 혹시 기윤기 선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희끼리 엄청 얘기했었거든요! 진짜 신기하다.”
윤기를 본 학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윤기야.”
시호는 여전히 제게 시선이 붙박여 있는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애들 기다리잖아.”
캐나다와 산청에서 돌아온 이후, 시호는 검도를 하는 아이들의 미래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다.
무영단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 본격적으로 장학금 제도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에게 무한정의 가르침과 애정을 주고 싶다고도 했었다.
만약 지금 아이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시호와 함께 사라지면 자신과 그녀를 둘러싸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떠돌 것이 분명했다.
윤기는 누가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었지만 시호가 받을 상처가 걱정되었다.
숨을 낮게 들이쉰 윤기는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몇 학년.”
“저희는 1학년 신입생입니다!”
“와, 진짜 잘생기셨어요!”
“전 여기 면수건에 사인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호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차로 향했다.
수원과 태홍이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뒤따라왔다.
“선배님,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안색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시호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좀 체한 것뿐이야. 그리고 한 달 후쯤 선수 선발전 열 거거든. 통과해서 무영단 소속이 되면 너희한테도 귀찮을 정도로 애들이 달라붙을 거니까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고.”
시호의 말에 수원과 태홍은 뭉클해졌다.
같은 연교시청 소속 선수지만 아이들이 윤기만 알아보며 사인을 요청하니 내심 기분이 참 그랬다.
그를 짐작한 시호의 위로에 그들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저희 이런 거 익숙해요. 저라도 기윤기 사인만 받았을 거예요.”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 저희 꼭 선발전 통과해서 무영단 소속 될 겁니다.”
“기윤기 제치고 에이스 될 거니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후배들의 너스레에 시호 역시 기분이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
“좋아, 기대하고 있을게. 친하다고 봐주는 거 없으니까 철저히 대비해.”
학생들에게 사인을 해 주던 윤기는 작게 들리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앞에 서 있던 학생이 놀라 윤기를 쳐다봤지만 그의 시선은 태홍, 수원과 마주 보며 웃는 시호만 향하고 있었다.
메시지에 답장도 안 해 주고 전화도 안 받더니, 다른 사람에겐 저렇게 예쁘게 웃어 준다.
뜬금없는 사람이 알려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녀와 만나지 못할 뻔했다.
타들어 가는 제 속도 모르고 말간 미소를 짓고 있는 시호가 원망스러워졌다.
“저기…….”
학생의 목소리에 간신히 고개를 돌린 윤기의 손이 방금보다 더 빨라졌다.
시호는 여전히 사인을 해 주는 윤기를 보다가 그들을 기다리는 여자들에게로 슬쩍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친구들 기다리는 것 같은데. 어서 가 봐.”
“저기, 선배님. 아까 제가 했던 말, 오해하지 마세요! 당시에 윤기가 하도 실의에 빠져 있어서 기운 좀 차리게 해 주려고 데려간 거예요. 윤기는 소개팅인 거 모른 채 끌려 나간 거고요.”
수원의 필사적인 설명에 시호의 기분이 조금 더 나아졌다.
더부룩한 속과 예상치 못한 협회장의 ‘유하고 따뜻한 처자’ 공격에 밀려 잠시 달아났던 이성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잘 알아들었어. 고마워. 그때 윤기 옆에 있어 줘서.”
진심이었다. 언젠가 이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열등감과 같잖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못난 상태에서 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을 하고 나니 속이 더욱 후련해졌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 약을 먹고 푹 쉰다면 완전히 회복될 것 같다.
“진짜로 가 볼게. 우리 작별 인사가 너무 길다.”
“긴기랑 같이 안 가세요?”
“윤기 차 가져오지 않았어?”
태홍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제가 대신 가져가겠습니다! 윤기랑 같이 가 주세요, 선배. 오늘 하루 종일 선배 연락 기다리느라 긴기 목 빠질 뻔했거든요.”
수원이 웃으며 거들었다.
“지난번에는 커플링 자랑으로 저희한테 무지하게 염장 질렀어요. ‘우리 예쁜 시호가 직접 만들어 준 선물’이라면서요.”
과장을 보탠 낯간지러운 수원의 말은 창백하기만 했던 시호의 볼을 붉게 물들이고 딱딱해졌던 마음을 간질였다.
“핸드폰은 시계를 보는 용도로만 가지고 다니던 놈이 쉬는 시간만 되면 라커룸으로 달려가서 화면 보고 픽 웃고 있다니까요.”
“…….”
“뒤에서 슬쩍 보면 늘 선배랑 찍은 사진을 보고 있어요. 운동할 때 액세서리 착용하면 안 되니까, 반지는 링 박스에다가 조심스럽게 넣어서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 놓고요. 꼭 양식 숨겨 놓는 다람쥐 같아서 귀여워요.”
“기윤기를 귀엽다고 생각할 날이 오다니. 이래서 사랑의 힘이 무섭구나, 맨날 생각한다니까요? 하하.”
그들의 말을 들을수록 시호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 물론 운동할 땐 확실히 집중하니까 걱정 마세요. 윤기는 선배 걱정시키는 일은 절대 안 하잖아요.”
태홍의 말이 시호의 머리를 때렸다.
그래, 윤기는 내가 걱정할 일은 조금도 만들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주변인의 말에 휘둘려 그에게 섭섭함을 느끼다니.
서로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이렇게 바보같이 굴며 낭비할 수는 없었다.
봉투를 한 번 꽉 움켜쥔 시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야, 서시호.’
사랑하면 유치해진다더니. 제가 딱 그 짝이었다.
캐나다에서 아멜리아에게 잠깐이나마 질투심을 느낀 것도 그렇고.
‘그건 평생 놀림거리니까 기윤기한테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야.’
그사이 사인을 마친 윤기가 그들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긴기, 우리는 저녁 먹고 들어갈게. 차는 내가 가져갈 테니까 선배님이랑 같이 들어가.”
태홍의 말에 윤기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호를 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창백했지만 약국에서 나왔을 때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했다.
그 이유가 자신이 아닌 친구들이라는 사실에 심장이 크게 욱신거렸다.
이마를 짚으려는 제 손은 놀란 표정으로 쳐 냈으면서, 친구들에게는 미소를 지어 주다니.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조수석의 문을 열고 시호가 타기를 기다리는 윤기의 눈빛은 거부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좀…… 무서운데.’
타악. 시호가 차에 오르자 차문이 닫히고 윤기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밀폐된 공간 안에는 오롯이 두 사람뿐이었다.
“병원부터 가죠.”
“아냐! 애들이랑 얘기하다 보니까 괜찮아졌어. 진짜야.”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호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식사 자리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윤기가 직접 말한 것도 아니고, 그의 아버지와 협회장이 나눈 대화에 기분이 나빠져서 꾸역꾸역 음식을 먹다가 얹혔다고는 절대로,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너무 유치하고 부끄러운 이유였다.
하지만 윤기는 자신이 체한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협회장에게 전화를 걸 기세였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시호는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생각지 못한 접촉에 윤기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좀 긴장했었나 봐. 선수가 아니라 단장으로서 활동하는 첫 자리였으니까.”
윤기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시호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눈치 보면서 꾸역꾸역 먹다가 탈이 났지 뭐야.”
“당장 병원으로 가요.”
“아니, 그냥 집에서 약 먹고 쉬면 될 것 같아.”
시호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팔베개해 줄 거지?”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이 거부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 그녀의 눈빛은 굳은 마음을 사르르 감싸 안았다.
이렇게 단번에 풀리면 안 되는데.
시호가 제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처음이라.
“떨어져 있는 내내 보고 싶었어. 아마 그래서 더 체했나 봐. 빨리 먹고 너 보러 갈 생각에.”
“정말 병원에 안 가도 되겠습니까?”
반쯤 누그러진 윤기의 음성에 마음이 놓인 시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옆에 있어 주면 괜찮을 것 같아.”
윤기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져 주겠다는 의미였다.
“조금만 있어 보다가 바로 안 나으면 강제로 응급실에라도 데려갈 겁니다.”
“알았어. 약속.”
시호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한 번 미간을 크게 좁힌 그가 손가락을 거는 대신 그녀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살짝 깨물었다.
“아……!”
시호가 햇빛을 볼 때처럼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야릇한 느낌이 들어서다.
“내가 없는 곳에서 아프지 마요.”
이번만 넘어가 준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시호를 바라보던 윤기가 그녀를 품에 가만히 끌어안았다.
“선배가 혼자서도 뭐든 잘해 내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윤기는 속으로 덧붙였다.
내가 옆에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윤기가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고 왼손을 들어 올렸다.
시호가 뜨끔한 표정을 짓자, 그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시호야.”
“…….”
“반지는 어디에 있어요?”
이런. 잠시 반지의 존재를 잊고 있던 시호는 그의 표정에 다시금 위장이 꽉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씻다가 깜빡 잊고 세면대 위에 두고 왔는데…….”
“오늘 협회장님만 만난 거 맞죠?”
시호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렇다고 바로 대답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하려니 목에 무언가 걸린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