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네, 좋아합니다.”
재필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떤 장르를 좋아하십니까? 저는 가리지 않는 편이라서 아무거나 다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시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남자 친구와 보는 영화는 다 재미있더라고요.”
제게는 애인이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재필은 시호의 말을 도발적인 유혹으로 받아들였다.
뜨거운 열기가 뭉근히 차올랐다.
저런 여자의 애인이 되어 함께 영화를 보러 가는 등 데이트를 한다면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았다.
이혼한 것이 뭐 대수인가.
저렇게 매력적인데.
게다가 전남편이 재벌이니, 만약 시호와 결혼하게 된다면 큰 화제가 될 것이고 자신의 회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머릿속으로 이미 혼수 장만까지 끝낸 재필의 입이 귀에 걸렸다.
“회장님께서 소개시켜 준 커플이 두 쌍이나 결혼에 골인했다지요?”
“허허, 내가 커플 매칭에 워낙 일가견이 있잖나. 아무나 해 주지 않고 딱! 될 사람들만 골라서 권하지.”
“월하노인도 울고 가겠는데요.”
주거니 받거니 잘도 말하는 그들을 시호가 어이없이 바라보던 때였다.
“뭐, 딱 한 번 실패한 적도 있기는 해. 아예 소개조차 거절당했었지.”
“누구입니까? 저도 아는 사람인가요?”
“기윤기 선수라고 아나?”
순간 시호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럼요! 검도하는 사람들 중에 기 선수 모르는 사람도 있으려고요.”
“기 선수 부친에게 넌지시 말을 꺼낸 적이 있거든. 참한 며느릿감이 있다고. 운동선수들은 일찍 가정을 꾸려서 안정을 찾는 경우가 많으니까.”
재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기 선수 부친은 어떻게 아십니까?”
“아, 자네는 검도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구먼. 연교에 살지도 않고 말이야. GY화학 기선욱 대표가 부친이야. 큰아버지는 민성당 기민욱 의원.”
“…….”
“연교가 거의 그 집 땅이고, 연교에서 열리는 행사 후원은 대개 그 집안에서 하거든. 한 2년 전에 연교시장배 검도대회 때 봤었지.”
“이야, 기윤기 선수가 대단한 집안 아들이었군요!”
“뭐, 그렇지. 내가 그 전 해에 열렸던 전국체전에서 어떤 며느릿감이 좋은지 물어봤었거든. 유하고 따뜻한 처자가 좋다고 해서 물색해 놨었지.”
협회장은 윤기의 부친에게 시호 같은 며느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던 말은 쏙 뺐다.
식사가 들어와서 대화는 잠시 끊겼다.
“오, 나왔구먼. 여기 정식이 아주 맛있어.”
“예, 잘 먹겠습니다. 시호 씨도 맛있게 드십시오.”
“아, 네…….”
아직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얹힌 기분이었다.
시호의 마음도 모르고, 재필이 협회장에게 물었다.
“그랬더니요?”
“응? 아아, 그래서 전에 말씀하셨던 성격의 참한 처자들을 몇몇 알고 있다고 하니까, 부친이 아들에게 넌지시 얘기를 꺼낸 모양이야. 근데 글쎄 기 선수가 자기 인생에서 결혼은 없을 거라고 했다지 뭔가.”
“예에? 정말요? 여자들이 줄을 섰을 것 같은데.”
시호는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2년 전이면 자신이 아직 결혼 생활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니까. 군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에 긍정적이었던 모양인데 말이지. 그래서 기 사장님도 근심하셨던 기억이 나.”
“…….”
“기 선수가 외아들이니까 훗날 은퇴하면 사업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계시던데, 그러자면 빨리 결혼하는 게 좋지. 게다가 그 집이 손이 귀해.”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꼿꼿이 세웠으나 테이블 밑으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의외로 기 사장님 내외는 이런저런 조건 안 따지고 관대한 편이라서 기 선수가 누구라도 데려오기만 하면 허락하실 기세야. 한 번 갔다 온 사람만 아니면 괜찮다고 우스갯소리까지 할 정도이니…….”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시호와 눈이 마주친 협회장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고, 이런. 늙은이가 주책일세. 얘기를 하다 보니 그만. 자네를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
“어쨌든 그 정도로 조건을 따지지 않는 분이라는 거야.”
한 번 갔다 온 사람만 아니면 다 된다라…….
그 한 가지 조건만 아니면 되는데, 왜 하필 자신은 딱 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네, 알고 있습니다.”
“요즘은 생각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네. 조만간 자리 한번 마련하기로 했거든. 그때 다시 물어봐야겠구먼.”
화제는 다른 것으로 넘어갔지만 시호의 머릿속에선 여전히 윤기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유하고 따뜻한 처자를 좋아하시는구나, 윤기 부모님께서는.
시호는 들어 보지 못한 얘기였다. 단단하고 딱딱하며 냉철한 스타일이라는 얘기를 줄곧 들었었다.
‘결혼하려던 것도 아니었잖아. 윤기가 부담 갖지 말라고 했었고, 또 나도 당분간 결혼 생각 없고.’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세면대 위에 반지를 빼 놓고 온 것이 하늘의 계산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윤기와 난 이어지지 않을 운명일까……?’
마음에 묵직한 돌이 얹힌 듯 답답하고 무거웠다.
“시호 씨,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재필이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묻자 그녀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맛있습니다.”
“입에 안 맞으면 자네는 다른 걸로 시켜 줄까?”
괜찮다고 대답한 시호는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넣었다.
조금이라도 생각할 틈이 나면 방금 전 윤기의 집안과 윤기의 부모님이 바라는 며느리상에 대한 얘기가 머릿속을 꽉 채웠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친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호 씨, 안색이 창백한데. 제 차에 타시죠.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병원으로 모실까요?”
“그래, 홍 사장이 데려다줘.”
시호는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더 서 있기가 힘들어진 시호는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손끝은 차가웠다. 누군가 위장을 손으로 꽉 쥐는 듯이 아파 왔다.
이를 악문 시호는 심호흡을 한 뒤 시동을 켜고 차창을 조금 열었다. 바람이라도 쐬면서 가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병원에서 시간을 허비하기는 싫었다. 시내 약국에서 약만 사서 얼른 집으로 가서 쉬어야지.
고통이 더욱 심해졌지만 참는 것이 익숙한 시호는 계속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견뎠다.
게다가, 방금 전 식사 자리에서 들은 얘기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서 위에 이는 통증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유하고 따뜻한 처자가 좋다고 해서 물색해 놨었거든.]
[그 집이 손이 귀해.]
[한 번 갔다 온 사람만 아니면 괜찮다고…….]
심장이 찌릿찌릿 저려 왔다. 핸들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서 뼈마디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서시호.”
스스로에게 중얼거려 보아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고 계속해서 가라앉기만 했다.
간신히 시내에 도착한 시호는 약국이 보이자 갓길에 잠시 차를 대 놓았다.
빨리 갔다 와야지. 안전벨트를 풀고 막 문을 열고 나온 시호는 우연히 윤기를 보았다.
검도용품점 안에서 웬 여자와 나란히 선 채 함께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평소 잘 웃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서글서글한 눈매와 온화한 인상의 여자는 협회장이 말한 ‘유하고 따뜻한 처자’처럼 보였다.
위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심장으로 옮겨 갔다.
***
훈련이 끝난 후.
윤기는 시호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오늘 협회에 등록하려고. 아마 협회장님이랑 식사하게 될 것 같아. 끝나면 연락할게.]
아직 협회장과 식사 자리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향후 계획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대화가 길어질 거라고 시호가 얘기하긴 했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언짢은 표정과 가라앉은 눈빛은 좀처럼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커룸 앞에서 휴대폰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윤기에게 태홍과 수원이 다가왔다.
“긴기, 거기 서서 뭐 해?”
“와, 눈빛 살벌한 거 보소. 무슨 일 있냐?”
“선배가 전화를 안 받아서.”
그들이 입을 떡 벌렸다.
“기윤기가 연락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이야. 천하의 기윤기도 사랑에 빠지면 어쩔 수 없구나.”
놀람 반 놀림 반인 친구들의 말에 윤기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말대로였다.
떨어지는 그 순간부터 시호가 보고 싶었고, 연락이 한 번에 닿지 않으면 불안해졌다.
“긴기, 바로 집에 가야 돼? 선배 만날 거 아니면 우리랑 검도용품점에 좀 들르자. 나 호완 좀 새로 사려고. 너도 죽도 봐야 한다고 했잖아.”
“그래, 요 며칠 데이트하느라 우리랑 안 놀아 줬잖아!”
친구들의 아우성에 잠시 생각하던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내에 있다 보면 시호에게서 연락이 올 것 같았고, 그럼 만나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 좋을 것 같았다. 차는 태홍에게 가지고 가라고 부탁하면 되니까.
“그래, 가자.”
각자 스포츠 가방을 챙긴 세 사람은 시내로 향했다. 윤기는 자신의 차로, 태홍은 수원의 차로 이동했다.
검도용품점이 있는 건물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막 내렸을 때였다.
“어? 김서진?”
수원이 마주 오던 여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김서진 맞지?”
세 사람을 본 여자의 표정이 환해졌다.
“우와! 오랜만이다, 가수원! 태홍이도 잘 지냈어?”
“이렇게 만날 줄 몰랐네. 반갑다, 야. 이사 갔다고 하지 않았어?”
“응. 여기 1층 파스타 전문점에서 친구들 만나기로 했거든.”
수원, 태홍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서진이 윤기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기윤기, 안녕.”
윤기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살짝 미소했다.
“말없는 건 여전하구나. 더…… 멋있어진 것 같네.”
묘한 기류에 수원과 태홍이 서로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서진은 그들의 대학 동기였다. 체육대학 소속인 세 사람과 미대생이었던 서진은 교양 수업에서 같은 조가 되었고, 또 그녀 역시 연교에 살고 있었기에 빠르게 친해졌다.
물론 친해졌다는 말은 태홍과 수원에게만 해당되었다. 당시 서진은 윤기에게 호감을 보였지만 윤기는 시호와 검도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시호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윤기는 실의에 빠졌다. 감정이 지워진 사람처럼 모든 것에 무감각했다.
수원과 태홍은 그런 윤기를 데리고 억지로 소개팅 자리에 끌고 나간 적이 있었다.
당연히 소개팅이라고 하면 윤기가 나가지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우연히 카페에서 마주친 것처럼 꾸며 진행했었다.
그때 윤기와 커플 매칭이 된 사람이 서진이었다.
서진은 언제나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짓고 있으며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운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즉 시호와 정반대 타입의 여자라서 당시 수원과 태홍이 적극적으로 밀어주었었다.
서진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윤기에게 다가갔지만 윤기는 시호를 잊지 못했고, 그렇게 둘의 인연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서진의 눈빛을 보아하니 아직도 윤기에게 미련이 남은 모양이다.
볼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고, 말이 조금 빨라졌으며, 계속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서진의 모습에 태홍과 수원은 ‘쟤 어떡하냐’라는 눈빛을 교환했다.
“너희는 어쩐 일이야?”
“우린 검도용품 좀 사러 왔어.”
“아, 그래? 뭐 사러 왔는데?”
“호완 사러 왔어.”
“호완?”
“검도할 때 끼는 장갑. 너 예전에 껴 봤잖아. 하도 껴 보고 싶다고 해서 빌려 줬었잖아.”
“맞다, 그게 호완이었지!”
대화는 수원, 태홍과 하고 있지만 서진의 시선은 줄곧 윤기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든 윤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서진은 용기를 냈다.
“윤기야, 우리 저녁 먹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