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기윤기가 누구인가.
현재 대한민국 검도계 최정상에서 군림하는 명실상부한 원톱 스타가 아니던가.
“이야, 서시호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기윤기 선수를 영입했어?”
용진이 손뼉을 짝! 쳤다.
“맞다, 둘이 우이고 선후배 사이지! 학연이라기엔 기 선수가 너무 거대한데. 연교시청에서 순순히 놔준대?”
“내부에 문제가 많은 모양이야. 그리고…….”
고민하던 시호는 용진에게 그들의 사이를 밝히기로 했다. 어차피 함께 일하다 보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만나고 있어. 진지하게.”
용진은 그녀가 결혼을 한다고 말했을 때만큼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귀고 있다고? 둘이?”
“응, 그렇게 됐어.”
시호가 볼을 붉히며 말하는 모습에 놀리던 것도 잠시.
용진은 예전에 전국체전에 참석했다가 들었던 윤기와 관련된 얘기를 떠올렸다.
그때 시호는 아직 이혼 전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매년 검도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했던 그녀는 그해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회에 참석하는 고등학생 제자에게 향하던 용진은 본의 아니게 탈의실로 이어진 통로를 앞서 걷던 검도 관계자들의 말을 듣게 됐다.
시댁에서 바깥 활동을 금지했다는 것을 모르는 그들은 검도를 이미지 세탁에 이용하고 버렸다며 시호를 욕했다.
‘저 꼰대들이, 진짜. 검도하는 사람들 평판 높여 준다고 우쭈쭈 해 줄 땐 언제고……!’
용진이 발끈하던 그때, 그들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지난번 회동 때 기 사장이 들렀거든.]
[기 사장?]
[GY화학 기선욱 사장 말이야. 기윤기 선수 아버지.]
[아아, 그래. 그런데?]
[협회장이 서시호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몇 마디 하더라고.]
[뭐라고?]
[기윤기랑 서시호 둘 다 우이고 출신이잖아. 기윤기가 주장이었던 서시호를 아주 잘 따랐다고 하고. 그래서 협회장이 기 사장한테 시호 같은 며느리 어떠냐고 물어봤거든.]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것도 잊고, 용진은 귀를 쫑긋했다.
[그랬더니?]
[절대 안 된다는 거야. 윤기도 무뚝뚝하고 승부욕이 강한 편인데 며느리는 좀 유하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면서.]
[하긴. 서시호가 너무 빈틈이 없긴 하지. 살갑게 말 한마디 붙이는 것도 못 봤고. 거기다 기윤기네 집안도 RS그룹 못지않잖아. 아버지는 GY화학 사장에, 연교는 거의 그 집 땅이라고 보면 되고. 큰아버지는 민성당 대표라지, 아마?]
용진은 입을 떡 벌렸다. 기윤기 선수가 그렇게 대단한 집안 아들이었어?
그는 연교 출신이 아닐뿐더러 검도장 운영에 온 신경을 쏟았기에 선수의 집안 같은 사적인 정보는 알지 못했다.
[협회장님 또 사랑의 큐피드 역할 하려고 떠보신 거지? 기 사장님 취향의 며느리 파악해서 소개시켜 주려고.]
[왜 아니야. 지난번에 당신이 소개시켜 준 집안끼리 사돈 맺고 비싼 양복 받으신 이후로 아주 재미 들리셨다니까.]
그때를 회상한 용진은 설렘 가득한 시호의 얼굴을 보며 속을 감추었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초를 칠 수는 없지. 게다가 그건 벌써 몇 년 전 일이다.
“이야, 서시호 능력 좋다? 대한민국 검도계의 희망이자 미래인 슈퍼스타를 영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애인으로 두다니. 역시 믿고 따를 만하다니까. 축하해. 새로운 사랑을 응원한다.”
“고마워, 선배.”
“공개 연애인 거지?”
조심스러운 용진의 질문에 시호는 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윤기라면 그러고 싶어 할 거야.”
“너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윤기한테 피해가 갈 것 같아서 두려워.”
어떤 고난이 닥쳐도 의연하게 견뎠던 시호가 두렵다고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진심으로 윤기를 사랑한다는 뜻이리라.
“기윤기 선수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긴 하구나. 서시호 입에서 두렵다는 말이 나오다니.”
행복한 한편, 시호는 두려웠다. 그들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면 다들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 댈 것이다.
자신을 향한 화살은 견딜 수 있으나, 윤기가 걱정이었다. 신경이 쓰여서 운동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저 때문에 윤기가 피해를 입는 것은 결코 원치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해 갈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윤기는 항상 괜찮다고 하지만, 괜찮지 않을 때도 그렇게 말할까 봐 걱정이야.”
“너처럼?”
용진의 말에 시호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아마 기윤기 선수도 너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야. 시호 너야말로 괜찮지 않을 때도 괜찮다고 하잖아.”
“아…….”
“결혼할 때 미연이랑 손가락 꼭꼭 걸고 약속했거든. 우리 생에는 사별뿐이고 이혼은 절대로 없다고. 그러려면 서로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말해서 오해가 쌓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
“그러니까 너도 네가 느끼는 감정들을 기 선수한테 솔직히 말해 줘.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힘들면 힘들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아무것도 몰라.”
용진의 말은 시호의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고마워, 선배. 마음에 깊이 새길게.”
“오랜만에 선배 노릇 좀 했더니 되게 쑥스럽다, 야. 참, 마케팅 맡아 주기로 한 친구는 10분 후쯤 올 거야. 우리 도장 콘텐츠도 그 친구가 편집했었는데, 실력이 아주 좋아. 이름은 염지우, 스물넷 여대생이고 현재 휴학 중.”
“연교로 내려와서 지내야 할 텐데 괜찮을까?”
“그 친구 외할머니 댁이 연교라서 거기서 지낸대. 어릴 때부터 방학 땐 연교에 있었나 봐. 어, 저기 온다. 지우야!”
용진이 손을 번쩍 치켜들자 하얀 티셔츠에 옅은 하늘색 청바지를 입은 단아한 여학생이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지우야, 이쪽은 무영단 단장님.”
“반가워요. 서시호입니다.”
시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지우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시호를 쳐다보던 지우가 황급히 고개를 푹 숙였다.
“……염지우입니다.”
“아아, 지우 너 시호 선수 시절 동영상 봤구나?”
끄덕끄덕. 지우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지우가 뭐에 꽂히면 끝장날 때까지 파고들거든. 요즘 말로는 ‘덕질’이라고 하던데. 맞지?”
다시 끄덕이던 지우는 시호를 힐끔 보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작은 어깨가 들썩거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하, 지우가 너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래도 안심하면 안 돼. 저렇게 얌전하고 순해 보여도 죽도 들면 지우 되게 난폭하다? 너도 안 봐줄걸.”
“과, 관장님!”
발끈하는 지우의 모습은 무척 귀여웠다.
나도 저 나이 때 저렇게 귀엽고 예뻤을까. 그땐 하루하루 버텨 내기 급급해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새도 없었다.
시호는 문득 생각했다. 이런 아이가 윤기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그 자체만으로도 반짝반짝 빛나고, 또한 이혼 경력이 없이 깨끗한.
“어이, 서 단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냐, 아무것도. 지우 씨,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시호가 악수를 건네자,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을 영접한 팬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지우가 수줍게 손을 맞잡았다.
***
주말이 되었다.
시호와 윤기는 산청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챙겨 온 간식을 먹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시호가 운전을 하는 윤기의 입에 무설탕 젤리를 넣어 주었고, 신호에 차가 멈추면 윤기는 그녀의 손등이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애정을 표현했다.
“선배, 우리 다음 주 주말에 글램핑장에 갈까요?”
시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글램핑? 캠핑 같은 거지? 나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저도 처음입니다. 캠핑과는 다르게 웬만한 건 다 갖춰져 있고 대여도 할 수 있어서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좋아.”
신이 난 듯 시호의 목소리가 들떴다. 윤기는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럼 예약해 놓겠습니다.”
시호는 스마트폰으로 글램핑장을 검색했다.
“와. 사진을 잘 찍어서 그런가? 해외 휴양지 못지않게 예쁘다. 분위기도 좋고.”
“해외는 많이 가 보셨습니까?”
아무래도 그럴 테지. 시댁이 굴지의 대기업이었으니, 외국을 옆 동네 가듯 숱하게 갔을 거라고 윤기는 생각했다.
“아니. 캐나다 제외하면 한 번밖에 없어.”
“어디에 가셨습니까?”
“……하와이.”
“즐거우셨겠습니다.”
“별로 재미없었어.”
“누구랑 갔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던 시호가 결국 작게 대답했다.
“허니문이었어.”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기는 핸들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핏줄이 불뚝 불거져 나왔다.
어색한 분위기에 목이 졸리는 듯 갑갑했다. 시호는 생수병의 뚜껑을 따서 물을 넘겼다.
생수병을 보니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윤기와 처음 만난 날, 시호가 사려던 생수 한 박스를 계산한 그가 보답으로 자신에게 물 30병을 사달라고 했었다.
그땐 좀 특이하다고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자신과 만나는 횟수를 늘리려던 거였다.
그 정도로 자신을 좋아해 주는 윤기다. 자신이 다른 남자와 허니문을 다녀왔다는 말을 들은 그의 기분이 어떨지…….
물을 마셨음에도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설상가상 빨간불에 차까지 멈춰 섰다.
달리는 중이었다면 그가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입을 다물고 있겠다는 핑계라도 댈 텐데.
‘신호가 원래 이렇게 길었나.’
시호가 신호등만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던 그때였다.
“저도 선배와 가고 싶습니다.”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곧바로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올곧이 저를 향한 새까만 동공은 너무 깊어서 속을 읽을 수 없는 심해 같았다.
“나도 그때 자세히 구경을 못 해서, 나중에 다시 와야지 싶었거든. 언젠가 같이 하와이에 가자.”
“아니. 하와이가 아니라.”
윤기가 시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신혼여행.”
시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낮은 음성과 집요한 응시에 가슴이 미친 듯이 떨렸다.
윤기가 눈을 크게 뜬 채 굳은 시호의 볼을 감싸고 엄지로 아랫입술을 느른히 문질렀다.
“신혼여행 가자, 시호야.”
허니문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윤기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어쩌면 새까맣게 물들었다.
지옥불보다 더 뜨거울 것이 분명한 질투심이 들끓었다. 제 온몸을 태워 버리고 잿더미로 만들고 나서도 여전히 활활 타오를 것 같았다.
“서시호랑 신혼여행 가고 싶은데.”
그녀의 붉은 입술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은밀한 의미가 담겼다.
“어떻게 생각해요?”
그의 손가락이 좀 더 안으로 들어와서 자연스레 입술이 벌어졌다.
“같이 가 줄 건가?”
“아…….”
“그렇다는 대답으로 알게요.”
그가 순식간에 입술을 겹치고 곧장 혀를 밀어 넣어 시호의 혀를 휘감았다.
짧은 프렌치 키스였지만 시호는 뜨거운 열락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저로 인해 달아오른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윤기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늦어진다고 연락해야 할 것 같은데.”
왜? 시호가 눈으로 묻자 그의 눈동자에 짙은 음욕이 드리웠다.
“이렇게 야한 얼굴을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보여 줘. 나만 보기에도 모자란데.”