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르쳐 주세요 선배-51화 (51/81)

제51화

아이들이 귀여워서 시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무래도 여자 선수보다는 남자 선수, 특히 윤기의 영상을 많이 보았을 남학생들은 윤기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집중하며 반응했다.

‘누가 누굴 보면서 눈을 빛낸대? 다들 기윤기한테서 눈을 못 떼는데. 질투는 내가 했어야 되네.’

임 감독이 죽도로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조용! 팬클럽 활동은 나중에 하고. 오늘은 두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다. 살아 있는 전설들이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뭐든 배우고 흡수할 것! 이상!”

“정렬!”

임 감독의 말을 복창한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섰다.

“시호야,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네가 주장이었을 때처럼 훈련시킨다, 생각해라.”

“그래도 될지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 죽도를 안 잡아서.”

“당연히 되지! 넌 내가 직접 선택하고 키워 낸 대한민국 최고의 검도선수다.”

“…….”

“요새 애들, 아직도 네 경기 영상 돌려 본다고 하더라. 일본의 한 대학 검도팀에서는 수업 자료로 너와 미야자키 선수가 붙었던 친선경기 영상을 쓴다고 하고.”

임 감독이 두툼한 손으로 시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괜찮아. 두려워 마라. 아, 저보다 이만치 큰 성인 남자한테도 겁대가리 없이 덤벼들던 서시호 어디 갔냐! 응?”

후. 심호흡한 시호가 배에 힘을 주었다.

“우선 연격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자세를 바로잡는 것을 중점적으로 둘 겁니다. 자, 연격!”

“연격!”

연격은 정면 머리치기, 연속좌우 머리치기를 짜 맞춘 검도의 기본적 동작의 총합적인 연습법으로, 운동의 시작과 끝에 행해지는 준비운동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슥 훑은 시호는 우이고 검도부 주장 시절의 모습 그대로였다.

윤기의 심장이 울렁거렸다. 마치 시호를 짝사랑하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일부러 몇몇 자세를 틀리면, 시호는 귀신같이 눈치채고 제게로 다가와 팔을 잡아 주거나 목을 바로 세워 주었다.

[팔 더 펴고. 목은 이렇게. 그렇지, 잘했어.]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떨렸고, 그날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연인이 되어 제 품에 안겨 잠든다.

가슴 가득 퍼지는 행복감에 속이 뻐근할 지경이었다.

꿈이 아닐까.

서시호 선배가 내 여자라니.

“같이 왔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런 사이지?”

슬쩍 다가온 임 감독이 윤기에게 소곤거렸다.

“어제 전화로 들었네. 시호, 이제 그 집 며느리 아니라고.”

“……예.”

“우이고 후배였다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 시호는 참 괜찮은 아이야. 재능이 있다고 우쭐하지 않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 그러던 와중에 자기 잘못도 아닌 부상으로 허무하게 선수 생활을 마감했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게야.”

윤기는 임 감독의 말을 묵묵히 듣는 것으로 동의했다.

“검도에 대한 마음이 깊었던 만큼 좌절도 컸겠지. 결혼한다고 소식을 전하러 왔을 때의 시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 저 녀석에게 그렇게 어둡고 절망적인 눈빛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

그날을 떠올리면 임 감독은 아직도 마음이 아팠다.

[시호야, 정말 네가 원해서 하는 결혼이냐?]

[…….]

[내가 어떻게든 해 보마. 돈이야 벌면 되는 거고, 너 정도의 경력을 가진 선수라면 취직할 곳은 얼마든지 있을 거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언제나 부모님처럼 챙겨 주신 거, 절대 잊지 않을게요.]

당시 시호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나중에 들었다. 회사의 부도로 인해 부친은 해고되었고, 노후 자금과 모친의 수술비로 모아 두었던 돈도 모두 탈탈 털렸다고 했다.

부상을 당한 시호가 당시 검도인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끽해야 학교 코치나 검도협회 사무실 직원이었을 텐데, 그 봉급으로는 가족과 생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도 제자를 도울 충분한 여건이 되지 않았었으니 필연적으로 시호가 선택할 길은 결혼뿐이었다.

“앞으로 시호가 행복했으면 좋겠네. 다쳐도 참고 인내하는 데 인이 박힌 아이니, 자네가 옆에서 잘 살피고 어루만져 줘. 시호 얼굴이 평안해진 게 자네 덕인 것 같으니.”

윤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굳게 다짐했다. 임 감독의 말대로, 반드시 시호를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연격을 마친 시호는 대련을 시켰다.

아이들을 꼼꼼히 살펴 장점과 단점을 파악한 뒤, 한 명 한 명에게 자세히 일러 주었다.

“연습이 끝나고 일지를 작성하고 있는 사람 있어요? 아주 간단하게라도.”

역시나 기대했던 아이들 몇 명이 손을 들었다.

“기억보다 기록이 정확합니다. 나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다시 머릿속에 새기는 작업을 거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확실히 달라요.”

“…….”

“감독님께서는 제게 매일 일지를 거르지 말라고 하셨고, 전 초등학생일 때부터 대학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지를 썼습니다. 그게 운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임 감독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실함으로는 시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요즘은 동영상을 많이 찍으니까 그것을 보면서 분석해도 괜찮고요. 다른 사람의 영상을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무엇보다, 검도를 진지하게 대하며 즐기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잘하고 있으니, 목표를 이루는 그날까지 열심히 달려요.”

커다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호가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한 뒤 윤기와 임 감독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잘한 건지 모르겠어요.”

“훌륭했다. 누구 제자인데, 그럼.”

마주 보며 웃는 시호와 임 감독은 사이좋은 부녀처럼 보였다.

“감독님.”

윤기가 임 감독을 불렀다.

“제가 입을 만한 도복과 호구 있습니까?”

“있긴 한데. 왜 그러나?”

“선배처럼 말을 잘하는 재주는 없고. 그냥 대련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임 감독의 눈이 빛났다. 수준급 선수와 직접 붙어 보는 것보다 더 좋은 배움은 없을 것이다.

“호석아, 세훈이 도복이랑 호구 좀 가져오너라! 오늘 국가대표 선수가 너희들과 친히 대련을 해 주신단다.”

와아아아아!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기대와 긴장이 뒤섞인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보기 좋았다.

“그럼 난 영상 찍어 줄게.”

시호의 말에 윤기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앞에 서서 죽도를 맞대자마자 살기가 막 느껴졌습니다. 국가대표는 다르더라고요.”

“기운이 진짜, 와. 살기라고 해야 하나? 별로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살피는데, 진짜 대박이었습니다. 발목이 체인에 묶인 느낌?”

“공격이 빠르게 막 들어올 땐 진짜 정신을 못 차리겠고, 틈을 노리기는커녕 막는 데 급급했습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를 실감했습니다.”

윤기와 대련을 마친 학생들의 소감에 임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는 오늘 돈 주고도 못 살 아주 값진 경험을 한 거다. 이론서를 몇 권 읽고 영상을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칼을 부딪쳐 보는 게 훨씬 낫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두 분께 감사합니다, 외치며 박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체육관을 뒤흔드는 커다란 외침에 시호와 윤기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화답했다.

“이번 달까지만 감독 맡기로 했다. 새 감독 오면 인수인계하고 바로 연교로 올라가마.”

시호의 얼굴에 환한 빛이 퍼졌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아니다. 지금까지 버텨 줘서 내가 더 고맙다.”

임 감독의 두툼한 손이 시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장하다. 우리 시호.”

임 감독의 따뜻한 한마디에 시호는 코끝이 찡해서 혼났다.

“선수들은 추렸냐?”

“몇몇은 메일 보냈고 몇몇은 아직 알아보는 중입니다.”

“선수단이니 실적이 중요하겠지만. 인성이 나쁘면 다 소용없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을 흐리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안 풀리면 연락해라. 나도 알아보마.”

“네. 감사해요, 감독님.”

임 감독은 윤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아주 고마웠네. 국가대표가 저 아이들 칼을 전부 일일이 받아 주다니. 애들한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을 선물해 줬어.”

“저도 감사드립니다. 감독님으로 와 주셔서.”

두 남자가 손을 맞잡자 시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운전 조심하고. 도착하면 연락하고.”

“그럴게요. 이제 들어가세요.”

“가는 거 보고.”

겉은 무서운 호랑이지만 정이 많은 임철민 감독이었다.

임 감독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이드미러를 보고 있던 시호는 굳게 다짐했다.

단단하고 따뜻한 무영단을 만들겠다고.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지치면 안 되겠다고 말이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막히지 않았다. 휴일인 것을 감안하면 큰 행운이었다.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아. 오랜만에 고등학생들이랑 얘기하고 감독님 뵈니까 에너지가 막 생기는 거 있지.”

윤기가 흐음, 하며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렸다.

“왜?”

그가 이렇게 뚫어지게 쳐다볼 때면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가서 자세를 바로 하게 되었다. 까딱 정신을 잃었다간 순식간에 잡아먹히기 십상이다.

“선배가 좋아하는 건 기쁜데. 그 이유가 내가 아니라는 게 좀 서운하네요.”

감정에 솔직해야지, 다짐하는 저와 다르게 윤기는 언제나 솔직했다. 그런 만큼 설렜고 또 부러웠다.

“머리 좋은 줄 알았는데 바보였네, 기윤기.”

시호가 고개를 숙이고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네가 옆에 있어서라는 걸 왜 몰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와 비어 있는 자리에 주차하던 윤기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어정쩡하게 멈춰 있는 차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냈다.

“윤기야, 여기서 멈추면 어떡해!”

뒤이어 들어오던 차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호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정신을 차린 윤기가 간신히 주차를 마쳤다.

시동을 끈 그는 속에서 차오르는 감정을 꾹 내리누르고 그녀를 보았다.

“집에 올라가면 안 놓을 겁니다.”

검은 눈동자에서 피어오르는 요야한 열기에 시호 역시 몸이 달아올랐다.

“……통했다, 우리. 나도 안 놔줄 생각이었는데.”

순간 얼굴을 구긴 윤기가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무척이나 조급한 표정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도어록의 숫자를 누르고 문을 열자마자 입술을 겹친 그들의 몸이 틈 없이 맞닿았다.

정신없이 신발과 옷가지를 벗어 던진 두 사람은 침대까지 가지도 못했다.

소파에 누운 시호의 위로 윤기의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디 얼마나 통했는지 확인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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