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서진의 심장이 콩콩 뛰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의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다시 만나게 된 윤기는 대학생일 때보다 훨씬 더 멋있었다.
완연한 어른 남자가 된 그는 위험하리만치 색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의 무심하면서도 매혹적인 눈과 마주친 순간, 서진은 그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만나는 애들이 우리 소개팅했을 때 같이 있던 친구들이거든. 미진이랑 라영이.”
“헐, 윤미진이랑 정라영?”
“응, 맞아.”
“와, 진짜 오랜만이네! 걔네는 잘 지내?”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어때?”
서진이 윤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수원과 태홍 역시 간절한 눈빛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너희는 먹고 와. 난 선배랑 먹을 거니까.”
윤기의 말에 서진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태홍과 수원이 그의 양쪽에서 졸라 댔다.
“에이, 연락 안 된다면서. 이 시간까지 전화 없는 거 보면 바쁘신가 보지.”
“그래, 긴기. 선배 그럴 분 아니잖아. 분명히 저녁 드시고 계실 거야.”
“네가 저녁 안 먹었다고 하면, 선배 엄청 미안해하실걸.”
친구들의 말에 윤기가 미간을 좁혔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다가 끼니를 놓쳤다고 말하면 무척 미안해할 것이다.
가뜩이나 선수단 창단을 앞두고 바쁜 그녀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여전히 시호는 받지 않았다.
“안 받으셔?”
“…….”
“먹고 들어가자, 어?”
옅은 한숨을 내쉰 윤기는 그녀에게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서진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윤기가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며 누군가에게 신경 쓰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오늘 다시 만나기까지 공백기가 있었지만, 그사이에 윤기가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선배’가 누구냐고 물어볼까?
아냐, 그러다 만약 듣기 싫은 대답이라도 나온다면…….
서진은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미진이랑 라영이도 좋아하겠다. 우리 가끔 너희 얘기 했었거든. 지나가다 검도장 보면 너희 생각 나기도 했고.”
윤기가 제게 관심 없는 것이 너무나도 확실해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또 귀찮은 애라고 생각할까 봐 더 다가가지 못했던 서진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혹시 우리는 운명일까?
“너희 파스타 좋아해? 아, 몸 관리 때문에 좀 그렇겠다. 그럼 근처에 있는 한식당 어때? 몸에 좋은 식재료만 쓰는 곳 있던데. 거기랑 파스타집이랑 둘 중에 엄청 고민했었거든.”
“좋아. 긴기, 너도 괜찮지?”
신경이 온통 휴대폰으로 쏠려 있는 윤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려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럼 나 애들이랑 먼저 가 있을게. 볼일 끝나고 와.”
“조금만 기다려. 우리 차 가져왔는데 같이 이동하자.”
“그래도 돼? 나야 좋지! 애들한테 말해 볼게.”
서진은 밝은 표정으로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어 상황을 알렸다. 예상대로 난리가 났다.
[헐, 검도 삼인방을 만났다고?]
[대박, 대박, 대박! 당장 갈래, 빨리 갈래!]
[버스 왜 막히는 거야! 내려서 뛰어갈까 보다!]
채팅창에는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달려가는 오리 캐릭터와 ‘헐레벌떡’이라는 단어를 이마 위에 붙인 강아지 캐릭터 등 온갖 이모티콘이 남발했다.
[애들 몸 관리 때문에 우리 원래 가기로 한 가온한정식집 가기로 했어. 애들이 차 가져왔다고 같이 이동하자네:)]
[그건 그렇고 기윤기 아직도 잘생겼디?]
[응. 여전히 멋있더라^^]
[올~ 김서진~ 첫사랑 만나서 좋은가 본데~~]
[오늘 역사가 이루어지는 건가요!]
친구들의 메시지에 서진의 볼에는 홍조가 떠올랐다.
그들은 단골 검도용품점으로 향했다.
수원과 태홍은 주인과 함께 호구가 게시된 곳으로 갔고, 윤기는 죽도가 꽂혀 있는 코너를 찾았다.
잠시 망설이던 서진은 윤기의 뒤를 따랐다.
“와, 죽도 종류가 엄청 많구나. 길이도 엄청 다양하고, 나무마다 색깔도 조금씩 다르네? 윤기 넌 어떤 거 살 거야?”
이 시끄러운 건 뭐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윤기의 시선에 서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미, 미안. 좀 시끄러웠나?”
그는 아무 대꾸 없이 고개를 돌려 죽도를 살피는 것에 집중했다.
덕분에 서진은 그의 조각 같은 옆얼굴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콧대가 어쩜 저렇게 높을 수가 있을까.
이마에서 콧대, 콧대에서 턱까지 떨어지는 선이 섬세하면서도 유려해서 꼭 그림으로 그린 듯했다.
숱 많은 머리카락과 짙은 눈썹, 날카로우면서도 퇴폐적인 눈빛, 붉고 도톰한 입술까지.
윤기에게선 도통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강의실에 나타나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벌리고 눈으로 그를 좇았다.
서진은 유리창에 비친 윤기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으며 몸이 탄탄한 윤기의 옆에 있으니, 자신이 무척 여리여리하게 보인다.
‘남들 눈에 우리는 연인처럼 보일까?’
서진은 윤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발이 꼬이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꼭 붙잡아 몸을 지탱한 서진은 제 머리 위에 내리꽂히는 서늘한 시선에 얼른 손을 놓았다.
“미, 미안해! 그쪽에 있는 거 구경하려다가 그만.”
잠시 미간을 구긴 윤기는 아무런 말 없이 구석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보통 괜찮으냐고 물어보던데……. 여전히 차갑네.”
섭섭한 마음도 잠시.
서진은 방금 전 제가 붙잡았던 윤기의 팔의 감촉을 떠올리곤 얼굴을 붉혔다.
“엄청 단단하다. 근육이 아닌 곳이 없을 것 같아.”
윤기와 팔짱을 낀 여자가 있었을까, 생각하며 서진은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럼 이 모델로 주문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2주 후에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넵, 감사합니다!”
“근데 기윤기 선수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그들과 친분이 깊은 주인이 소곤거리며 물었다.
“아아, 저희 대학 동기예요. 검도 한 애는 아니고, 다른 과요.”
“흐음. 어쩐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데?”
“하하, 긴기는 임자가 따로 있는데요!”
해맑은 수원의 말에 주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이야, 좌절하는 아가씨들 많겠네.”
“아휴, 말도 마세요.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다니까요? 여자 친구가 선물한 커플링 자랑하고 같이 여행 간 곳 알리고 싶어서 아주 난리가 났어요.”
“기윤기 선수가요? 믿기지가 않는데요, 이거.”
그 상대가 바로 주인아저씨가 감탄해 마지않는 서시호 전 선수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수원은 가까스로 참아 냈다.
태홍이 잘했다는 듯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시호의 이름을 함부로 꺼냈다간 윤기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2주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긴기, 가자!”
수원의 외침에 윤기가 출입문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서진이 쫄랑쫄랑 뒤쫓아 왔다.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서진이 반사적으로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인상이 참 좋은 아가씨네.’
기윤기 선수랑 잘 어울리는데. 아쉽게 됐네. 주인은 속을 감추고 마주 미소를 지어 주었다.
건물 1층 로비에는 미진과 라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헐! 가수원! 윤태홍! 진짜 오랜만…….”
그들은 뒤이어 나타난 윤기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몸 좋다는 체대생 사이에서도 돋보였던 윤기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범접 불가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대학 때보다 성숙해진 분위기는 ‘어른 남자’의 매력을 폴폴 풍겼다.
슈트를 갖춰 입은 전문 모델도 트레이닝복을 입은 윤기를 이기지 못할 듯했다.
“우와. 기윤기 비주얼 진짜…….”
“더 차가워지고 더 잘생겨진 것 같지 않아?”
“어. 원래 알던 사이 아니었으면 쳐다보지도 못했을 듯.”
소곤거리던 두 사람은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다.
“와, 기윤기 더 멋있어졌다. 배우인 줄 알았어.”
“연교에는 인물이 좋은 사람들이 많나 봐. 방금 빨간 아유디에서 내린 여자도 엄청 늘씬하고 예쁘던데.”
“그러게. 피부도 하얗고 몸매가 되게 탄탄한 느낌? 나도 내일부터 헬스장 다녀야 할까 봐.”
그들의 대화에 윤기의 눈이 번뜩였다.
“그 차 어디에 있어?”
라영은 갑작스럽게 제게 말을 건넨 윤기의 모습에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말을 버벅거렸다.
“아, 으응. 저기 갓길에 세워져 있었어. 요 옆 약국으로 들어가던데…….”
라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기가 성큼성큼 건물을 나섰다.
갓길에 세워진 차의 번호판을 보고 시호의 차라는 것을 확인한 윤기가 약국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윤기?”
막 약국에서 나오던 시호가 제 차 앞에 서 있는 그를 보며 놀란 듯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윤기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보다 창백한 시호의 안색에 미간을 구긴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봉투로 슥 내려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아. 별거 아냐.”
그녀의 대답에 윤기의 표정이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디가 아픈…….”
시호는 제 이마를 짚으려던 윤기의 손을 스윽 밀어냈다.
협회장에게 얘기를 듣고 난 것으로도 모자라 방금 전 그가 웬 여자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난 후였다.
그런 감정을 지닌 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나니,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동공이 커진 윤기만큼이나 시호 역시 스스로의 행동에 놀랐다.
“미안. 그냥 좀 체한 거야.”
“……선배.”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서시호. 차갑게 얼어붙은 윤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수원과 태홍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 선배!”
“어쩐 일이세요?”
시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기분으로 윤기와 후배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저 여자 또한.
그들의 뒤에 서 있는 여자 세 명 중 한 명은 방금 전 상점 안에서 윤기와 나란히 서 있던 ‘유하고 따뜻해 보이는 처자’였다.
‘얼른 집에 가서 약 먹고 쉬고 싶은데.’
시호는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안녕.”
“선배, 어디 아프세요? 약국에서 나왔다고 들었는데.”
“긴기가 선배랑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저희 잠깐 호완 좀 보고 저녁 먹으려고 했었거든요.”
“그랬구나.”
시호의 시선이 여자애들에게 향하자 수원이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말했다.
“아, 저희 대학 동기예요. 예전에 같이 소개팅했었던……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