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산청에 다녀온 후 다시 주말이 다가왔다.
마트에서 장보기를 마친 시호와 윤기는 글램핑장에 가기로 했다.
그들의 목적은 노을을 보는 것이었으므로 서두를 게 없었다.
“정말 먹을거리만 준비하면 되는구나. 세상 참 좋아졌네.”
글램핑장을 한 번 돌아보고 예약한 포인트로 향했다. 취사도구도, 의자도, 텐트도 모두 갖추어져 있었고, 심지어 커다란 텐트 안에는 침대까지 있었다.
“신기해. 준비할 게 많을 텐데 어떻게 주말 동안 훌쩍 다녀오나 했더니.”
어린이처럼 이곳저곳을 신기한 듯 둘러보는 시호가 무척 귀여웠다.
윤기가 그녀에게 다가가 뒤에서 끌어안고 목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서시호 어린이가 또 나타났네요.”
“너무 촌스러웠나? 신기해서 그만…….”
“아뇨. 귀여웠습니다. 앞으로 자주 와야겠네요.”
“응, 그럼 좋겠어. 이따가 석양은 또 얼마나 멋질까. 우리 빨리 사 온 거 구워 먹자.”
시호를 한 번 꽉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춘 윤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릴에 야채와 고기를 구워 먹었다. 야외에서 직접 해 먹는 음식은 집이나 음식점에서 먹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야채 싫어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먹으면 잘 먹겠어.”
부푼 볼과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던 윤기는 피식피식 웃었다.
“왜 자꾸 웃어?”
“선배 꼭 다람쥐 같습니다. 안 뺏어 먹을 테니 천천히 먹어요.”
윤기가 시호의 접시에 고기와 구운 파프리카를 놓아주었다.
“너도 어서 먹어.”
“손이 부족해서 못 먹겠습니다.”
윤기가 입을 살짝 벌리며 먹여 달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 모습조차 왜 이렇게 섹시한지.
시호는 크흠, 목을 가다듬고 포크로 잘게 썬 파프리카와 고기를 한꺼번에 찍어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맛있네요.”
“그치? 밖에서 먹으니까 엄청 맛있어.”
“아니, 선배가 먹여 주니까.”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 윤기는 고등학생일 적처럼 순수한 소년 같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너 웃으니까 우이고 다닐 때랑 똑같아서.”
“선배는 그때보다 더 어려 보입니다. 잘 웃고, 잘 놀라고, 얼굴도 잘 빨개지고. 사과보다 더.”
“너 진짜!”
시호가 곱게 흘겨보자, 윤기는 미소 지으며 새우의 껍질을 까서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화내는 모습도 예쁘네, 우리 시호는.”
“소용없어, 너.”
“먹는 것도 예쁘고. 입가에 소스를 묻혀도 귀엽고.”
시호가 황급히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속아 넘어가는 모습도 귀여운 건 반칙 아닌가?”
“기윤기, 진짜! 너랑 말 안 할 거야.”
“정말로?”
“……먹는 동안만.”
그녀의 대답에 윤기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짜 귀여워 미치겠다니까.
뾰로통한 시호를 놀리며 달래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하늘 끄트머리로 붉게 몰려가는 석양은 무척 아름다웠다.
예전에는 저녁놀을 보면 쓸쓸하고 슬픈 기분마저 들었는데.
윤기와 함께 있는 지금은 즐거운 파티를 마친 후 은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옆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이토록 다른 기분이 든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윤기야.”
“아직 차 마시는 중인데. 말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먹는 동안이라고 했지, 마시는 동안이라고 하지는 않았잖아.”
짐짓 샐쭉한 척 말하니 윤기는 또 픽 웃었다. 이제 웃는 모습이 낯설지 않을 정도로 그는 자주 웃는다.
‘나랑 있을 때만…….’
그런 생각이 들자 시호의 뺨이 달아올랐다. 날이 어두워져서 참 다행이다.
“다행이네요. 차 마시는 동안에도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줄 알고 낙심하던 차였는데.”
이런 장난기 어린 말도 제법 익숙해진 지금이 정말 행복했다.
그래도 얼굴에 티를 낼 수는 없다. 또 놀릴 게 분명하니까.
“노을 보면서 어떤 생각 했어?”
“서시호 예쁘다.”
“……장난치지 말고.”
“정말인데. 내내 그 생각만 했습니다.”
윤기가 팔로 시호를 감싸 안았다.
“서시호는 왜 이렇게 예뻐서 사람 속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나. 언제까지 예쁠 건가. 언제쯤이면 좀 덜 설렐까. 이런 생각들.”
옅은 미소를 지은 윤기의 눈빛은 아주 소중한 보물을 바라보는 듯 다정하고 따뜻했다.
습기 없는 고요한 밤.
타닥타닥 모닥불 소리.
낮의 포근한 공기를 한껏 머금은 은은한 나무의 향기.
그 안에서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바라보는 윤기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은 꿈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윤기가 시호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하얀 이마에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선배가 내 속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당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의 입술이 시호의 손등에 닿았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호의 턱을 들어 올린 윤기가 입술을 살짝 맞댔다가 다시 살짝 뗐다.
“나도…… 그래.”
“너무 작아서 안 들립니다.”
숨결이 뒤섞이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슬쩍슬쩍 닿는 가까운 거리였다.
“나도 네 생각 해. 아주 많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대답에 윤기가 씩 웃었다.
시호는 불안해졌다. 저건 분명 장난칠 때 짓는…….
“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는데.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보여 줘도 좋고.”
……이럴 줄 알았다.
“그 정도면 길 가다가 걷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인가요? 잘 때 눈 감는 걸 잊어버리는 것도 해당됩니까?”
“기윤기!”
“어쩐지 요즘 선배가 좀 피곤해 보인다 싶었…….”
시호가 벌떡 일어나자 윤기가 크게 웃으며 얼른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좋은 말 할 때 놔라.”
“싫습니다. 그럼 도망갈 거잖아.”
“내가 피곤한 건 너 때문이 맞는데, 이유는 다르거든?!”
“어떤 이유인데?”
“네가 저녁부터 새벽까지 안 놔주니까 내가 피곤…….”
그의 눈빛에서 요요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시호는 아, 하고 깨달았다.
아아. 기윤기의 노림수에 넘어가고 말았구나.
큭큭 웃으며 시호의 어깨에 쪽! 입을 맞춘 윤기가 그녀의 볼을 감싸고 눈을 맞추었다.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남자 못지않은 체력을 자랑하시던 우이고 검도부 주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그게 몇 년 전인데. 그리고 네 체력 따라갈 사람은 대한민국에 몇 없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다.
‘체력 하면 서시호였는데.’
몇 년간 제대로 된 운동을 한 적이 없긴 했지. 차를 타고 다니느라 오래 걷거나 뛴 적도 없었고, 격한 운동은 품위가 떨어진다며 시댁에서 반대했었으니까.
“매일매일 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윤기의 말에 시호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기윤기, 너무 대담해진 거 아냐? 이 구역에는 우리밖에 없다지만 그래도 밖에서 그런 말은…….”
윤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말?”
“매일은 힘들어.”
잠깐의 정적 후.
윤기는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웃음을 참던 그는 결국 시원하게 터지고 말았다.
“왜, 왜 웃어?”
야한 말을 한 건 자기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가 이 정도였군요.”
“무슨 소리야?”
“전 체력단련을 말한 건데.”
체력단련? 그게 무슨…… 아.
“늘 그걸 생각하고 계셨군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았습니다.”
“아냐, 아니라고!”
시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윤기의 눈에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그래서 장난을 더 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 이상 하면 시호가 정말로 토라질 것 같았다.
“네가 목적어를 빼서 그래.”
“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오해하게 말했잖아.”
“맞습니다. 제 잘못이에요.”
윤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니 시호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여전히 미소하며 시호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예쁘기만 하면 됐지, 왜 귀엽기까지 해요.”
“늦었어, 너. 내가 그런 말로 쉽게 풀어질…….”
“사랑해요.”
귓가에 낮게 내려앉는 음성에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주 말하면 익숙해져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을까 봐 잘 안 했습니다.”
사랑해, 하고 윤기는 다시 한번 시호의 귀에 속삭였다.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시호의 입에서 여린 신음이 새어 나오자 윤기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부드럽게 머금기를 반복하다, 시호의 붉은 입술을 가르고 혀를 깊이 밀어 넣으며 휘감았다.
시호가 반응하며 역시 자신의 혀를 감아 오자 급격하게 흥분이 몰려들었다.
그녀의 허리를 한 번 강하게 끌어당긴 윤기가 어렵게 입술을 떼어 냈다.
“더는 위험할 것 같은데.”
그러자 아쉽다는 듯 시호의 입술이 따라붙었다.
윤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간신히 참고 있는 제 이성에 불을 지피는 행위였다.
“선배, 그만…….”
시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아랫입술을 깊이 머금었다.
그러자 짐승의 그르렁거림 같은 낮은 포효가 그의 목울대를 울렸다.
윤기가 시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시호의 입술 위로 쏟아졌다.
“야외에서 할 수는 없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윤기는 시호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맞아.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하면 안 되지.”
“그러니까 그만…….”
“그러니까 참아.”
이해ㅁ할 수 없다는 듯한 윤기의 눈빛에 시호가 입꼬리를 스르르 올렸다.
“그럴 수 있지? 기윤기는 우이고 시절만큼 체력도 강하고 인내심도 끝내주니까.”
그녀의 작은 복수였다.
시호는 이것으로 지금껏 놀림받은 것을 다 갚아 준 셈 치기로 했다.
그만큼 윤기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선배, 그냥 집으로 가면 안 됩니까? 아니면 근처 호텔이나…….”
“나 텐트에서 자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초롱초롱한 시호의 눈빛에 윤기는 끄응,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잘 땐 따로 떨어져서 자니까.”
아아, 그렇지. 이 글램핑장의 침대 옵션은 오직 싱글베드뿐이었다.
사유는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라나.
일전에 모두가 잠든 새벽, 한 커플이 뜨거운 밤을 보내며 낑낑거리는 소리에 근처에 다친 유기견이 있다고 판단한 몇몇 사람들이 신고를 하면서 큰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싱글베드는 실내의 끝과 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글램핑장 주인에게 그날의 기억이 꽤나 강렬했나 보다.
“그냥 한 침대에서 자면 안 됩니까? 제가 옆으로 눕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