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너 혼자 침대에 누워 있어도 꽉 차는 판에? 네가 워낙 커야 말이지. 아마 내가 새끼 고양이 정도 크기여야 너랑 같이 잘 수 있을 거야.”
“그럼 선배가 내 위에 누우면 되잖아요.”
시호가 기가 막힌단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너 그걸 말이라고 해?”
“안 떨어지게 제가 꽉 끌어안고 자겠습니다.”
“사양할래. 난 쾌적하게 자고 싶거든. 졸리다, 우리 빨리 들어가서 자자.”
텐트 안에 들어가면 더는 시호와 붙어 있지 못한다.
윤기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선배, 우리 별 조금만 더 보고 들어가죠.”
“음, 많이 봤는데.”
“그럼 산책은 어때요.”
“너무 어두워서 그것도 좀.”
“제가 휴대폰으로 잘 비추겠습니다.”
“벌레 달라붙을 것 같아.”
“제가 떼어 내겠습니다.”
시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 너도 피곤하고 나도 신경 쓰이고. 그냥 들어가서 자자.”
이렇게 시호와 붙어 있는 시간이 끝나는 건가.
언뜻 무표정한 얼굴에서 시무룩함을 읽어 낸 시호가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으, 귀엽고 재밌어! 이래서 기윤기가 날 자꾸 놀리는 건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시호가 목을 가다듬고는 선심 쓰듯 톡 내뱉었다.
“그럼 잠깐 걷든가.”
표정이 환해지며 얼른 시호의 손을 붙잡은 윤기는 그녀가 도망갈세라, 마디마디마다 제 손가락을 밀어 넣고 꽉 붙잡았다.
“놓지 마십시오.”
“이렇게 꼭 잡아 놓고선.”
그렇게 한밤중의 산책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군데군데 은은한 조명이 발밑을 비추고 있어서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때 윤기가 무언가를 밟았다.
“뭐야?”
시호의 손을 잡은 채로 그가 상체를 굽혀 정체불명의 물건을 주웠다.
조명에 비춰 보니 붉은 벨벳의 작은 상자였다.
“반지 상자 같은데?”
상자를 열어 보니 디자인이 같고 크기가 다른 한 쌍의 반지가 있었다.
“커플링인가 보네.”
귀엽다. 작게 미소하던 시호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가 잃어버린 모양인데. 관리동에 갖다 줘야겠다.”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윤기는 시호가 한차례 부르고 나서야 겨우 대답했다.
“윤기야?”
“아…… 그래야겠군요.”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그들에게로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이 근방에서 상자 하나 못 보셨나요?”
“이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윤기가 들고 있던 상자를 슥 내밀자 남자가 그것을 발밑 조명에 비춰 보고는 표정이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거 맞습니다! 와, 다행이다. 오늘 여자 친구한테 주려고 큰맘 먹고 샀는데 잃어버려서 영혼 탈곡 중이었거든요. 진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멀어지면서도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남자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되게 아찔했겠다. 그래도 다행이다, 찾아서. 그치?”
“……예.”
“그런데 방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어?”
커플링을 보자마자, 윤기는 자신도 시호와 커플링을 나누어 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호의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자 멈칫하게 되었다.
지난주 산청에 내려갈 때 ‘신혼여행을 가고 싶다’는 제 말에 한 번도 긍정적으로 대답한 적 없던 시호다.
연인 사이의 애정 표현으로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시호는 진지하고 진중했다.
그런데 커플링이라니.
당연히 싫어하겠지. 얘기를 꺼냄과 동시에 분위기가 얼어붙을 것이 뻔했다.
그보다 더 최악인 것은 별로 내키지 않아도 제 기분을 생각해서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건 싫었다. 시호가 정말로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기가 무심한 척 슬쩍 내뱉었다.
“선배도 반지 좋아하십니까?”
“반지?”
반지라. 시호의 인생에서 반지는 결혼반지뿐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재혁은 그녀의 손가락에 비해 지나치게 큰 다이아가 박힌 프러포즈 반지를 선물했었다.
외출할 땐 늘 그것을 껴야 했는데, 여기저기 긁히고 옷이 뜯기는 등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른다.
평소 생활할 땐 그보다 더 간소한 반지를 끼기는 했지만 옥죄이는 기분은 매한가지였다.
이혼 후, 더는 반지를 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얼마나 후련하던지.
“음, 별로?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꼭 속박당하는 것 같잖아.”
반지를 생각하니 또 결혼 생활이 생각날 것 같았다.
즐거운 데이트 시간에 그런 어두운 기억은 떠올리기 싫어서, 시호는 그의 팔을 붙잡고 이끌었다.
“어? 간이 무대도 있네? 우리 저기 가 보자.”
시호에게 이끌려 가는 윤기의 시선이 그녀의 왼손에 닿아 있었다.
하얗고 가는 손가락은 어떤 반지든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다이아몬드는 물론이고, 새빨간 루비도 그녀의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렸다. 푸른 사파이어도, 우아한 진주도 존재 자체가 보석인 시호에게는 다 잘 어울리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묵직한 바위가 가슴 깊은 곳에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언제쯤 끼워 줄 수 있을까.’
언제쯤 반지를 끼워 주고 함께 허니문을 떠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당신이 다시 결혼하고 싶다고 느끼게 만들 수 있을까.
“윤기야, 저기 봐 봐. 나무에 장식해 놓은 거 너무 예쁘다. 우리 가 볼까?”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시호를 볼 때마다 윤기의 안에서 욕망은 점점 몸집을 불려 갔다.
어서 같이 살고 싶었고, 그녀가 자신의 여자라고 온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연인이 아니라, 법적으로 호적으로 단단히 묶인 부부이고 싶었다.
당연히 이혼은 없다.
윤기는 시호에게 모든 것을 맞추고,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마,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 놨나 봐. 겨울에 보면 더 예쁘겠다.”
“또 와서 봐요.”
“응, 좋아.”
윤기는 미소하는 시호의 이마 위로 부드럽게 입술을 내렸다.
“우리 시호가 좋아하는 모습 보니까 나도 좋다.”
배시시 웃던 시호가 짐짓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하늘 같은 선배한테 은근슬쩍 말 놓는 거 봐?”
귀여워 미치겠네. 그녀를 한 번 꽉 끌어안고 머리에 입을 맞춘 윤기가 기꺼이 등을 돌리고 몸을 낮췄다.
“벌로 하늘 같은 선배님, 텐트까지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업어 주려고? 안 돼, 허리에 무리 가.”
“서시호 업는 정도로는 끄떡없습니다.”
“그래도…….”
“밤새 이러고 있는 것보다 업히는 게 나을 텐데.”
여전히 시호가 망설이자, 윤기가 얼른 업히라며 손을 까딱거렸다.
“3초 안에 안 업히면 평생 안 업어 줄 겁니다.”
낮은 음성이 땅 위로 포근히 깔렸다. 주춤주춤 다가간 시호는 결심한 듯 윤기의 목을 끌어안고 등에 착 달라붙었다.
피식 웃은 윤기가 그녀를 업고 가볍게 일어나 걸었다.
“기윤기 등 되게 넓고 딱딱하다.”
“서시호 전용이니까 언제든 이용하세요.”
“안 돼. 지금도 어디 다칠까 봐 불안한데.”
“제가 그렇게 약해 보일 줄은 몰랐군요. 운동량을 늘려야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우리 시호가 도와줄 건가?”
“응? 운동?”
“집에 돌아가서 쉬지 말고 계속하죠. 서시호가 만족할 때까지.”
그의 말을 이해한 시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윤기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엉큼해, 기윤기.”
“서시호가 지나치게 예쁜 탓입니다. 안고 있는 그 순간에도 안고 싶을 정도로.”
집으로 돌아간 윤기는 다시는 따로 따로 자야 하는 곳은 놀러 가지 않겠다며 내내 시호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친 그녀가 제 품에 안겨 잠들자, 윤기는 하얀 어깨에 키스한 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
주말이 지나고 화요일이 되었다.
용진과 훈련 프로그램 구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시호는 문득 그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낀 결혼반지를 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내 생각엔 주 3회는 오후 4시에 훈련을 끝내고, 6시까지 센터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서 단장님? 내 말 듣고 있어?”
“응? 아, 미안해. 어디까지 얘기했지?”
용진이 수상쩍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무슨 고민 있어? 어디, 이 선배한테 털어놔 봐.”
망설이던 시호가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지난 주말에 윤기랑 글램핑장에 갔었거든.”
“이야, 재밌었겠다. 어디에 있는데? 나도 도윤 엄마랑 도윤이 데리고 가야겠다.”
“그래, 언니 좋아하겠다. 이따가 휴대폰으로 주소 보내 줄게.”
“오케이. 그런데?”
시호는 윤기가 반지 상자를 주웠던 얘기를 해 주었다.
“근데 그 이후로 내내 생각에 잠겨 있어. 분명히 그때 뭘 느낀 것 같은데.”
용진이 혀를 쯧쯧 찼다.
“서시호야, 서시호야. 눈치 좀 있어 다오. 그렇지 않으면 네 머리를 구워 먹으리. 뭐겠냐. 기 선수가 너랑 커플링 맞추고 싶은 거지.”
시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거야?”
“당연하지! 나도 도윤 엄마랑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랬거든. 너무 이른 거 아닌가, 부담스러울 텐데, 근데 똑같은 반지 끼고 다니면서 커플인 거 티 내고 싶다, 이런 생각 엄청 했어.”
용진이 킬킬 웃었다.
“천하의 기윤기 선수도 연애하면 평범한 남자가 되는구나. 솔직히 나나 기 선수나 뭐가 다르냐? 언뜻 보면 비슷하지.”
“그건 아니야.”
단호한 시호의 표정에 용진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짜식. 캠핑 가서 단호박 많이 구워 먹었구나. 되게 단호하네.”
흐음. 시호는 생각에 잠겼다.
윤기와 커플링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커플링은 처음이다. 결혼반지는 논외로 치고.
“남자들은 어떤 커플링 좋아하려나?”
“오오, 서 단장님이 사 주시게?”
“내가 부담스러울까 봐 말을 못 꺼내고 있는 거면 그게 나을 것 같아서.”
“솔직히 디자인이나 브랜드는 상관없을 거야. 여자 친구가 주는 거면 음료수 캔 꼭지로 커플링을 삼아도 행복해할 거다.”
용진의 말에 시호는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깜짝 선물로 해 주게?”
“응. 하도 놀림을 많이 당해서 놀라게 해 주고 싶네.”
“무슨 인과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미연이한테 한번 얘기해 볼까? 도윤 엄마 친구 중에 금속공예인지, 여튼 액세서리 만드는 디자이너가 있다고 했거든. 언젠가 그 친구 작업실에 가서 가족 반지를 만들어 왔더라고.”
용진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짠. 이게 그 반지야.”
“와, 언니가 디자인한 거야?”
“응. 우리 미연이 대단하지.”
용진의 반지 겉에는 ‘100411’이 새겨져 있었다.
“바깥쪽 이 숫자는 우리 가족 태어난 달이고, 가운데 박힌 보석은 각자 좋아하는 색깔의 보석, 안쪽에는 가족 이니셜 새겼다.”
“멋있다. 언니한테 디자인 비슷하게 해도 되냐고 물어봐야지.”
“그래, 그럼. 둘이 직접 통화하는 게 낫겠다.”
회의를 마친 시호는 헬스장에 들러 개인 트레이너에게 트레이닝을 받았다.
글램핑장에서 체력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시호는 월요일부터 체력단련에 돌입했다.
어차피 무영단이 본격적으로 출범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체력이 요구될 테니, 겸사겸사.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