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말에 윤기는 의문스럽다는 듯 시호를 내려다보았다.
“응. 특히 얼굴이 제일 재미있어. 보고만 있어도 웃음이 나. 다른 일로 화가 나도 너 보면 바로 풀리고.”
부끄러우라고 한 말이었는데 윤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 얼굴이 그렇게…… 웃기게 생겼습니까?”
이 역시 윤기가 태어나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조각이니, 연예인 같다느니 하고 떠들어 대던 다른 사람들의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시호의 시선뿐이었다.
선배의 눈에 난 우스꽝스럽게 생겼을 뿐인가?
자주 웃어 주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점점 가라앉는 윤기와 달리, 시호는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어떻게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어? 당연히 잘생겼다는 뜻이지.”
그제야 윤기가 안심한 표정을 짓자, 시호가 그를 곱게 흘겨보았다.
“아아, 내 입으로 잘생겼다는 말 하게 하려고 이번에도 장난친 거지.”
윤기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선배가 하는 말은 뭐든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저한테는.”
왜 이런 간단한 말에도 설레는지.
“선배 눈에 괜찮아 보인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 같아서 시호는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자기 잘생긴 거 알면서 괜히 그래.”
윤기가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래?”
“그 호칭, 마음에 듭니다.”
“호칭? 무슨 호칭?”
“방금 자기라고 하셨잖아요.”
응? 내가? 자신의 말을 곱씹던 시호가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네 스스로 잘 안다는 뜻이었어!”
당황한 시호를 보며 그가 씩 웃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 주십시오. 자기라고.”
제 귓가에 속삭이는 낮고 굵은 음성이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짜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전류처럼 흘렀다.
“자기야. 하고 싶어요?”
“너 그게 무슨……!”
“선배가 그런 표정이라서.”
눈을 크게 뜬 그녀가 주위를 휙휙 빠르게 둘러보고 미쳤어, 하며 윤기의 팔을 때렸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작게 얘기하는데 누가 듣는다고.”
윤기가 시호의 어깨를 감싸 제 품으로 당겼다.
“그래서 선배는 어떤데요?”
그가 나른히 속삭였다.
“난 그런데.”
“…….”
“이제 그만 들어가요. 산책 대신 다른 걸로 소화시키면 되잖아.”
번호 키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윤기가 입술을 겹쳐 왔다.
시호를 번쩍 안아 들어 매끈한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은 그는 입술을 떼지 않으며 침실로 향했다.
뜨거운 숨결이 섞이며 피어나는 달콤한 향기에 마치 술에 취하기라도 한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윤기의 커다란 손이 시호의 목덜미에서부터 척추까지 쓸어내리며 감각을 일깨웠다.
잠깐 떨어진 입술 사이로 그녀가 미약한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윤기를 더욱 자극하며 욕망을 부추겼다.
손등에 핏줄이 돋은 손이 옅은 민트색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가 마치 물고기처럼 이곳저곳을 유영했다.
“아…….”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자 윤기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손가락을 얽었다.
문득 서로의 왼손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램핑장에서 돌아온 후로 윤기의 머릿속은 커플링이 지배했다.
당장이라도 끼워 주고 싶지만.
[꼭 속박당하는 것 같잖아.]
아직은 너무 이르다. 해서, 그는 시호에게 짜릿한 황홀경을 선사하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하기로 했다.
그랬는데…….
다음 날, 시호는 갈 곳이 있다며 윤기를 끌고 나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파주에 있는 한 공방이었다.
“선배, 이곳엔 왜……?”
시호는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해 주지 않고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윤선이 시호와 윤기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작업은 잘 마무리되었어요. 만족하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작업? 윤기가 시호를 쳐다보자 그녀는 대답 대신 또 어깨를 으쓱했다.
“선배, 정말 말 안 해 줄 겁니까?”
“직접 보는 게 더 나을걸.”
윤기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담한 공방 한쪽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반지나 팔찌,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가 벨벳이 깔린 상자에 곱게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곳곳에는 조각과 오브제가 전시품처럼 널려 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왜 이런 곳에…….
“여기 있습니다.”
윤선이 직사각형의 붉은 벨벳 상자를 가져와 시호에게 건넸다.
시호는 그것을 다시 윤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열어 봐.”
상자의 모양에 윤기는 반신반의했지만, 이내 ‘반의’ 쪽으로 생각이 넘어갔다.
설마 이게 반지일 리 없지 않은가.
결혼 생활에서 얻은 상처가 아물기엔 아직 이른 시기였다.
그러나 상자를 연 순간.
윤기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크기가 다른 한 쌍의 반지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보석은 너랑 나 탄생석이고, 숫자는 우리 태어난 달이야. 안에는 이니셜도 새겼어.”
윤기는 여전히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시호와 윤선이 불안한 표정으로 마주 보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하아.”
윤기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제대로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상상조차 못 했다.
시호가 먼저 반지를 선물할 줄은.
함께 보낸 시간이 조금 더 쌓인 뒤에나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속박당하는 기분이 든다고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심스러운 그의 물음에 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랬지. 근데 너한테는 속박당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윤기는 심장이 뻐근해질 정도로 벅찼다.
“얼른 끼워 줘. 지금 사이즈 확인해야 하니까.”
윤기는 반지를 꺼내어 시호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워 주었다.
“와, 딱 맞네요. 어때?”
시호가 환하게 웃으며 묻자 그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쁩니다. 아주 많이.”
윤선은 살짝 미소 지었다. 반지가 아니라 시호를 향해 있는 윤기의 시선 때문이다.
“기윤기 씨, 손 좀 내밀어 줄래요?”
윤기가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천하의 기윤기가 떨릴 때도 있어? 전국체전 결승에서도 무덤덤했다던 사람이.”
시호가 놀리듯 웃으며 윤기의 손가락에도 반지를 끼워 주었다.
마치 함께 와서 맞춘 것처럼 사이즈는 꼭 맞았다.
“어때?”
“좋아요. 딱 맞습니다.”
“다행이다. 잘 어울려. 그렇죠, 선생님?”
윤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친구분도 손가락이 길고 우아해서 아주 잘 어울리세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예쁘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공방을 나온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타서 왼손을 겹치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와, 너무 예쁘다. 그치.”
“예. 정말 예쁩니다.”
시호는 사진 한 장으로도 만족했는데, 윤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여러 각도에서 몇 장이나 사진을 찍었다.
“오늘 기윤기의 색다른 모습을 자주 보네? 사진 같은 거 안 찍더니.”
“애들이 SNS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습니다. 여자 친구 있다는 걸 공개적으로 알리면 앞으로 자기들이 좀 덜 귀찮아질 거라면서.”
“걔네가 왜 귀찮은데?”
눈썹을 한 번 으쓱한 윤기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더는 소개시켜 달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아, 소개…….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기윤기 정도면 여기저기에서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이 쇄도할 텐데.
그의 시선이 오직 제게만 향해 있었기에 그런 문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행복한 무지’라고 해야 하나.
“그런 부탁이 많이 들어오는구나.”
하긴, 기윤기인데.
문득 불안감이 든다.
친구들이 윤기에게 소개해 주겠다는 여자들은 거의 백 퍼센트의 확률로 이혼 경력이 없을 것이다.
또한 나와는 달리 아기자기하고 살가운 성격도 더러 있겠지.
어느 날 첫사랑 선배에 대한 환상이 깨진 윤기가 현실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그때 마침 다가온 누군가를 마음에 둔다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셨습니까?”
사진을 다 찍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윤기가 시호를 품에 안았다.
“선배가 직접 디자인한 커플링이라니…….”
행복해서 돌아 버릴 것 같습니다.
그가 속삭이며,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글램핑장에서 반지 주운 이후로 네가 반쯤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용진 선배한테 물어봤더니 네가 커플링을 맞추고 싶은 거라고 하더라. 자기도 연애할 때 그랬다면서.”
윤기의 안에서 아직 만나 보지 못한 용진에 대한 평가가 높이 치솟았다.
아주 믿음직하고 의지할 수 있는 코치임이 분명하다.
“용진 선배가 끼고 있는 반지가 아내가 디자인한 가족 반지라고 해서 나도 아이디어 좀 빌렸어.”
“두 분께 평생 감사드려야겠군요.”
윤기의 음성에 기쁨이 묻어나서 시호도 따라 미소 지었다. 하지만 마음은 금세 먹구름으로 흐려졌다.
“그런데 말이야, 소개 많이 받아?”
“소개요?”
“아까 말한 거. 애들이 너 소개시켜 달라는 청탁 많이 받는다면서.”
“잘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직접적으로 말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워낙 차갑고 무뚝뚝한 윤기는 태홍과 수원 외의 사람과는 말도 잘 섞지 않았다.
그래서 윤기의 포스에 눌린 사람들이 그에게 가는 대신, 수원과 태홍을 찾아가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신경 쓰이십니까?”
아니라고 말하려던 시호는 한숨을 내쉬며 작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
윤기가 안았던 팔을 풀고 시호와 마주 보았다.
“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잘해 줘서 생각을 못 하고 있었어. 기윤기가 남들 눈에도 얼마나 멋있을지를. 이혼 경력이 있는 나보단 그래도 호적 깨끗한 사람들이 너와 어울릴 거란 생각이…….”
“서시호.”
윤기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를 보건대 화가 꽤 많이 난 듯했다.
언제나 제게 다정한 윤기였기에 이런 모습은 익숙하지 않았다. 시호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줄곧 그렇게 생각해 온 겁니까?”
“……무의식은 그랬나 봐.”
“결혼하자.”
윤기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 무거운 것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
‘결혼’이라는 말이 시호를 안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윤기야.”
“난 그 사람과 달라요. 절대로 선배를 외롭게 두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