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시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참아 왔는데, 줄곧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당장 하자는 건 아니에요. 난 그러고 싶지만 당신에겐 시간이 더 필요할 테니.”
윤기가 시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그런 마음이 들면 신호를 보내 줘. 내가 알아챌 수 있게. 그땐 내가 당신 손에 반지를 끼워 줄 테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했다.
재혁에게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는 느껴 본 적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해 주려 했는데. 당신 표정 보니까, 앞으로 계속 부담을 줘야겠어. 그래야 흔들리고 고민할 테니까요.”
내 인생에 결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었는데.
어쩐지 윤기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흔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한테 여자는 당신밖에 없어.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요. 그리고 불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시호가 눈으로 묻자 윤기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당신이 혹시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이 지워지지가 않아.”
자신도 그도 서로를 사랑하는 만큼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사람보다 더 잘해 주고 싶은데 혹시 부족하면 어쩌나. 불행했던 시간이 단숨에 지워질 정도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들.”
가슴이 뭉클했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은 시호는 윤기의 머리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우리 똑같이 바보네.”
“……그런가 봅니다.”
윤기가 시호의 허리를 세게 안으며 대답했다.
“바보끼리 앞으로 잘해 보자.”
그녀의 말에 그가 픽 웃었다.
다시 한번 손을 나란히 두어 커플링을 바라본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검도를 할 때는 손에 액세서리 등을 착용하지 말아야 한다.
본인이나 상대편이 부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왼손을 내려다보던 윤기는 아쉬운 마음으로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상자 속에 잘 넣은 뒤,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소중히 감춰 두었다.
수원과 태홍이 탈의실 문을 열고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야, 긴기! 너 인스타 만들었더라!”
“커플링 뭐야? 그 손 시호 선배 손이지?”
“캠핑장 사진은 뭔데, 기윤기가 솔방울을 손바닥에 올린 귀여움 터지는 사진을 찍다니! 말도 안 돼!”
“언제 맞춘 거야? 이제 공개하기로 한 거야?”
문을 잠그자마자 윤기의 양옆에 선 그들은 마치 그를 취재하는 열렬한 리포터처럼 질문 폭격을 해 댔다.
“여자 친구 있는 걸 넘어서 아예 시호 선배라고 알리기로 마음먹은 거야?”
“이 형님들 쏙 빼놓고 캠핑장에서 고기 구워 먹으니까 맛있던?”
“가뜩이나 둘 다 알려진 사람들이라 파장이 좀 있을 것 같은데 괜찮겠어?”
“이야, 이놈 우리랑 요즘 안 놀아 준 이유가 그거였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한테까지 숨길 필요 있냐? 섭섭하다, 인마.”
양쪽에서 시끄럽게 굴어도 윤기는 언짢아하지 않았다. 도리어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마저 피어나고 있었다.
“미쳤다, 좋냐? 좋아?!”
“……어.”
허어어억. 두 사람은 입을 벌리며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리고 반지는…… 시호가 해 준 거야. 직접 디자인해서.”
착한 일을 해서 칭찬 스티커를 받은 아이처럼 뿌듯한 윤기의 표정에 그들의 턱은 아래로 더욱 벌어졌다.
“시, 시, 시호? 너 지금 우리 주장님이자 앞으로 단장님 되실 분을 시호라고 불렀냐?”
윤기의 눈썹이 까딱, 위로 한 번 올라갔다.
“넌 함부로 부르지 말고.”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이 정녕 기윤기가 맞는 것인가.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도 처음 보거니와 그 이유가 여자 때문이라니.
오랜 시간 그를 알아 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단언컨대 앞으로도 시호 외에는 없으리라고 태홍과 수원은 확신했다.
“저 모습이 귀신이 아닐 리 없음.”
“동감. 머리에 심하게 충격을 받았든지 다시 태어났든지 둘 중 하나임.”
친구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든 윤기는 상관하지 않고 가방에 소중히 넣어 두었던 반지를 다시 조심스레 꺼냈다.
“그건 왜?”
“시호 보고 싶어져서 대신 보려고.”
“미친……!”
수원의 입에서 곧바로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태홍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십자가를 계속 그려 댔다.
“하느님, 선물 받으려고 크리스마스에만 성당 간 거 죄송합니다. 제발 제 친구에게서 악령을 꺼내 주세요. 아멘.”
“야, 긴기. 너 인스타 아이디는 무슨 뜻이야?”
그의 아이디는 ‘@onlyBB_1000’ 이었다.
“알 필요 없어.”
“와, 이럴 때만 원래 기윤기로 돌아가냐?”
“뭔데, 좀 알려 줘!”
윤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탈의실을 나갔다. 태홍과 수원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알려 달라고 쫑알거렸다.
BB는 바보, 즉 시호를 뜻하는 말이다. 오직 시호만을 바라본다는 뜻이며, 숫자는 1000일 안에 결혼하고 싶은 그의 바람을 담았다.
이걸 알려 주었다가는 친구들이 어떻게 나올지 뻔했기에 윤기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시호에게도 아이디의 의미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녀는 영어의 의미는 보자마자 알아챘지만 숫자까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이냐고 궁금해하며 제 팔에 매달리는 시호의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무슨 뜻인지 말해 주면 안 돼? 응?]
[목표를 이루고 나면 말해 줄게요.]
[목표? 혹시 트로피나 메달 1,000개 모으기야?]
[음.]
[웃지만 말고 알려 줘. 응? 궁금해 죽겠단 말이야.]
[키스 천 번.]
[정말?]
[……해 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기윤기 치사해!]
시호를 떠올리니 또 입꼬리가 제멋대로 올라가려고 해서, 그는 미간에 힘을 주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뭐 하고 있을까.
나만큼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커플링을 보면서 자꾸만 피식피식 웃게 되는 나와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을까.
‘보고 싶다.’
오늘 훈련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윤기는 죽도를 잡았다.
***
협회에 등록을 마친 시호는 협회장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
아침에 씻으려고 반지를 빼 놓았다가 깜빡하고 그대로 둔 채 나와 버리고 말았다. 벌써 반지가 익숙해졌는지, 손가락이 허전했다.
‘집에 가자마자 껴야지.’
연교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한식당 <연가>에 도착한 그들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제 서 선수가 아니라 서 단장이구만.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준비는 잘 되어 가나?”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2개월 후에 정식으로 훈련 시작할 예정입니다.”
스카우트를 통해 두 명의 선수를 뽑아 놓았고, 곧 지원자 선발전을 통해 선수를 몇 명 더 뽑을 예정이었다.
그들의 치수에 맞게 호구와 도복, 죽도를 새로 제작하는 중이었고, 수련관으로 쓰일 한옥 건물은 리모델링이 완료되어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다.
“기윤기 선수가 자네 팀으로 이적한다는 얘기가 돌던데.”
연교시청 김지웅 감독은 최근 시호가 윤기를 빼내 갔다며 사방팔방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중이었다.
“사실인가?”
물론 시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 사실입니다.”
“서 단장이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 감독 성격이 뭐랄까, 워낙 지랄맞아서 말이야. 본인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게 돌아가면 개처럼 물고 늘어지거든.”
몇 년 전 협회 부회장 선출에서 떨어졌을 때, 김 감독은 투표가 조작된 것 아니냐며 한동안 난리를 피웠었다.
그때를 생각한 협회장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마 실력이 있기에 망정이지, 어쨌든 깊이 얽혀서 좋을 게 없으니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차분히 지내다 보면 잠잠해질 거야.”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서 단장은 아직 만나는 사람 없지?”
뜬금없이 훅 들어온 질문에 놀란 시호가 눈을 고쳐 떴다.
아무래도 협회장에게는 이혼을 했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줄이야.
윤기라고 말을 해야 하나?
숨길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약과 관련해서 민감한 얘기가 도는 시기에 저와의 사이까지 알려지게 된다면 사람들 입에 더욱 오르내리게 될 텐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협회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휴대폰으로 한 남자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규모가 꽤 되는 IT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야. 모임에서 우연히 알게 됐는데 얼마 전부터 검도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현재 강남에 있는 검도장에 등록해서 배우고 있다네? 형편이 어려운 선수들 후원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더라고.”
어이가 없어진 시호가 사진을 내려다보자, 그것을 마음에 들었다는 신호로 해석한 협회장이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성격 시원시원하고 체격도 큼직하니 남자답고. 무엇보다 사업을 해서 그런지 배포가 남달라서 나랑 금세 친해졌는데.”
“…….”
“서 단장을 아느냐고 물어보더라고? 서 단장 선수 시절 영상을 봤나 봐. 그거 보자마자 팬이 되었다면서 눈을 빛내는 거야. 그런데 마침 오늘 이 근처에 볼일이 있다는구먼?”
“회장님.”
시호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며 거절하려는데 협회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미안, 전화 좀 받겠네. 어, 홍 사장! 물망초 방으로 들어오시게나.”
전화를 끊은 협회장은 시호의 굳은 얼굴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하네. 그런데 홍 사장이 내일부터 일주일간 해외 출장을 간다지 뭔가. 늙은이 마음이 급해서 그만. 자네랑 잘 맞을 거야. 아직 젊은데 새 출발 해야지. 응?”
래퍼 못지않게 워낙 말이 빠른 어른이라 끼어들 틈이 없었다.
“회장님, 저 만나는 사람이 있…….”
드르륵. 문이 열렸다.
“오, 홍 사장!”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기고 슈트를 빼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호를 발견한 그의 눈이 커지며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자, 자! 어서 여기에 앉게.”
협회장의 옆에 앉은 남자는 맞은편에 있는 시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쪽은 그라운드팩토리를 운영하고 있는 홍재필 사장. 저쪽은 이제 단장님이 된 서시호 선수. 서로 인사하게.”
“아, 안녕하십니까. 홍재필입니다.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서시호입니다.”
협회장은 인사를 나누는 선남선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홍 사장이 요즘 검도에 푹 빠져 지내고 있거든. 안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특히 서시호 선수 영상을 보면서 매번 감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 선수가 아니라 단장일세.”
“앗, 그렇군요.”
“오늘 협회 등록 마친 어엿한 선수단의 단장님이니까 앞으로는 제대로 대우해 주시게.”
“물론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서 단장님.”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건네는 재필을 보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올 뻔한 시호는 간신히 미소했다.
“감사합니다.”
재필의 동공이 더욱 흔들리더니 그대로 몸이 굳었다.
‘실제로 보니까 진짜 예쁘다.’
그녀의 상냥한 미소에 재필은 심장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RS그룹 후계자가 왜 한눈에 반해서 청혼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되었다.
“축하 선물을 해 드리고 싶은데. 혹시 영화 보는 거 좋아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