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바로 부산댁이었다.
- 작은사모님, 저 그쪽으로 가도 되나요?
“물론이죠! 사실 큰 기대 안 하고 여쭈어본 거였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여사님.”
- 제가 더 감사하죠. 아들 부부가 연교 근처에 사는데 이젠 걔들 가까이에 살면서 손주들도 보고 싶더라고요. 더 많은 사람들한테 음식을 해 주고 싶기도 하고. 기왕이면 젊은 사람들한테 말이에요. 매일 똑같은 분들만 보니까 이젠 조금 지겨워지더라니까?
장난스러운 부산댁의 말에 시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려운 결정 감사드려요. 그럼 시간 되실 때 알려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작은사모님.
“저희 회동 가진 후에는 작은사모님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러 주셨으면 좋겠네요.”
- 어머, 습관이 되어서 그만. 그럴게요. 이제 단장님이시지요?
“2개월 후면요.”
-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단장님.
두 사람은 웃으며 통화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와 샐러드와 샌드위치로 간단히 저녁을 때운 시호는 미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갑게 안부 인사 후에 반지에 대해 물었다.
- 디자인 비슷하게 해도 되냐고? 당연하지! 친구한테 말해 놓을게. 공방 위치는 메시지로 전송하면 되지?
“네, 언니. 고마워요.”
- 뭘. 그렇게 고마우면 얼굴 한 번 비쳐 주든지. 도윤 아빠 부러워 죽겠다니까? 이제 매일 우리 시호 얼굴 볼 거 아냐.
미연은 자신과는 정반대인 시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녀를 부를 땐 늘 ‘우리 시호’였다.
자신은 아담하고 몸에 근육 하나 없이 물렁물렁하며 5분이라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온몸이 근질근질한데, 저보다 두 살 어린 시호는 키도 크고 몸에도 근육이 예쁘게 자리했으며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모습이 멋있다는 이유였다.
시호 역시 귀엽고 사랑스러운 친언니 같은 미연을 잘 따랐다.
- 마음 같아선 나도 무영단에 취직하고 싶다. 도윤 아빠한테 검도 좀 배워 놓을 걸 그랬어.
시호가 눈을 고쳐 떴다.
“언니, 그럼 저희 무영단 사람들 식사 담당해 주시는 건 어때요? 시댁에서 음식 만들어 주셨던 여사님과 같이 일하기로 했거든요. 언니도 음식 잘 만드니까 두 분께서 도와주시면 한결 수월할 것 같아요.”
- 어머, 정말? 그래도 돼? 우리 도윤 아빠 구제해 주고 사택까지 지원해 줘서 내가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란데…….
미연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용진에게서 그녀가 자신의 일을 갖고 싶어 한다는 말을 익히 들은 참이었다.
중소기업에 다니다 결혼과 동시에 반강제로 퇴직한 미연은 음식을 굉장히 잘했고 성격도 좋아서, 용진이 검도장을 운영할 때에도 학부모나 관원들의 상담을 도맡아 했었다.
부산댁과도 잘 어울릴 것이고, 또한 선수들에게도 언니, 누나처럼 또 이모처럼 잘 대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가 감사하죠. 실력 좋고 인성도 좋은 분 만나기가 드문데.”
- 내가 우리 시호한테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라다, 정말. 나 잘할게. 오늘부터 몸에 좋은 보양식 100가지 메뉴 개발한다, 내가.
미연의 귀여운 허풍에 시호는 픽 웃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언니. 그리고 공방 감사해요.”
- 아냐. 우리 시호가 예쁘게 연애하는 모습 너무 보기 좋다. 그런데 기윤기 선수 실제로도 잘생겼어? 사진 보고 깜짝 놀랐잖아. 배우인 줄 알았어.
“……하하.”
- 에이, 웃지만 말고 말 좀 해 주라, 자기야.
“음. 네, 잘생겼어요.”
시호는 잠시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사진보다 훨씬 더.”
- 꺄아악! 어머머, 웬일이니, 웬일이야. 시호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어머, 나 너무 흥분했어. 우리 만나서 얘기해, 알았지?
“네, 언니.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시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오버했나?”
하지만 어쩌나. 사실인걸.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용진 선배가 알면 엄청 놀릴 텐데. 에이, 몰라.”
설거지를 마친 시호는 국 소장이 보내 준 수련관 내부 사진을 꼼꼼히 살폈다.
처음 의논했던 그대로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업무를 마친 시호는 반지 디자인을 검색해서 방금 전보다 더욱 신중히 살펴보았다.
“심플하면서도 포인트가 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야지.”
밤 9시가 지나도록 시호의 디자인 구상은 끝나지 않았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세 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었다.
“으으, 목 아파. 이제 자야지.”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친 시호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무음 모드로 설정해 놓은 휴대폰에는 윤기에게서 5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
다음 날 점심시간.
라커룸에서 휴대폰을 확인한 윤기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아침에 메시지를 주고받은 이후, 시호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어제 수련관 내부 현장 사진 보다가 그대로 잠들어서 연락 못 받았어. 출근은 잘했어?]
[그래, 오늘 하루도 힘내!]
아쉬운 마음에 괜히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은 윤기는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고 라커의 문을 닫았다.
“긴기, 뭐 해?”
수원이 물을 마시며 들어왔다.
“웬일로 라커룸에 다 들어와 있어? 밥만 먹고 와서 훈련하던 놈이.”
윤기는 아무런 대답 없이 눈썹만 으쓱했다.
“넌 선배랑 데이트 안 가냐? 영찬이는 주말에 여자 친구랑 공방 가서 무슨 도자기인지 그릇인지 만들고 왔다던데.”
“공방?”
윤기가 관심을 보이자 수원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야. 연애를 하긴 하는구나, 네가. 이런 말에 관심을 다 갖고.”
“……나 간다.”
“알았어, 알았어! 기둘기둘, 수원 비둘기를 기다려 주세염. 데이트 장소에 관한 소식을 물어다 드릴게염.”
수원이 라커룸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윤기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여긴데 되게 핫한 곳인가 봐.”
아무 말 없이 화면에 집중하는 윤기를 보며 수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내가 살다 살다 도자기 공방에 관심을 갖는 기윤기를 보게 되다니.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스크롤을 내리던 윤기의 손가락이 멈춰 선 지점은 커플 머그컵을 만드는 부분이었다.
“선배랑 같이 한번 가 봐. 근데 둘 다 승부욕 장난 아닌 사람들이라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둘이 누가 더 잘 만드나 경쟁 붙는 거 아니냐? 큭큭.”
“링크 나한테 보내 줘.”
“허어어억, 기윤기 진짜 연애하는 거 맞구나! 대박! 오키, 우리 막내가 연애 좀 해 보겠다는데 이 형님이 도와줘야지. 내가 알고 있는 데이트 명소 몇 군데 보내 준다.”
신난 수원을 보며 윤기가 가만히 말했다.
“네가 그런 걸 왜 알고 있는데?”
순간의 정적 후.
수원은 인어공주처럼 다리를 모으고 쓰러지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꼈다.
“나중에 여자 친구 생기면 가려고 폴더에 모아 놨다, 왜! 난 그러면 안 되냐? 나한테 여자 친구가 생길지 안 생길지 어떻게 알아!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건데. 흐으윽.”
“…….”
“자기만 여자 친구 있다고, 기윤기가 나를 이렇게 업신여기네! 그런 환멸 넘치는 눈빛으로 날 보지 말라고!”
수원은 목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선에서 가장 크게 외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목에 수건을 두른 태홍이 들어와 수원을 흘깃 보고는 자신의 라커로 향했다.
“윤태홍! 방금 날 보고도 왜 아무것도 안 묻냐!”
“네 뻘짓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야. 절친이란 놈들이 나를 이렇게 무시하나.”
“우리 절친이었음? 오늘 처음 알았네.”
여느 때처럼 투닥거리는 태홍과 수원을 바라보던 윤기는 다시 라커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수원이 보내 준 링크를 클릭했다.
커플 머그잔이라.
선배가 좋아하려나.
사실, 마음 같아선 시호와 모든 것을 똑같이 맞추고 싶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그녀를 생각할수록 감정이 더욱 크고 깊어져서 큰일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반지가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구속당하는 느낌이 드는 물건이 아니라면 시호가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언제쯤 반지를 나눠 낄 수 있을까.’
***
미연에게 소개를 받아 금속공예 디자이너인 윤선을 만난 시호는 작업실에서 그녀가 만든 반지들을 구경한 후,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자신이 준비한 도안 세 개를 제시했다.
“심플하면서도 포인트가 될 만한 반지로 만들고 싶어서요. 정 가운데보다 살짝 왼쪽에 탄생석을 박아 넣고, 그 옆에는 저희 생년월일을 새기고 싶어요.”
“이미지랑 잘 맞으시네요. 소재는 뭘로 하고 싶으세요?”
“백금으로 하고 싶어요. 둘 다 노란 금색은 안 어울릴 것 같아서.”
“알겠습니다. 안에는 각인 안 하세요?”
고민하던 시호가 이니셜을 새겨 달라고 주문했다.
“남성분 사이즈 이니셜은 SSH, 보석은 1월 탄생석인 가넷. 그리고 여성분 사이즈 이니셜은 GYG, 보석은 9월 탄생석인 사파이어 맞으시죠?”
“네, 맞아요.”
“원하시는 바가 뚜렷하니까 잘 나올 거예요. 기간은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미연이가 꼼꼼하고 세심하게 잘 봐 달라고 어찌나 부탁을 하던지.”
“…….”
“조금이라도 ‘우리 시호’ 마음에 안 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다 하더라니까요.”
시호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언니도 참.
“그럼 반지 나왔을 때 연락드릴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작업실을 나와 차에 탄 시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윤기가 좋아할까?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리지?”
***
각자 바쁜 일정을 보낸 시호와 윤기는 금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연교 근교에 있는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온 그들은 손을 붙잡고 공원을 산책했다.
“선배, 컵 만드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컵? 물 마시는 컵?”
“수원이가 커플 머그잔을 만드는 공방을 추천해 줘서요. 데이트 장소로.”
시호가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수원이가? 여자 친구 있어?”
“나중에 생기면 가려고 검색해 뒀대요.”
“와, 진짜 가수원답다. 참 재미있어.”
윤기의 눈썹 끄트머리가 움찔 올라간다.
“그래, 가자. 다음 주에 어때?”
“……예.”
손을 붙잡고 공원을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아까부터 생각에 잠겼던 윤기가 망설이다 입을 뗐다.
“재밌는 사람…… 좋아하십니까?”
고개를 갸웃거린 시호가 눈을 깜빡거렸다.
“음? 싫어할 이유가 없지. 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는 재미있는 사람인가 해서요. 선배한테.”
“당연하지. 넌 존재 자체가 재미있어.”
“제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